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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實用〕 좌·우 통념 깬 실용... 대만 반도체 도약

Paul Ahn 2025. 6. 11. 14:31

實用 좌·우 통념 깬 실용... 대만 반도체 도약

 

지난 2일 대만 서남부 타이난 남부 과학단지에 들어서자 높이 50m의 거대한 송전탑이 빽빽하게 이어진 대로(大路)가 눈앞에 펼쳐졌다. 국영기업 대만전력공사는 이 지역에 전력 3GW(기가와트)를 공급할 수 있는 단지 전용 초고압 변전소를 운영하고 있다. 원자력발전소 3기 수준의 전력을 이 과학 단지만을 위해 공급하는 셈이다. 단지엔 하루에 335000t을 제공할 수 있는 급수관도 설치돼 있다. 물과 전기를 풍족하게 갖춘 남부 과학단지는 반도체 생산에 최적화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대만 대표 기업이자 세계 1위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TSMC는 매출의 절반을 차지하는 5(나노미터·1㎚는 10억분의 1m) 3㎚급 반도체를 이곳에서 가장 많이 생산한다.

 

 

남부 과학단지는 21세기 들어 8(2008~2016)을 제외하고 대만을 이끌어온 진보 정당인 민주진보당(민진당) 정부의 산업 정책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곳이다. 보수 정당인 국민당이 집권하던 1990년대 중반에 첫 삽을 뜬 단지를 전폭적으로 지원해 지금의 첨단 대만거점으로 성장시킨 주체가 민진당이다.

 

2000년 처음 정권을 잡은 민진당이 반도체를 중심으로 한 본격적인 친기업·친성장 정책을 펴기 시작한 시점은 차이잉원 정부가 정권을 탈환한 2016년 즈음이었다고 평가받는다. 당시 중국의 군사·외교·경제적 압박이 거세져, 중국으로 자본이 유출되고 중간재 위주의 수출 구조가 고착화됐다. 한때 한국에 앞섰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한국에 역전당한 후 격차가 벌어지는 등 경제가 정체돼 있었다.

 

위기론이 커지는 가운데 집권한 민진당은 진보는 성장보다 분배를 중시한다는 통념을 깨고, 실용주의에 입각한 친기업 정책을 빠르게 추진했다. 야당에 대한 정치 보복, 무리한 탈원전 추진 등으로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첨단 기업의 연구·개발비에 대한 세액공제를 파격적으로 확대하고 반도체 기업에 한해 근로시간을 유연하게 적용하도록 한 노동법 개정도 이끌었다. 이런 유연한 친기업 정책은 보수 야당의 호응도 이끌어냈다고 평가받는다.

 

왕훙런 국립청쿵대 정치학과 교수는 본지에 대만 민진당의 지난 20년은 개발도상국에서 진보 정당이 경제성장을 달성하지 못한다는 일반적 인식에 대한 반례를 보여준다새로 출발하는 한국의 진보 정권은 대만 사례에서 단기적 유연성과 장기적 이념 추구가 양립 가능하다는 사실을 배울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국민당이 토대 마련한 TSMC, 민진당이 세계 기업으로 키워

 

타이난 남부 과학단지에서 차로 30분 정도 거리에 있는 사룬(沙崙) 과학단지엔 AI·녹색 에너지 등 미래 산업을 위한 연구·개발(R&D) 센터들이 입주하느라 이사가 한창이었다. 대만 중앙연구원·공업기술연구원(ITRI)이 이곳에 분원을 냈고, 미국 반도체 설계 기업 AMD도 얼마 전 R&D 센터를 차렸다. 몰려드는 기술자와 연구원들은 지역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단지 근처엔 타이난 고속철도역과 이중 언어 교육을 하는 국제고가 생겨났다. 곳곳에 아파트와 쇼핑 센터가 들어서는 모습도 보였다.

 

1980년대 형성된 신주 과학단지를 뒷받침하는 대규모 생산 단지로서 남부 과학단지가 빠르게 성장하기까지는 대만 민진당 정권의 탄탄한 지원이 있었다. 단지에 넉넉히 흐르는 물과 전기가 산 증거다. 민진당 출신 첫 총통인 천수이볜 집권기였던 2002년 대만전력공사는 남부 과학단지에 345kV짜리 초고압 변전소를 건설했다. 특정 공업단지를 위한 변전소를 별도로 설치하는 일은 전례가 없지만, 반도체 공장을 위해 정부가 특혜를 준 것이다. 2021년 이른바 대가뭄’ 때문에 대만 반도체 업계가 고사(枯死) 위기에 처하자, 이듬해 논란 속에서도 남부 과학단지의 재생수 공급 시설을 바로 가동한 것도 차이잉원 행정부였다.

 

‘대만판 반도체법으로 알려진 산업 혁신 조례 개정안은 발의 반년 만에 입법원(국회)을 통과했는데, 이 법을 입법한 주체 또한 차이잉원의 민진당 정부였다. 2022 6월 대만 경제부가 첨단 산업이 대만에 뿌리내리도록 잡아둬야 한다며 입법 예고를 했고 이듬해 1월 처리됐다. 반도체를 비롯한 첨단 기업의 R&D 비용 25%를 세액공제해 준다는 내용을 담은 이 법은 종전 공제 비율(15%)을 파격적으로 올린, 대만 역사상 가장 높은 수준의 R&D 혜택으로 꼽힌다. 애초부터 반도체·기업 친화적인 보수 야당(국민당) 또한 입맛에 맞는 법안을 반대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의회 통과는 원활했다.

