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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밥상

Paul Ahn 2004. 11. 12. 17:06

양반밥상의 오해와 진실

http://www.yeongnam.com/mnews/newsview.do?mode=newsView&newskey=20140919.010410818090001

  

이런 떡벌어진 한상…조선시대 양반들도 언감생심이었다 지금 보이는 저 밥상은 전라도 담양의 한 한정식 전문점의 교자상 스타일의 한상 차림이다. 하지만 예전 양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검약하고 조촐한 상을 선호했다. 

 

맛있는 것을 구하지 않는 게 사대부의 도리였기 때문에 식도락 유전자는 거의 없었다. 양반은 평소 9첩 반상, 임금도 12첩 반상에 머물렀다. 요즘 푸짐하게 나오는 1만원선의 백반정식 한상 차림 정도라 생각하면 된다.

 

 

 

 ‘조선’이란 나라. ‘접빈객 봉제사(接賓客 奉祭祀)’에 목숨을 걸었다. 개인의 자유도 유보됐다. 

오직 종묘사직(宗廟社稷)과 가문(家門)의 자유만이 존숭됐다. 명문거유의 종택에는 사당이 있었고, 근처엔 세거지의 명운과 동고동락하는 선산(先山)이 좌청룡 우백호처럼 한 집안을 수호한다. 조선은 통과의례에 올인했다. 임금도 그렇거니와 일반 사대부도 행동거지를 제약하는 엄격하고 구체적인 의례집이 매뉴얼북처럼 등장했다.   

 

 반가(班家)는 예에서 시작해 예로 끝난 삶을 살았다.   

행신범절에 대한 치밀한 매뉴얼북까지 개발된다. 그 주저서가 ‘주자가례(朱子家禮)’다. 그것이 조선에 들어와 현실에 맞게 고쳐졌는데 대표적인 게 1599년(선조 32) 사계 김장생이 펴낸 ‘가례집람(家禮輯覽)’이다. 

 

권10에 제례음식 진설법이 잘 정리돼 있다. 홍동백서(紅東白西), 좌포우혜(左脯右醯), 어동육서(魚東肉西) 등.   

수라상 진설법도 엄격한 기준에 의해 차려진다.   

 

나주에서 올라온 나주반에 차린 12첩 반상, 놓는 위치도 정해져 있다. 반드시 왕과 왕비가 같은 온돌방에서 받고, 동편에는 왕, 서편에 왕비가 좌정한다. 겸상은 없고 시중드는 수라상궁도 각각 3명씩 대령하고, 수라상도 원반, 곁반, 책상반 등 3개가 들어왔다.

 

 1719년부터 1910년까지 임금이 먹을 수 있는 국의 종류만 64가지.   

물론 진찬의궤에 상세하게 그 매뉴얼이 적혀 있는 궁중음식이 어떻게 반가음식에 스며들어갔을까. 

 

그 흐름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봉송(封送)’ 문화이다. 이건 임금이 음식을 다들고 ‘퇴선(退膳)’ 하고 나면 여러 신하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는 것이다. 서울의 반가음식이 궁중음식과 닮은 것도 이 같은 이유다. 

 

하지만 궁중음식은 일반 음식과 차별을 뒀다. 양반이라도 차릴 수 있는 상을 9첩 이하로 제한하고 12첩 반상은 궁중에서만 가능했다.   

 

◆ 반가의 밥상은 결코 풍성하지도 호화롭지도 않았다   

경주손씨 내림음식인 대구포찜은 말린 대구를 잘게 뜯어낸 대구보푸라기 요리와 함께 경북 지역 종가의 대구포 활용 음식으로 잘 알려져 있다. 대구포찜은 밤과 대추, 갖은 고명을 올려 시각적 화려함이 한껏 강조된 술안주로 유명하다. 

 

반가음식과 관련 착각하는 대목이 있다.   바로 양반 상을 번지르르한 춘향전에 등장하는 ‘변사또 밥상’과 비슷할 거라고 믿는 것이다. 그건 절대 아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마인드가 출중한 꼬장청렴한 선비들, 그들은 자신의 입으로 음식의 맛을 논하는 것 자체를 수치스럽게 생각했다. 음식을 탐하는 이와는 허교도 하지 않았다.   

