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걸리는 술이 아니고 밥이며, 은총이다
국가무형문화재 지정된 막걸리의 역사와 우리 민족의 술 문화
막걸리 빚기 문화는 지난 6월 15일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됐다.
<게티이미지뱅크>
‘귀천(歸天)’의 시인 천상병(1930~1993)은 막걸리에 대해 ‘술이 아니고 밥일 뿐만 아니라 즐거움을 더해 주는 하느님의 은총’이라고 했다. 그 막걸리가 6월 15일 드디어 국가무형문화재가 됐다.
정확하게는 ‘막걸리 빚기 문화’가 문화재지정 대상이다. 막걸리를 빚는 작업은 물론이고, 다양한 생업과 의례, 경조사 활동 등에서 나누는 전통 생활관습까지를 포괄한 것이다. 특히 이번 ‘막걸리 빚기 문화’에 대한 문화재 지정은 2019년 ‘숨은 무형유산찾기’와 ‘국민신문고 국민제안’을 통해 국민이 직접 제안해 이뤄진 첫 번째 사례로 의의가 크다.
#. 막걸리는 예로부터 주로 농군들이 마시던 술이라 하여 ‘농주(農酒)’라고도 하고, 그 빛깔이 희다고 하여 ‘백주(白酒)’ ‘회주(灰酒)’, 걸죽하고 탁하다고 ‘탁주(濁酒)’ ‘재주(滓酒)’라고도 한다. 막걸리는 일반적으로 쌀을 깨끗이 씻어 지에밥(고들고들하게 지은 된밥)을 지어 식힌 뒤 누룩과 물을 넣고 여러 날 발효시켜 체에 걸러 만든다. ‘막’은 ‘마구’ ‘이제 막’이라는 의미이며 ‘걸리’는 ‘거른다’는 뜻으로 ‘거칠고 빠르게 걸러진 술’을 말한다. 시간을 들여 곱게 거른 청주와 약주는 물론, 이들을 증류해 만드는 소주까지 죄다 막걸리가 출발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막걸리와 막걸리를 빚는 행위가 중요하다.
#. 우리나라 술의 역사는 곧 막걸리의 역사나 다름없다. 문헌상 최초로 막걸리가 등장하는 것은 1837년 작성된 필사본 ‘양주방(釀酒方)’ 기록으로 ‘쌀과 누룩으로 술을 빚은 뒤 숙성되면 술밑을 체에 받아 버무려 걸러낸 것으로 쌀알이 부서져 뿌옇게 흐린 술이 된다’고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삼국지>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에 부여의 ‘영고(迎鼓)’, 고구려의 ‘동맹(東盟)’, 예의 ‘무천(儛天)’ 등의 집단행사에서 음주가무가 성행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뤄 우리나라에서 술의 역사가 늦어도 부족국가시대부터 전해오는, 아주 오래 된 생활문화임을 알 수 있다.
또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의 문헌에 술을 뜻하는 말이 자주 등장하는데, 특히 <삼국유사>의 ‘가락국기’에는 매년 세시(歲時)에 술을 마신다는 기록이 있어 이미 음주문화가 민속이 돼 일반화됐음을 보여준다. 또 <태평어람(太平御覽)>에 고구려 여인이 빚은 ‘곡아주(曲阿酒)’가 강소성(江蘇省) 일대에 명주로 알려져 있다고 나오고, 당나라의 시인 이상은(李商隱)이 ‘공자시(公子時)’에서 ‘한 잔 신라주의 기운, 새벽바람에 쉽게 사라질 것이 두렵구나(一盞新羅酒 浚晨恐易銷)’라 고 읊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당시 우리나라 술의 명성이 중국에까지 알려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 막걸리 기원은 삼국시대 초 무렵
당시의 술이 어떤 종류였는지 알 수는 없으나 6세기 초 간행된 북위 가사협(賈思勰)의 <제민요술(齊民要術)>에는 기장을 주된 원료로 누룩을 사용해 술 빚는 법이 소개되고 있어 우리나라에서도 기장, 좁쌀 등을 원료로 거의 비슷한 방법과 수준으로 술을 만들어 즐겼을 것으로 여겨진다. 현재 네팔이나 티베트 등 산간지역에서는 좁쌀로 우리의 막걸리와 비슷한 ‘창(chang)’을 빚어 마신다.
