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칭코(パチンコ)
최초의 파칭코는 1920년대 핀볼 비슷한 쇠구슬 쏘아 맞히기 게임이 시초라고 한다. 쇠구슬을 쏘아서 어떤 구멍에다 집어넣으면 그 가게 주인이 경품(통조림, 과자 등의 상품)을 주는 방식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1950년대에 어떤 구멍에다가 구슬을 집어넣으면 20개의 구슬이 나오는, 문구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메달 따는 기계' 스타일의 기계가 만들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일본 문화 컨텐츠 시장 중 1, 2위를 다투는 어마어마한 규모를 자랑한다.
2011년 기준으로 약 22조엔. 일본 GDP의 3.7% 가량
2015년 기준 10,000개소(일본 전역에 400만대 이상 설치)
파칭코점 경영자의 국적은 한국 50%, 일본 30%, 중국, 대만 10%, 북한계 10%
웬만한 역 근처에는 서서먹는 간이 소바집보다 파칭코가 흔하다. 주택가만 즐비한 곳에 위치한 작은 역이라도 파칭코는 반드시 있다. 심지어 편의점은 없어도 파칭코는 있고, 매우 작은 농어촌에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日파칭코 이야기
유럽에서 들여온 머신이 시초
현재는 거대 사행 산업으로 진화
차별·멸시 불구 갈 곳 없는 자이니치 역사 얽혀
◇파칭코는 어떻게 탄생했을까
먼저 파칭코라는 이름의 탄생 배경에 대해서는 많은 가설이 존재하는데요. 구슬을 튕길 때 쓰는 일본 의성어 '파칭(パチン)'에서 나왔다는 것이 유력합니다. 또 관동지방에서는 파칭코 기계를 '가칭코(ガチンコ)'라고 부르고, 관서 지방에서는 '파치파치'로 불렀다는데, 이것이 합쳐졌다는 말도 있죠.
파칭코의 원조는 유럽이라고 합니다. 1925년 유럽에서 수입된 '월 머신'으로 불리는 기계가 일본에 들어오게 되는데요. 핀볼을 세로로 세워놓은 형태의 기계였습니다. 이를 노점상인들이 가져와 축제 등에 선보이게 되는데요. 원래 쇼와시대에는 1전짜리 동전을 뒤집는 타입의 게임이 인기를 끌고 있었는데, 어떻게 황실의 무늬가 들어간 동전을 도박에 쓰느냐는 이유로 금지령이 내려지면서 토큰이나 동전 형태 메달, 구슬을 사용하는 방식의 게임이 흥행하게 됩니다. 이것이 파칭코 원조 격 기계에 사용되고, 경품도 어른들을 위해 담배 등으로 진화하면서 주목을 받게 되죠.
파칭코 초기 모델로 알려진 유럽의 기계.
(사진출처=일본 파친코자료실 홈페이지)
그러나 2차 세계대전에 접어들면서 절의 종, 가정 냄비 솥까지 공출로 빼앗는 시대가 펼쳐지고, 파칭코 구술도 당연히 무기 만드는 데 사용됐죠. 이때 파칭코의 열기가 잠깐 사그라듭니다.
전쟁이 끝난 뒤 농촌 지역 등에 남아있던 기계를 개조해 영업하는 것으로 다시 파칭코 붐은 시작됩니다. 당시 마사무라 타케이치라는 사람이 이 기계를 획기적인 방법으로 개조하는데요. 파칭코는 구슬이 쇠 막대기 사이를 지나다니면서 시작하는데, 이 막대의 독특한 배열을 고안한 것입니다. 구슬이 가는 방향을 예측 불가능하게 만들어 재미를 배가시킨 것인데요.
이 배열을 '마사무라 게이지'로 부르고, 제1차 파칭코 붐이 시작됩니다. 마사무라 타케이치는 훗날 파칭코의 아버지로 불리게 되죠. 당시에는 1분에 140~160개 구슬을 한 번에 발사하는 연발식까지 개발됐는데, 이 때문에 1940년대 후반에는 전국에 파칭코 업장이 4만5000곳이 넘었다고 하네요.
이 때문에 파칭코 업장 근처에서 경품을 대량 판매하는 시장까지 생겨나는 등 사행성이 심각한 수준에 이르게 되죠. 이에 1954년 국가에서 연발식 파칭코를 금지하게 됐고, 이에 우후죽순 생겨나던 파칭코 업계가 어려움을 맞게 됩니다.