 

상당수 양반들은 3첩 반상, 국과 밥, 김치와 된장, 나물 한 점 정도만 있어도 맛있게 먹었다. 잔칫날이나 명절 등에만 쌀밥과 고기를 먹을 수 있었다. 하지만 제사만은 풍성하게 치장했다. 자기는 굶어도 조상 제사 음식은 정성을 다해 챙겼던 것이다.   

 

 양반은 ‘양상수척(讓床瘦瘠)’을 미덕으로 생각한다.   

양반가 식문화의 가장 독특한 게 바로 밥상물림이고 그걸 존수하다보면 몸이 많이 축나게 된다. 이걸 양상수척이라 해서 덕의 상징으로 여겼다. 

 

안동 등 경북 북부지방 양반가에선 어른이 밥을 남기는 걸 ‘체면한다’고 했다. 그걸 모르면 ‘본배(本向) 없는 자’로 낙인이 찍힌다. 자연 종부는 주발에 넉넉하게 남을 정도의 고봉밥을 퍼 담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문중도 있다. 도산면 퇴계 종가에서는 먹을 만큼만 밥을 담는다.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워낙 접빈객이 많아서 가계도 축나고 해서 밥을 적게 담은 것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선비문화 영향 대부분 끼니 때 국·밥·김치·된장 쌀밥, 고기는 잔치·제사때만 먹어 음식보다 식사예법 목숨처럼 여겨 밥 먹을 때 절대 소리내선 안되고 떠먹는 방향도 왼쪽서 오른쪽으로 독상 받으면 우선 ‘삼고례’ 올려 종지의 지렁부터 떠먹은 뒤 本食     밥상 법도도 아주 엄했다.   

 

 ‘상전무언(床前無言)’. 

양반은 밥을 먹을 때 절대 소리를 내면 안됐다. 또한 식사할 때 처음부터 밥을 떠먹어도 흉이 됐다. 

 

독상을 받으면 우선 ‘삼고례(三告禮)’를 올린다. 보통 헛기침을 세 번 한다. 하늘과 땅, 그리고 조상의 기운을 합일시키는 절차다. 때론 젓가락을 모아 식탁에 세 번 내려치기도 한다. 이 소리를 들으면 부엌에선 숭늉 준비를 한다. 

 

맨 먼저 무슨 음식부터 먹어야 될까. 반드시 종지에 담긴 지렁(조선간장)부터 조금 떠먹은 뒤 본식을 개시했다. 좋은 지렁은 좋은 소금에서 온다. 좋은 천일염은 진상되는데 3년 이상 간수를 그늘에서 빼내야 한다. 그게 들어가면 음식에 쓴맛이 돈다.   

 

지렁을 먹고 난 다음에는 동치미 국물을 떠마신다. 동치미는 좋은 물과 좋은 소금, 좋은 동치미 무만으로 요리되는 조선 음식 중에서 가장 심플하면서도 웅숭깊은 맛을 드러낸다. 평양에선 이 동치미 국물에 냉면을 말아 먹는다. 강원도 양양 동해안 등지에서도 요즘 동치미국수를 즐긴다.   

 

국에 밥을 말아먹지도 않는다. 이런 연유로 국 따로 밥 따로, ‘대구 따로국밥’이 탄생할 수 있었다.   

 

◆ 삽시각을 아시나요   

별 것 갖고 다 고민하는 게 양반이었다. 밥을 떠먹을 때도 법도가 있었다. 떠먹는 방향이 정해져 있었다.

23.5도 기운 지구 자전축을 따라 밥을 퍼먹었다. 7시 방향에서 1시 방향으로 이동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45도의 삽시각을 유지하면서 퍼내려가되 반드시 오른쪽 모서리에 밥을 조금 남겨야 했다.   

이게 초승달처럼 생겨 일명 ‘초승밥’이라고 했다. 

 

 조선에선 초승밥처럼 정이 담긴 밥이 두 개 더 있다. ‘까치밥’과 ‘사자밥’이다. 

까치밥은 짐승을 위해 가을걷이를 할 때 모두 다 걷지 않고 조금 남겨두는 농작물이다. 

사자밥은 저승사자를 위해 세 그릇의 밥을 미투리와 함께 대문 앞에 내놓았다.   

 

 ‘규합총서’에 사대부가 지켜야 할 다섯 가지 식사예법이 적시돼 있다.   