오늘날과 같은 막걸리는 한반도 남부에 쌀농사가 정착된 삼국시대 초 무렵부터일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 <고사기(古事記)>에 ‘오진(應神)덴노 때 백제사람 인번(仁番)이 누룩을 써서 술을 빚는 기술을 전파했다’고 나오는데 비슷한 때의 일본문헌 <연희식(延喜式·901∼922)>에 ‘술 여덟 말을 빚는 데 쌀 한 섬, 누룩 너말, 물 아홉 말을 쓴다’는 내용이 있어 인번이 전한 술도 쌀과 누룩을 이용한 술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중국에서 물을 섞지 않은 막걸리(우리는 ‘진땡이’라 부른다)를 무회주(無灰酒) 또는 순료(醇醪)라고 했는데<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수로왕(首露王)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해 요례(醪禮)를 빚었다’는 대목이 나온다. 또 일본의 ‘쇼소인(正倉院)’ 문서에 청주·탁주·술지게미·예주(禮酒: 감주와 비슷한 술) 등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당시 우리나라에도 이러한 종류의 술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시대에는 막걸리의 별칭인 ‘백주(白酒)’ ‘탁주(濁酒)’ ‘박주(薄酒)’가 각각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도은집(陶隱集)> <동문선(東文選)>에 나타나고 있어 청주, 소주와 함께 우리 민족의 3대 술의 하나로 자리했음을 알 수 있다.
또 고려 인종(仁宗) 1년(1123) 북송의 사신으로 왔던 서긍(徐兢)의 <고려도경(高麗圖經)>에 ‘서민들은 왕의 술을 빚는 사온서(司醞署)에서 나오는 청주와 법주 등 고급술을 얻기 어려워 맛이 박(薄)하고 빛깔이 진하며 마셔도 잘 취하지 않는다는 술을 마신다’고 기록하고 있어 당시 막걸리가 서민들의 술임을 증언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가양주(家釀酒)문화가 발달해 다양한 종류의 술이 있었는데 서유구(徐有榘의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에 따르면 170종의 술을 열 한가지로 나누고 있다. 이 가운데 막걸리는 ‘앙료류(醠醪類)’로 구분해 이화주(梨花酒), 집성향(集聖香), 추모주(秋麰酒), 백료주(白醪酒), 분국백료주(粉麴白醪酒) 등을 포함시켰다.
#. 막걸리는 ‘막 거른 술’이라고 해서 얼핏 생각하면 서민들만 마셨을 법 하지만 지체 높은 양반들도 즐기는 술이었다. 조선 중기의 명필 석봉(石峯) 한호(韓濩·1543~1605)는 잘 알다시피 어린 시절 가난하게 자랐지만, 가평군수와 흡곡(歙谷) 현령 등 벼슬살이를 한 사람이다. 그의 유명한 시조에 막걸리가 나온다. 박주다.
‘짚방석 내지 마라. 낙엽엔들 못 앉으랴/ 솔 불 혀지 마라. 어제 진달 돋아 온다/ 아희야, 박주산채(薄酒山菜)일망정 없다 말고 내어라’ 조선 후기 학자인 간송당(澗松堂) 조임도(趙任道·1585~1664)도 산골 막걸리를 통해 무릉도원을 노래한다. ‘세상 사람들은 무릉도원이 좋다지만/ 세상사 잊을 만한 도원은 만나지 못했네/ 산골막걸리에 취해 세상사 잊을 수만 있다면/ 사람 사는 곳 어딘들 도원이 아니랴?’
취해서 세상사 잊을 수만 있다면 산골막걸리면 어떻고 천주(天酒)면 어떠리오.
조선 후기 문신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1651~1708) 선생 역시 지인과의 석별의 정을 막걸리와 함께 나눈다. ‘시골 막걸리(村醪) 사오니 병마개는 풀 뭉치/해 저무는 청산을 앞에 두고 이별 술 따르는데 /그대도 봄 강 경치 좋아함을 알겠으니/미수(渼水) 정자에서 우리 다시 만나세’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대사간(大司諫)·동부승지(同副承旨)·대사성(大司成) 등을 지낸 대 유학자인 농암이다. 텁텁한 시골막걸리가 이내 낀 청산에 더해 이별을 보다 애틋하게 한다.