 

민진당은 이처럼 보수 정권이 내놓을 법한 친기업·친시장 정책을 미리 제시하면서 정치적 갈등을 최소화했다. 시진핑 국가주석 집권 이후 중국의 군사·정치적 위협이 강해지고 안보가 불안에 빠지자 전략 자산으로 반도체·AI 산업을 보호하는 전략을 썼다. 세계 1위 파운드리 TSMC가 중심이 된 강력한 반도체 생태계가 대만에 형성되면, 중국에 대한 경제적 의존을 줄이고 미국·유럽 등 우호 국가와 동맹도 강화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대만의 진보 정권은 반도체와 관련 산업에 어려움이 생길 때마다 해결사를 자처했다. 대만에 극심한 가뭄이 이어지던 2022년 차이잉원 정부는 농업 용수를 TSMC에 우선 공급할 수 있도록 반도체 공장 부근 농민들을 직접 설득했다. 남부 과학단지는 타이난의 주요 저수지인 증문댐·난화댐을 파이프라인으로 연결해 물이 부족할 때 공장에 용수를 바로 끌어다 쓸 수 있도록 했다. 중앙정부가 지방정부를 설득해 이끌어낸 성과로, 한국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건설이 민원과 여주시의 공업 용수 지원 반대에 부딪혀 어려움을 겪는 상황과 대조된다.

 

친기업, 특히 대기업인 TSMC를 돕는 경제정책은 때때로 진보 정권의 지지 기반인 노동계와 청년층의 반발을 샀지만 민진당은 밀고 나갔다. 2017년 반도체 업계를 위한 근로법 개정 당시의 갈등이 대표적이다. 대만 근로법은 주 5, 40시간 근무가 기본이다. 그런데 차이잉원 정권은 신기술 개발 때 집약적으로 일할 필요가 있는 반도체 등 첨단 산업의 특성을 고려해, 노사 합의 시 하루 최장 12시간까지 근무할 수 있도록 근로법을 개정했다. 최장 12일 연속 근무도 허용했다.

 

당시 라이칭더 행정원장(국무총리·2024년 총통 당선)은 근로법 개정안 통과를 발표하면서 노동자의 기본 권리는 변하지 않지만, 산업계와 현장의 현실을 반영한 유연성은 허용하겠습니다라고 설명했다. 이른바 ‘4불변·4탄성(4不變·4彈性)’ 원칙이다. 필수 원칙(주권, 민주주의, 현상 유지, 자주 국방)은 수호한다고 약속하는 대신, 이를 제외한 경제·사회 분야는 산업 현장 수요에 따라 탄력적으로 운용할 수 있게 하겠다고 그는 설명했다. (4탄성의 나머지 둘은 국방 현대화와 인권·자유 가치 수호다.) 왕훙런 교수는 민진당은 경제성장이 사회적 정의와 상충되지 않고, 오히려 사회적 정의를 위해 경제성장이 필요하다는 점을 인식하고 국민을 설득했다고 했다.

 

근로법 개정 당시 대만 노동계는 노동권의 후퇴라며 이를 거세게 비난했다. 2017년 말 타이베이에선 2014년 이른바 해바라기 운동(2014년 중국 밀착 반대 운동)’ 이후 최대 규모 반정부 시위가 열렸다. 골수 지지층이 등을 돌려 정권 지지율이 하락했고, 이는 2022년 지방선거에서 민진당의 패배로 이어졌다고 평가된다. 차이잉원 당시 총통은 너무 짧은 기간 법을 바꿔 사회 불안이 초래된 점을 사과한다며 대()국민 사과를 하면서도 개정된 근로법을 후퇴시키진 않았다.

 

궈위런 국립중산대 중국·아태지역연구소 교수는 지금은 한국 경제에 내부 요인이 아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관세 전쟁 등 외부 요인이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시기라며 한국의 진보 정부가 법인세를 올리거나 대기업을 해체하는 것 같은 이른바 진보적 조치에 집착하기보다는 외부에서 닥치고 있는 경제 위기에 맞서 대만의 민진당 정부처럼 유연하게 대응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대만 민주진보당

1986년 대만에서 결성된 첫 합법 야당. 창당 후 1990년대 국민당 권위주의 정부에 대한 반발을 바탕으로 정치적 입지를 키웠다. 2000년 천수이볜 총통 당선으로 처음 정권 교체에 성공했고, 2016년 차이잉원 총통 집권 이후 재집권했다. 민진당은 친중 보수 정당인 국민당과 달리 중국과의 거리 두기와 국제사회에서 대만의 주체성 강화를 강조한다. 사회복지 확대, 환경 보호 등을 강조하는 진보적 정책을 주도해왔다.

 

2025.06.09. 00:55

타이베이=변희원 기자

타이난=류재민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