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B Service/@Bar & Bistro

⊙우리나라 주점의 역사

Paul Ahn 2006. 1. 13. 14:07

⊙우리나라 주점의 역사

(dailian.co.kr) 

 

세계 그 어디에도 우리나라처럼 읍..동 단위까지 전국에 걸쳐 다양한 형태의 술집이 발달한 나라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분야에 걸쳐 지속적인 성장과 발전을 하고 있는 나라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 민족이 술에 대해 얼마나 큰 사랑을 가지고 있고, 또 그 만큼 술에 대한 통제 능력 또한 뛰어난가를 알게 해주는 방증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술집은 그저 술을 마시기 위한 공간이 아니라, 대중과 가장 가까이 있는 대중문화 공간으로 자리 잡은 지 이미 오래다.

 

우리나라 주점의 역사는 고려 성종 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문헌에 따르면 성종2(983)에 송도에 처음으로 주점의 설치를 허가를 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조선시대 숙종 7(1102)에 이르러서는 민초들이 이용하는 주점들이 곳곳에 생겨나기 시작했다. 당시 개경에 좌우에 주점을 두고 각 주와 현에 주점을 운영했는데 이러한 관설주점은 해동통보, 동국통도 등의 화폐를 유통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주막(酒幕)  

화폐의 유통이 활발해 지고 지역 간의 상거래가 번창하면서 주막(酒幕) 생겨나게 된다. 주막은 19세기 후반까지 전국에 걸쳐 교통 요지 곳곳에 들어섰다. 집 나선 사람들이 간단한 음식과 술, 그리고 잠자리까지 제공을 하기도 했다.

 

영조(1724~1776)때까지 술집이 번창하고 술로 인한 폐해가 늘어남에 따라 강력한 금주령을 내리기도 했다. 정조(1752~1800)가 즉위 하면서 술집은 폭발적으로 늘어나게 된다.

 

정조 실록에 등장하는 홍병성의 상소문은 술로 인해 식량의 낭비가 심하니 금주령을 내려야 한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러나 정조는술로 곡식을 낭비 하는 것이 비록 폐단이 되겠지만 어찌 온 나라가 술을 마시는 데까지 이르렀겠느냐, 홍병성의 상소를 받아드리지 않는다. 서울 시내에 큰 술집이 골목에 차고 작은 술집들이 처마를 잇대어 있다는 상황 묘사가 나와 있어, 당시 얼마나 많은 술집이 번성했는지를 짐작케 하고 있다. 신윤복과 김홍도 등의 그림에서 당시 술집을 매우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혜원 신윤복의 주사거배(1805)

 

조선시대 말기에 이르러서는 상업이 활발해짐에 따라 헌주가, 소주가, 병주가, 주막, 목로주점, 내외술집, 모주가, 색주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의 주점이 등장하였다.

 

@목로주점 

헌주가, 소주가, 병주가 등은 술을 직접 빚어 파는 양조장의 형태라 실질적인 주점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오늘 날 주점의 뿌리라 할 수 있는 것은 주막과 목로주점이 가깝다. 주막은 교통의 요지에 끼니와 숙박이 가능한 형태로 발달되었으므로 오늘 날로 치면 여행객들을 위한 호텔이라고 볼 수 있다. -중국의 경우 현재에도 대형 호텔의 한자 표기를 주점(酒店)으로 하고 있다- 여기서도 당연히 술을 빚어 팔았음을 물론이다.

 

목로주점은 조선시대 말기부터 민중들이 많이 이용하던 술집으로 선술집으로 불리었다. 이들 선술집은 지금의 청진동, 무교동, 종로2가 피맛골, 종로 4, 을지로 2가 등에 많이 모여 있었다. 목로는 술잔을 놓은 긴 나무 판을 의미 하는데 여기에 간단히 먹을 수 있는 안주와 국밥 등에 탁주를 즐겼다. 목로주점은 조선시대 말기에 등장해 한국전쟁까지 전국에 걸쳐 성행을 했다.