막걸리는 공동체 결속 다지는 중요한 매개물
#. 막걸리는 공동체의 결속을 다지는 중요한 매개물이기도 했다. 막걸리는 도수가 낮아 잔이 크다. 대폿잔이 그 예다. 대포(大匏)는 큰 바가지란 뜻이다. 막걸리를 대폿잔에 마시는 것은 돌려 마시기를 위한 것이요, 돌려 마시는 것은 의리를 확인하고 다지기 위한 의례(儀禮)다.
경주 신라 고분에서 커다란 바가지 모양의 도포(陶匏)가 출토된 것으로 미뤄 대포의 뿌리가 오래됐음을 알 수 있다. 경주 포석정(鮑石亭)의 곡수(曲水) 위에 잔을 띄워 군신 (君臣)이 한 잔술을 번갈아 마시며 동심일체(同心一體)를 다졌던 바로 그 술잔도 대포였을 테다.
조선시대에는 육조(六曹) 삼관(三館)을 비롯한 각 관아나 향촌에서 한 말들이 큰 대폿잔에 술을 담아 차례로 돌려 마시는 공음례(共飮禮)가 의식화돼 있었다. 같은 공동체의 구성원끼리 한 잔술을 나눠 마심으로써 동심일체와 공생공사를 다지는 인화(人和)문화를 발전시켰다. 사헌부(司憲府)의 대포는 아란배(鵝卵杯), 교서관(校書館)의 대포는 홍도배(紅桃杯), 예문관(藝文館)의 대포는 벽송배(碧松杯)란 대폿잔 이름이 붙어 있었다고 한다.
역사적으로 연대감 속에 철석같은 단결을 과시했던 단체가 보부상(褓負商)인데 이들도 모였다 하면 큰 바가지에 막걸리를 담아 돌려 마시며 결속을 다졌다. 시사(詩社)라 하는 풍류모임에서는 연종배(蓮鍾杯)라 해서 널따란 연잎을 접어 잔을 만들고 막걸리를 담아 잎줄기(蓮莖) 속으로 구멍을 뚫어 코끼리 코처럼 굽혀 들고 돌려 마시는가 하면 심지어 기생의 꽃신에 술을 담아 돌려 마시는 화혜배(花鞋杯)도 있었으니….
이 같이 대폿잔을 돌려 마시며 생사고락을 같이 하기로 약속한 사이를 대포지교(大匏之交)라 불렀다. 그런데 여기에서 대포의 술이 막걸리여야 했던 까닭은 막걸리가 남녀노소, 누구나 마실 수 있는 술이라는 보편성과 청주(淸酒)를 뽑아내지 않고 막 거른 술이기에 ‘순수’하다 하여 신인결합(神人結合)하는 신주(神酒)로서 쓰여 왔기 때문이다.
#. 막걸리는 쓰임새에 따라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바로 농주(農酒), 학주(學酒), 신주(神酒)가 그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첫 손으로 꼽히는 건 뭐니 뭐니 해도 농주. 오랜 세월 농자(農者)가 ‘천하지대본(天下之大本)’이던 까닭에 관계자 수가 많았던 데다 특성상 농사일이란 게 ‘막걸리를 부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농심은 뱃심, 뱃심 하면 막걸리다. 여기서 뱃심은 ‘염치나 두려움이 없이 제 고집대로 버티는 힘’ 혹은 ‘마음속에 다지는 속셈’과 같이 확장된 사전적 의미가 아니라 글자 그대로 ‘배(腹)의 힘’이다.
요즘이야 농사일이라도 웬만한 건 죄다 기계가 대신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일일이 사람의 손을 타는 일이고, 하늘로 뻗은 과일나무 가지와 씨름하는 과수원 일 말고는 거의 논밭의 바닥을 향해 구부리고 꾸물거려야 하기 때문에 배의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논농사의 경우 못자리를 만들고 볍씨를 쳐서 모를 키우는 것을 시작으로 쌀을 만들기까지 여든여덟 번(八十八=米) 손이 가야한다고 하지만 기실은 골백번도 부족하다. 뱃심이 필요한 것은 논일의 본격적 시작이랄 수 있는 모내기부터. 못자리에서 쭈그리고 모를 쪄내 모춤을 만드는 건 양념이라 치고, 일단 모를 낼 논에 들어섰다 하면 그때부터 허리 고문이다.
