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향전 주안상
임금님 수라상을 능가했던 춘향전 주안상
제 77회 남원 춘향제 개막 이틀 전인 지난 5월 2일 광한루 근처의 어느 유서 깊은 공간에서 나는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조선시대의 남원으로 들어 간 듯한 착각과 내가 마치 소설 ‘춘향전’의 이도령 몽룡이 된 듯한 환각 속에서, 춘향 모친 월매의 주안상을 앞에 놓고 온갖 진수성찬을 흐드러지게 즐긴 적이 있다.
◇전통음식 자료의 보고 ‘춘향전’
‘춘향전’은 전통적 신분제 사회에서 귀천을 초월한 춘향과 이도령의 애끓는 사랑이야기다. 권력의 남용과 횡포에 대한 저항정신이 자유 평등의 인권사상과 조화를 이루면서 극적 흥미를 유발, 작품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확보했다는 좀 느끼한 해석이 가능한 수작이기도 하다.
그 뿐 아니다. 자료적, 문헌적 가치도 상당하다. 조선시대의 우리나라 음식과 의상, 그리고 생활문화 등 당대 풍속에 관한 자료의 보고라 해도 무방하다는 생각이다. 음식의 경우, 월매가 춘향과 이몽룡의 부부 연을 허락하고 차려낸 주안상은 10여 가지가 넘는 술과 갖가지 산해진미로 가득 찼는데 술병을 비롯한 그릇도 당대 명품들을 쓰고 있다는 게 그 예다.
이번 춘향전 주안상의 복원 & 재현행사는 남원시와 전주대 누리사업단의 공동주최와 연구책임자 차경희 교수(전주대 문화관광대학 전통음식문화전공 주임)의 총감독으로 열렸는데 한 마디로 ‘환상적’이었다는 게 남원시장과 나를 포함한 참석자들의 한결 같은 소감이었다.
그런데 이번 주안상의 기본 텍스트는 120여종이 넘는 갖가지 춘향전의 버전 가운데서 ‘3대 버전’으로 꼽히는 ‘열녀춘향수절가’(84장본)와 ‘남원고사 南原古詞)’를 비교 검토한 결과, 비교적 다양하고 충실한 ‘남원고사’를 썼다고 한다.(3대버전중 나머지는 이고본)
그런데 ‘남원고사’의 주안상 상차림에는 신선로와 찜, 구이, 볶음, 마른 찬, 떡, 조과, 과실 등 31가지의 음식에 12종의 술이 등장하고, 여기에 통영소반, 안성유기, 왜화기, 당화기 등 당시의 명품 그릇들을 썼다고 하니 그야말로 초호화 주안상이 아닌가.
그것은 이를 테면 ‘씨암탉 한 마리’ 나 ‘상다리가 휠 만큼’ 이라는 보통의 장모님 주안상이 아니었다. 양반집 상이 7첩 반상이었고 임금님 수라상이 12첩 반상이었음을 고려하면 31가지의 메뉴를 쓴 월매의 주안상은 ‘파격’ 그 자체가 아닌가 한다. 또한 메뉴마다 퇴기 월매의 통 큰 마음씀씀이가 읽혀질 뿐 아니라 늦둥이 외동딸과 양반 도령 부부의 행복한 삶을 위한 간절한 염원이 절절히 배어 있는 듯해서 숙연하기조차 했다.
◇극치의 호사로 멋을 낸 춘향전 주안상
그러면 춘향전 주안상의 메뉴구성은 어떠한가? 당일 재현된 메뉴 중심으로 차 교수의 도움을 받아 소개한다. 다만 그날 재현된 메뉴 중 백김치와 봄나물은 춘향전에는 빠져있는 것을 별도로 추가한 것이라는 점을 미리 밝혀 둔다.
그리고 남원시의 요청에 따라 약간의 현대적 트렌드를 가미했는데 당일 상차림 서비스를 한꺼번에 모든 음식을 다 차려놓는 전통적 상차림 (공간 전개형) 으로 하지 않고 코스별로 순차적으로 차려놓는 서양식 상차림 서비스(시간 전개형) 를 채택하여 초미-오미 등으로 구분했다는 것이 그 예다.
먼저 초미(初味),
농어회와 염통산적, 마른안주, 백김치로 구성된 초미는 입맛을 돋우는 데 제격이었다. 입안에 아스라이 감도는 갖가지 술의 풍미와 잔향과도 잘 어울리는 듯 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염통산적의 경우, 염통의 줄기를 잘라내고 칼집을 넣어 너비아니처럼 얇게 저미고 줄기는 가로와 세로로 얇게 잘라 갖은 양념에 주물러 구웠다고 한다.
다음 이미(二味),
이번에는 ‘양볶이’와 ‘수삼연계(軟鷄)찜’이 올라왔다. ‘양볶이’는 솥뚜껑을 불에 올려놓고 오래 달궈서 기름을 둘러 양을 넣고 급히 볶아 그릇에 퍼냈다고 한다. 연계는 백숙으로 푹 고아 건져서 뼈를 다 추리고 살을 뜯어낸 다음 표고버섯, 느타리버섯, 석이버섯, 파를 넣어 양념하고 가루즙을 넣어 갈비찜처럼 찜 했다고 한다.
그 다음 삼미(三味)로는
신선로와 양지머리 편육이 나왔다. 소고기를 삶은 편육은 양지머리를 으뜸으로 친다는데 아무것도 넣지 않고 삶은 뒤에 헝겊으로 싸서 무거운 돌로 반나절이나 하루쯤 눌러 두었다가 접시에 담아냈다고 한다. 초장을 찍어 먹는 맛이 빼어났다.
그 다음 사미(四味)는
전복장과 갈비찜이었다. 갈비를 1치(3~4cm)씩 잘게 자르고 양은 물에 잠깐 넣었다가 검은 털을 뽑아서 부화(폐), 곱창, 통무, 다시마를 같이 넣어 무를 만큼 삶아서 건진다. 양념과 가루를 섞어 주물러 볶는데 약간의 국물과 함께 그릇에 담아냈다.
또 그 다음 오미(五味)로는
제육초와 생치구이(꿩구이)가 상에 올랐다. 제육초는 돼지고기를 두껍게 산적하듯이 잘라 썬 다음 기름, 간장에 재워 밀가루 묻혀 기름치며 푹 익도록 볶아 후춧가루로 양념한다. 생치구이는 꿩의 털을 뽑고 성냥불로 남은 털을 그슬려 없애고 조각으로 잘라 가슴 쪽의 가는 살을 2~3쪽으로 저민다. 다리는 한 편만 베어 잘라 마늘을 다지고, 깨소금, 기름, 후춧가루, 꿀을 합하여 소금으로 간을 맞추어 주물러 재워서 백지에 물을 축이고 싸서 굽는다. 혹 양념에 주무르기 전 맨 살을 종이에 물을 적셔가며 구워 반숙이 되면 종이를 벗기고 유장(기름과 장)을 발라 구워 쓴다.
반상(飯床)에는
잡곡밥, 추어탕, 조기구이, 봄나물, 전복 내장 젓, 더덕장아찌, 배추김치, 총각김치가 올라왔고,
맨 마지막을
백편, 두텁떡, 화전, 금귤정과, 약과, 생과일, 오미자 화채 등 후식으로 매듭지으니 정확하게 2시간이 걸렸다,
착각은 자유고 환각이 선택이라지만 이처럼 멋지고 낭만적인 추억을 수반한다면 강제적 필수과목인들 어쩌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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