 

@대포집 

해방이후부터 대폿집이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대폿집은 60~70년 까지 호황(?)을 누렸다. 연탄 화덕을 만든 드럼통에다 술독에서 퍼낸 주전자 막걸리, 닭발, , 담배연기, 대폿집은 서민들이 울고 웃으며, 애환을 함께하던 곳이었다. 이후 우리경제는 비약적으로 발전하였고 다양한 형태의 주점들이 생겨나기에 이른다.

 

살롱과 스탠드바, 나이트클럽, 등등. 결국 1980년대로 넘어 오면서 이들 대폿집들은 추억의 저편으로 사라져가기에 이르렀다.

 

대폿집의 후신은 단연, 70년대 대학가를 중심으로 생겨났던 학사주점. 대폿집이 젊은 층에서 노년층까지 광범위한 고객을 대상으로 했다면 학사주점은 젊은 대학생을 목표 고객으로 설정한 최초의 본격적 마케팅 주점이라고 할 수 있다.

 

@학사주점

학사주점은 암울했던 70~80년대 젊은이들의 이상과 좌절, 꿈과 낭만이 꿈틀대며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낸 공간이었다. 막걸리와 동동주, 노가리와 파전 또는 두부김치와 깍두기 등 비록 보잘 것 없는 안주를 앞에 놓고 수많은 젊은이들이 시대정신을 토로하고, 운동가요를 목청껏 부르고, 막걸리 한 사발을 들이켰던 그야말로 그들만의 해방구였던 셈이다.

 

70년대의 고도성장에다 80년대에는 이른바 3저 호황으로 온 나라가 들뜨게 된다. 이 시기가 우리 역사에 있어서 주점의 황금시대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온갖 형태의 술집들이 생겨났고 고도의 상업성으로 무장한 매장들이 생겨나면서 아주 빠르게 과거의 술집들을 시장에서 몰아냈다. 맥주와 위스키의 판매가 폭발적으로 늘어났으며, 서구화된 음식문화가 시장을 지배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안타깝게도 시장에선 더 이상 낭만이 통하지 않게 된 것이다.

 

@민속주점 

70~80년대 급격한 도시화가 전국적으로 이루어지고, 우리의 것들은 무참히 파괴되어 갔다. 이에 따라 80년대 후반에 이르면서 전통과 민속에 대한 가치를 살리기 위한 노력들이 전개된다. 민속주점 역시 이 과정에서 상품화 된 것인데, 그러나 제대로 된 역사성을 담보하지 못하고 마구잡이 모자이크 식 전통의 모습만을 보여주고 있다.

 

@호프집 

90년대에 접어들면서 수입자유화와 해외여행자유화로 더욱 빠르게 우리의 문화는 천민 자본주의화 되어갔다. 이 과정에서 외국계 패밀리레스토랑이 대거 진출하고, 일본식 이자까야 풍의 주점이 속속 문을 연다. 소비수준의 급성장은 맥주시장을 폭발적으로 키워냈고 생맥주를 판매하는 이른 바 호프집들이 다양한 형태로 생겨났다. 제조사가 직접 관리하는 직영 호프집에서부터 로컬 브랜드 호프집, 중소프랜차이즈 호프집들이 난립을 하기에 이른다.

 

현재까지 전국에 걸쳐 호프집만 줄잡아 10만개에 달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호프집 한 부분만 보더라도 90년대 초까지만 해도 그냥 호프집이었던 것에서 현재는 요리주점, 이벤트주점, 레스토랑호프, 치킨호프, 마이크로 브루어리, 섹시Sexy 호프 등 셀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게 분화했다. 뿐만 아니라 클래식 바, 모던 바, 플레어 바, 와인 바, 섹시 바를 비롯한 탁주전문점, 창작요리 전문주점 등등의 바와 주점들이 생겨나 지금 이 순간에도 치열한 각축전을 벌이고 있다.

 

보기만 해도 군침도는 푸짐한 주안상

 

이렇게 오랜 기간 동안 변모해 온 우리의 술집문화가 앞으로는 어떻게 발전해 갈지를 살펴보는 것도 심심치 않은 일일 것이다.

 

데일리안

2007.06.05 17:44 수정       

주류문화연구소 소장 윤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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