제2차 붐은 1980년에 시작되는데요. 일본이 경제 호황을 맞으면서 사행산업도 활황을 띄게 된 것이죠. 다양한 기기의 발전과 함께 연간 수백 곳씩 사업장이 늘어나게 되죠. 1990년대에도 호조세는 계속돼 동전이 아니라 충전식 선불카드를 도입한다거나, 기계에 컬러 모니터를 탑재하는 등 업계도 진화합니다.
그러나 파칭코에 빠져 빚을 지거나, 위조 선불카드를 사용하거나, 심지어 파칭코를 한다고 아이를 주차장에 세워둔 차 내에 방치해 숨지는 등의 사고까지 반복적으로 일어나면서 다시 행정 규제가 발동하게 되죠.
◇단순 도박 넘어…어느새 거대 산업으로
업계에서는 여러 규제 때문에 파칭코 산업이 대폭 축소됐다고 말하고 있지만, 일본에서 파칭코는 이제 단순 사행 산업을 넘은 거대 시장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이에 일각에서는 "일본에서 경마나 복권 제외하고 내기 도박은 법으로 금지돼있는데, 파칭코는 합법도 불법도 아닌 그레이존에 있다"는 비판이 꾸준히 제기됩니다.
일본의 파칭코 업장.
(사진출처=웨지 코퍼레이션)
2016년 총무성이 조사한 직종별 고용 규모에 따르면 편의점이 77만명, 자동차 업계가 21만1000명인데 비해 파칭코 업계 종사자는 22만9000명에 달하죠. 어디까지나 파칭코 종업원의 숫자이고 판매업자, 장비 제작자 등 관련 기업까지 더하면 숫자는 더욱 많을 것이라고 추산하고 있습니다.
정식 수치는 아니지만, 업계 시장 규모는 18조원에 달한다고 보는 곳도 있는데, 일본 경마 시장 규모가 3조3280억엔, 최대 통신사 NTT도코모의 매출액에 연 4조엔인 것과 비교하면 정말 거대하죠. 파칭코가 없어지면 일본의 수많은 일자리도 없어질 것이라는 우려도 있습니다.
◇파칭코에 종사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
일제강점기 이후 고국에 돌아오지 않고 일본에 남아있는 재일한국·조선인을 일본에선 '재일' 자만 따서 '자이니치(在日)'라고 부르는데요. 이들은 실제로 파칭코에 많이 종사했습니다. 앞서 구슬을 한꺼번에 100개 이상 발사는 연발식 파칭코가 사행성을 이유로 금지됐다고 말씀드렸죠.
이때가 1954년인데, 이로 인해 파칭코 붐이 순식간에 사그라들어 전국 4만5000개에 달했던 파칭코 점포는 9000개까지 줄어들었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줄도산에 들어간 것이죠. 일본인 업자들이야 전업하거나 폐업이 가능했지만, 일본에서도 차별받던 자이니치는 이를 악물고 울며 겨자 먹기로 이를 이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이 업에 종사한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좋은 인식을 줄 수가 없었지만, 이를 견딜 수밖에 없었죠. 그 결과 업계에 있어 자이니치 비중이 높아지게 됩니다.
실제로 일본 파칭코 업계의 재벌로 불릴 정도로 독보적인 기업은 재일교포 1세 한창우 회장이 이끄는 마루한 그룹이죠. 한때 일본 22위 자산가로 불릴 정도로 사업을 크게 키웠는데요. 16세 나이에 혈혈단신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대학까지 나왔지만, 재일조선인 차별이 심해 취직에 실패하죠. 이에 친척이 있는 교토로 이주해 당시 재일조선인들이 많이 하고 있던 파칭코 산업에 발을 들이게 됩니다.
이후 마루한이 잘 나가는 것을 시기한 일본 사회에서는 일장기의 둥근 해를 뜻하는 일본어 '마루'(丸)와 한국의 '한(恨)'의 정서를 섞어 '일장기를 잊지 말라는 뜻에서 지은 이름이다' 등의 루머가 돌기도 했었습니다. 사실 파친코의 둥근 구슬과 한 회장의 성을 따서 지었다는 것이 정설인데, 당시 재일 조선인에 대한 일본 사회의 견제가 얼마나 심했는지를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재일한인역사자료관에는 예전 파칭코 기계를 전시하고 있는데, 설명에 “파칭코는 오늘날 자이니치의 기간 산업이 됐지만 여기에는 많은 고난을 넘어 이를 운영해 온 이들의 노력이 담겨 있다”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파칭코와 여기에 얽힌 우리의 역사를 함께 알아보았는데요. 일본 어느 길거리나 시끄러운 소리로 사람들을 맞이하는 파칭코 가게에 이런 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었습니다.
아시아경제
2024.06.16 07:31
전진영 기자 jintonic@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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