일꾼 가운데 가장 연로한 두 사람이 ‘영좌(領座)’가 돼 논둑 양쪽에서 못줄을 띄면 눈금에 맞춰 모를 심는 게 예전 모내기 방식이다. 왼손에 모를 한 움큼 가득 움켜쥐고, 오른손으로 서너 포기씩 떼어, 못줄에 빨간 실로 표시된 눈금에 맞춰 콕~콕~. 이렇게 모내기 풍경을 얘기하면 사정을 모르는 ‘도시촌놈들(?)’은 멋있고, 재미있고, 낭만적이라고 하더라만 낭만은 개뿔! 못줄을 한차례 옮길 때마다 대개 60~70번, 많게는 100번이나 모를 꽂은 다음에야 허리를 한 번 펴는 중노동인줄은 전혀 알지 못하니 그럴 테다.
배가 꺼져 힘 못쓸 때 막걸리 한사발이 보약
평생 농사일로 인이 박혀 노련할 대로 노련한 못줄잽이가 그날 감당할 작업량을 감안해 모내기 진도를 조절하는데 얼추 한 시간쯤 되면 “한 대 뻥!”하는 우렁찬 명령(?)으로 휴식을 허락한다. “한 대 뻥!”이란 논산훈련소 식으로 치면 “담배 일발 장전!”이다. 한 시간이면 50여 차례 줄을 옮겨 띄니 줄잡아 400번은 용수철마냥 허리를 튕겨가며 손질을 해댔을 판에 쉰다는 게 고작 연초(煙草) 한 대 태울 시간이다. 10여분? 야속하다 싶지만 이내 논으로 들어가 다시 한 시간가량 고난의 전진을 이어간다.
그리고 또 논 밖으로 외출(?)이 허락된다. 이번엔 술참이다. 누구라 할 것 없이 입이 귀에 걸린다. 쉴 새 없이 허리를 써대는 통에 배가 다 꺼졌고 그 바람에 허리가 끊어지는 듯 했던 참에 뿌연 막걸리가 기다리고 있으니 안 그러고 배기겠나. 배가 꺼지면 힘을 못 쓴다.
구부린 채 모를 심으려면 허리 탄력으로 일을 해야 하는데 용수철이 망가진 셈이니 그럴 수밖에. 막걸리를 양푼으로 한가득 따라 목에서 봇물 터지는 소리가 나도록 단숨에 마셔버리면 하 힘들어 노랗게 변해가던 하늘이 순간 파래지면서 허리의 통증도 언제 그랬냐싶게 쓰악 가셔버린다.
연거푸 세 잔 정도 마시면 어느새 배가 불룩해져 또 치러야할 일전이 만만해 진다. 불뚝이 배를 두드리니 물동이에 바가지를 엎어놓고 두드리는 물 장단 소리가 따로 없다. 거기에 맞춰 유행가를 흥얼대도 바로 ‘태평가’다. 술참에 이어 식사를 하는 정식 참, 점심, 다시 술참, 참, 술참, 참 등 일고여덟 번 막걸리가 나오는 까닭이다.
막걸리는 지나가는 사람도 불러 모은다. 신사 건 거지 건 마찬가지다. 넉살 좋은 이는 부르지 않아도 일꾼들이 모여 있는 곳을 찾아 엉덩이를 들이밀고 한 자리 차지한다. 그렇다고 누구라도 눈총 주는 사람은 없다. 외레 일꾼식구마냥 막걸리를 권한다.
한잔은 그냥 마시고 두 잔째는 사양하는 척하다 마지 못하는 듯 마신다. 들판의 예의다. 거기다 한 잔을 더 하면 소매를 걷어붙이고 작업 중인 논이나 밭으로 들어가 일손을 더한다. 얼마쯤 지나면 또 다시 끼니때가 되고 내친 김에 눌러 앉아 술에다 밥까지 얻어 배를 채운다. 이른바 사발농사다.
예전엔 농번기만 되면 거지도 이 벌판 저 벌판만 돌아다니며 끼니를 때울 수가 있었다. 오히려 없던 시절에 풍요가 있었다. 모내기를 마친 뒤에도 아시매기, 두벌매기, 삼동으로 이어지는 논 김매기와 벼 베기, 타작 등 어느 것 하나 뱃심 없이 할 수 있는 게 없다. 이따금 소주를 찾는 이도 있지만 그건 단순히 술기운으로 고통을 잊기 위한 것이지 막걸리처럼 뿌듯한 포만감과 함께 두둑한 뱃심을 주지는 못 한다. 농사일엔 그저 막걸리다.