일단 어른이 먼저 수저를 들면 그때서야 수하도 음식을 먹을 수 있다. 

어른이 아직 식사를 마치지 못하면 아랫사람은 수저를 놓고 기다려야 했다.   

양반들은 절대 점심 때 남의 집을 방문하지 않았다. 너나없이 가난하던 때였기 때문이다. 

일찍 와도 때가 되면 먼저 자리를 뜨는 게 예의였다. 붙잡는다고 해서 바로 식사에 응해서도 안 된다.   

반가음식의 본령은 평상시 먹는 일상식이 아니라 제사음식이었다.  특히 안동 등 경상도 북부권 유림에선 더욱 그랬다. 

 

 제사 중에서도 차사(茶祀)보다 기제사(忌祭祀)가 중시됐고, 기제사보다 불천위 제사를 더 중시했다. 

불천위란 나라나 지역 향교에서 망자의 덕망을 기리기 위해 사당에서 영구히 제사를 봉행하는 것으로 나라에서 정한 걸 ‘국불천위(國不遷位)’라고 한다.   

 

 퇴계 이황의 불천제위 음식을 엿보자. 

특히 적(炙)은 ‘군자혈식(君子血食)’이라 해서 모두 날 것으로 올린다. 적으로는 닭고기, 쇠고기, 쇠머리, 소 껍질 수육, 문어, 청어, 홍어, 상어, 방어 등이 들어가지만 안동의 명물 안동 간고등어는 올리지 않았다. 

 

탕도 기제사에는 통상 세 가지만 올려도 되지만 여기선 다섯 가지, 즉 쇠고기, 명태, 전복, 조개, 상어 등이다. 

 

탕과 적에는 ‘우모린(羽毛鱗)’이란 룰이 적용된다.   

깃이 달린 닭, 털이 있는 고기, 비늘이 있는 생선을 포함시켜야 된다. 적을 괼 때 생선 류는 밑에, 고기류는 그다음, 맨 위에는 닭을 괸다. 

 

채는 고사리, 시금치, 토란, 도라지, 무, 박나물 등 제철채소이면 되고 전부 한 그릇에 담아야 한다. 

김치는 백김치, 건포는 대구포, 예전에는 청주를 냈는데 이젠 정종으로 대신한다.     

 

퇴계는 유언으로 만들기 번거로운 유과와 약과 같은 사치스러운 음식은 올리지 말라고 했다. 

 

◆ 안동의 건진국수와 누름국수   

안동엔 두 종류의 국수가 존재한다. 하나는 ‘누름국수(제물국수)’, 또 하나는 ‘건진국수’다.   

 

귀한 손님이 오면 건진국수를 낸다. 건진국수 육수의 재료는 꿩과 은어이다. 문제는 지금처럼 제분기술이 좋지 않아 밀가루 반죽을 제대로 내기가 어려웠다. 명문가에선 국수용 밀가루를 받아내는 조그마한 별실이 있었다. 

 

최상의 국수를 위해 멧돌이나 디딜방아에서 성기게 갈아낸 밀가루를 부채로 부쳐 벽에 붙게 한다. 많이 모이면 아래로 떨어지는데 이 고운 밀가루를 달걀 흰자로 반죽해 소면 굵기만큼 가늘게 썰어내는 걸 종부의 큰자랑으로 여겼다.   

 

 안동칼국수의 원형은 뭘까. 

음식디미방의 저자 정부인 안동장씨의 아버지 경당 장흥효 종가에서 엿볼 수 있다.   

 

다른 지방에선 콩가루가 별로 들어가지 않는데 안동에서 콩가루가 많이 들어간다. 귀한 손이 올수록 정성을 다하기 위해 면은 가능한 소면처럼 가늘게 썰어냈다. 경당 종가에서는 밀가루와 콩가루는 3대 1 비율로 섞는다. 안동 쪽에서는 문경새재의 새재 묵조밥처럼 국수 곁에 조밥을 내놓는 게 특색이다. 

 

현재 안동 웅부공원 근처 선미식당 등에 그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 건진국수는 고택스테이를 하는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 776번지, 조선 후기 학자 장세규가 지은 ‘칠계재 고택’에서 맛볼 수 있다. 예약은 필수.   

 

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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