#. 조선시대에는 금주령이 잦았다. 흉년이 들어 쌀이 절대적으로 모자랐기 때문이다. 1392년 개국 직후에 내린 것을 비롯해 태종 때는 거의 매년, 성종과 연산군 때도 자주 금주령이 내려졌고, 이를 어겼다가 적발되면 귀양을 보냈다. 그러나 예외는 있었다.
큰 가뭄으로 종묘 제례조차 술 대신 차를 쓰도록 했던 영조가 훈련이 끝난 뒤 군인들에게 내리는 막걸리와 농부들이 마시는 막걸리만은 금주령에서 빼도록 했다. 정조도 영조의 뜻을 이어받아 금주령을 강력히 시행했다. 종묘 등 제사에도 단술을 쓰게 하는 것은 물론 양반들의 제사에는 청수(淸水)를 쓰게 하면서까지 막걸리만은 금주령에서 제외시켰다. 농사일에는 막걸리가 빠져서는 안 된다고 대신들이 건의했기 때문이다. 이제나 저제나 ‘막걸리=농주’에 대한 역사 인증이다.
가난한 청춘 달래주는 위로주
#. 막걸리는 가난한 청춘들을 달래주는 위로주이기도 했다. 신체적으로나 감성적으로 한창인데 국가나 사회가 돌아가는 꼴이란 그저 모순덩어리일 뿐이고, 기성세대는 죄다 협잡꾼들로만 보이는 터.
그 부당함에 몰려나가 한바탕 데모도 해보지만 계란으로 바위치기처럼 불의는 끄떡없이 버틴 채 비웃기만 하고 그럴수록 가슴에 울분은 불덩이가 돼 집채만큼 커져만 가고…아, 이 몹쓸 세상아 어쩌란 말이냐! 질풍과 노도가 잠시나마 멈출 수 있는 곳은 이제나저제나 술집뿐, 청춘들은 삼삼오오 몰려가 통곡스런 현실의 벽에 머리를 부딪쳐대며 자유니 정의니 민주니 하는 속절없는 이름을 악다구니 쓰고야 만다.
그들 손에 들린 건 커다란 대폿잔, 그 안에는 눈물 젖은 영혼을 정화시킬 희뿌연 막걸리다. 이이제이(以夷制夷), 탁한 영혼에 탁한 막걸리를 타면 어느 새랄 것도 없이 영혼은 주향(酒香)이 되어 하늘을 날고, 서푼도 못되는 감상(感傷)은 술지게미와 엉킨 채 쓰린 속을 훑으며 해장을 부른다.
자칭 ‘민족대학’이란 막걸리 대학교가 있었다. 필자를 포함해 거기에 속한 족속들은 둘만 모여도 목이 터져라 ‘막걸리 찬가’를 외쳐대며 막걸리를 퍼마셔댔다.
“마셔도 사나이답게 막걸리를 마셔라/ 맥주는 싱거우니 oo골로 돌려라/ 부어라 마셔라 막걸리/ 너도 먹고 나도 먹고 다같이 마시자/(중략)/막걸리를 마셔도 사나이답게 마셔라/ 만주 땅은 우리 것 태평양도 양보 못 한다~.”
학교 앞 웬만한 식당의 식탁은 아예 두터운 쇠로 테두리를 둘러쳤건만 그놈의 미친 듯이 두드리는 악다구니 숟가락 장단에 움푹움푹 생채기 투성이였고, 주인아줌마 ‘장끼’엔 외상 줄이 늘어만 갔다. 그래서 상아탑 대신 우골탑(牛骨塔)이라고 했느니, 차라리 막걸리 탑이 가(可)했다(그래도 첫 월급을 타면 엄마의 내복 장만보다 앞서 막걸리 외상값을 갚으려 학교 앞으로 달려가던 순수가 많이 있었다).
사실 그 시절엔 예의 ‘막걸리 대학’ 학생뿐만 아니라 대부분 대학생들의 ‘주식(酒食)’이 막걸리였다. 아주 잘 나가는 친구는 고액과외를 몇 군데씩 뛰며 ‘흥청’대기도 했지만 대부분 형편이 넉넉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소주는 어쩌다 한 번, 맥주는 운 좋으면 일 년에 한두 번이 고작이었다.
막걸리 판에 안주도 열에 일고여덟은 튀김 몇 조각이고 동태찌개면 그야말로 ‘왔다’였다. 그 때는 시대가 만들어낸 풍경이 칙칙했던 탓에 막걸리가 알콜 반(半) 울분(半)의 혼돈주(混沌酒)였지만 요즘엔 대학가에 새콤달콤 갖가지 칵테일 막걸리로 알콩달콩한 분위기라니 못내 부러울 따름이다.
#. 술집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그 시절만 해도 ‘니나노집’이란 게 있었다. 한정식 마냥 푸짐한 각종 안주들로 술상을 차려놓고 술 따르는 ‘색시’가 손님 옆에 앉아 술시중을 들면서 노래까지 불러 흥을 돋우는 전문술집이었다.
하지만 격이 천차만별이라 대학생을 상대로 하는 집은 술상도 일반식탁 위에 안주 서너 가지 차림이 고작이었고, 주인이 마담 겸 ‘아가씨’ 노릇을 다 하거나 ‘새끼 마담’을 앉히는 게 전부였다. 그나마 조금 고급스런 곳은 홍등가답게 저녁이면 집집마다 대문 앞 처마에 초파일 연등 같은 붉은 등(紅燈)을 달아놓고 한복차림을 한 ‘아가씨’들이 손님을 맞았고, 자개상이나 식탁에 흰 종이를 깐 위에 안주도 요정요리를 시늉한 술상이 나왔다.
이들 술집에선 모두 술로 막걸리가 나왔는데 그것도 한 결 같이 노란 주전자에 담겨 노란 양은 잔으로 마시는 게 법이었다. 아가씨들은 손님들의 짓궂은 농담과 장난에도 신나는 젓가락 장단을 구사하며 금세 분위기를 띄우곤 했다. 그네들은 민요부터 유행가, 심지어 야하게 개사한 ‘뒷골목 팝숑’까지 메들리로 엮어내는 장기(長技)의 보유자(?)들로 자칭 인간문화재들이었다.
하지만 그네들도 ‘간죠’를 올려야 주인의 예쁨을 받는 처지여서 그런지 일부러 막걸리 주전자와 잔들은 모두 찌그러트려 양을 줄여 내오곤 했다. 그래도 손님들은 외레 이조차 애교로 받아들인 채 막걸리에 취하고 아가씨에 취했다.
197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고급 축에 속한 경양식집에선 낮엔 함박스테이크, 돈까스, 비후까스, 카레, 오무라이스 등을 팔고 저녁엔 술집으로 바뀌어 맥주에다 심지어 양주까지 팔았다. 때문에 여기엔 접대 받는 공무원이나 돈푼 꽤나 있는 사람들이 드나들었고, 그 시절에도 ‘금수저’ 대학생들이 어쩌다 파티를 주재하며 꺼떡거리는 곳이었다. 친구 한 놈이 ‘시골 장학금’으로 쏜다기에 함께 묻혀서 경양식집에 갔다가 거기에서도 막걸리를 찾는 바람에 주인한테 “이런 촌놈!”하는 눈총을 받았던 기억이 새롭다. 막걸리는 곧 神의 숨결
#. 누구라도 신의 숨결을 거스르면 동티난다. 신의 징치다. 신의 품에 들기 위해선 선물을 바쳐야 한다. 치성을 드리는 것이다. 치성은 진정이지 허풍이나 과공은 용납되지 않는다. 술은 신의 세상과 통하는 문이요, 인간의 언어를 신에게 전달하는 마법이다. 인간이 술을 발견한 뒤 맨 처음 제사에 올린 까닭이다.
지금도 접신을 위한 치성에는 술이 빠져선 안 된다. 벌꿀이나 포도 등 과일에 의한 자연발효 대신 곡주로 출발한 우리네 술의 역사에서 막걸리가 가장 기초단계인 만큼 신에게 바치는 선물도 술 가운데에선 막걸리가 최초였다.
막걸리는 신통(神通)의 원형(原型)이다. 막걸리는 곧 신의 숨결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이미 수로왕(首露王)에게 올리는 제사에 막걸리(醪)를 썼고, 고려 때의 기록에도 임금이 지내는 제사에 올리는 술만 해도 청주, 약주, 현주, 감주와 함께 막걸리가 포함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특히 우리 민족은 삼국 신라 때부터 국가차원에서 농사가 잘 되길 기원하는 제사를 지냈다. 설렁탕의 유래가 있는 선농제(先農祭)가 그것이다. 원래는 농사의 삼신(三神), 즉 선농(先農), 중농(中農), 후농(後農)에게 올리던 제향인데 조선 태종 때 삼신을 대표해 선농만을 모시는 것으로 바꿨다.
선농제는 왕이 제단에 제사를 올리고 친히 적전(藉田)에서 밭을 갈고 농사를 짓는 시범을 보이는 국가행사였다. 제사를 마치면 제주로 쓰인 막걸리를 제단 둘레에 심은 향나무에 뿌려주었고, 소를 잡아 큰 가마 솥에 국을 끓이고 기장과 쌀로 밥을 지어 농부들과 구경 나온 노인들에게 대접했는데 여기서 ‘선농탕→설렁탕’ 설(設)이 나왔다.
지금도 서울 제기동에 있는 선농단 주변엔 역대 왕들이 하사한(?) ‘선농제 막걸리’를 마신 덕인지 500살도 넘은 향나무들이 건재하고다. 선농제뿐만 아니라 지방 곳곳에 오래 전부터 동신제(洞神祭)·샘굿·영등굿 등 가지 가지 제의가 전해오는데 비록 간략한 제의라 하더라도 과일과 포(脯), 막걸리는 빠지지 않았다. 요즘도 사무실을 새로 열거나 하다못해 새 차를 샀을 때 막걸리로 고사를 지내며 행운과 무사고를 비는 풍습이 있는데 막걸리의 독특한 제의적 성격을 잘 보여준다. 막걸리는 신주(神酒)다.
#. 막걸리하면 수많은 사극이나 역사물 영화 등에서 보았듯이 으레 ‘주막(酒幕)’을 떠올리기 십상이다. 글자 그대로 막을 쳐놓고 술을 팔 정도의 간단한 차림으로, 원래 길손을 위해 밥과 함께 술을 팔던 곳이 시골 길가의 주막이다. 하지만 술손님을 끌기 위해 시장이나 큰길 등 사람의 왕래가 빈번한 곳에 주막이 차려져 번성했다.
<고려사>에 따르면 주막은 고려 성종 때부터 있었던 것으로 나오나 주식(酒食)을 팔던 장소라는 것뿐 당시 술을 팔던 풍속은 자세히 전하고 있지 않아 알 수 없다. 구한말의 사진이나 풍속화, 외국인 기행기록 등을 보면 막걸리를 담은 술항아리와 항시 물이 끓고 있는 부뚜막의 큰 무쇠 가마솥, 그 곁에 앉아서 술을 떠주는 주모(酒母) 등이 대부분 주막의 모습인데 고려 때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성싶다. 특히 서민들에겐 겨울철 거냉한 막걸리는 요기와 더불어 어한용으로 애용돼 오늘날 목로주점이나 포장마차로 이어지고 있다.
#. 조선 중엽 한 판서가 집에 좋은 소주와 가양주가 많은데 굳이 막걸리만 찾아 마시는지라 자제들이 그 이유를 물었다. 이에 판서는 소 쓸개 세 개를 마련시키더니 담즙을 쏟아버리고 그 쓸개주머니에 소주와 약주, 그리고 막걸리를 따로 따로 담아 매달아 두게 했다. 며칠 뒤 열어 보니 소주 쓸개는 구멍이 송송 나고, 약주 쓸개도 많이 상했는데 막걸리 쓸개만이 오히려 두터워져 있었다고 한다. 이는 그만큼 막걸리가 몸에 좋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얘기지만 한편으론 막걸리야말로 한국인의 체질에 ‘딱’이라는 것을 시사(示唆)하기도 한다.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막걸리 오덕(五德)’이란 예찬까지 생겨났다. 일덕(一德)은 허기를 면해주는 것이요, 이덕(二德)은 취기가 심하지 않은 것이고, 추위를 덜어주는 것이 삼덕(三德)이며, 일하기 좋게 기운을 돋워주는 것이 사덕(四德)이고, 오덕(五德)은 평소에 못하던 말을 하게 하여 의사를 소통시키는 것이다. 막걸리는 단순한 술이 아니다. 적당히만 마시면 보약(?)이다. 마셔도 한국인답게 막걸리를 마시자.
인사이트코리아, INSIGHTKOREA
2021.07.01 15:25
이만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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