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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정장의 조상 '쥐스토코르(Justacorps)'

Paul Ahn 2008. 6. 25. 12:21

⊙현대 정장의 조상 '쥐스토코르(Justacorps)

(mk.co.kr)

 

'쥐스토코르(Justacorps)'는 '현재 정장의 조상'으로 불린다. 쥐스토코르로부터 프록-코트(frock coat), 슈트(suit)가 나왔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의 모드로 된 외투-조끼-바지를 입는 '스리 피스 정장(three piece suit)' 시스템도 쥐스토코르 발전의 역사에서 비롯되었다.

 

쥐스토코르의 어원은 '몸에 정확히 맞는(juste + au + corps)'이다. 16세기경 루이 13세가 즐겨 입어 귀족들 사이에 화제가 되었고, 뛰어난 패션 감각을 가지고 있던 루이 14세가 디자인을 더하여 대유행했다.

 

▲ 17세기말-18세기 초의 쥐스토코르

출처= ⓒLA카운티미술관홈페이지

 

 

01. 화려한 남성 복장의 대명사 '더블릿(doublet)'

 

쥐스토코르 이전 귀족 남성용 복장의 정석은 '푸르푸앵(pourpoint)'이었다. 푸르푸앵은 '겹쳐 만든 옷'이란 뜻이며 영어권에서는 '더블릿(doublet)'이라 부른다.

 

▲ 14세기 경 푸르푸앵의 재현품과 이를 착용한 모습

출처= ⓒwww.gambeson.pl

 

더블릿은 원래 기사의 갑옷 안에 받쳐 입던 기능성 복장이었다. 맨몸 위에 쇠로 된 갑옷을 입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처음에는 완충과 윤활 작용을 할 수 있는 적당한 옷을 안에 껴입었을 것이다. 그러나 기술의 발전과 함께 얇고 몸에 딱 맞는 갑옷이 나왔고 안에 껴입는 옷도 달라져야 했다.

 

얇은 천으로 꼭 맞게 만들면 활동성이 높아지겠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전장에서 상대 기사, 창병들은 집요하게 갑옷의 틈을 노렸는데, 생존성을 높이려면 안에 받쳐 입은 옷도 나름의 역할을 해야 했다. 그래서 신체 급소 부위, 갑옷의 틈이 벌어지는 관절 주변은 질긴 소재를 몇 겹 덧대는 방식으로 보강했다. '겹쳐 만든 옷'의 어원은 여기서 나왔다.

 

▲ 17세기 중반의 더블렛

출처= ⓒ런던빅토리아앤알버트박물관홈페이지

 

시간이 지나면서 더블릿 제작 기술도 발전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몸의 각 치수를 잰 후 입체적으로 재단하는 방식이었다. 생존과 직결되는 것이기 때문에 정교하고 세련된 기술을 필요로 했다. 전반적인 의복 제작 기술이 함께 발전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02. '흉갑(cuirass)'의 출현과 더블릿의 변화

 

전신 갑옷은 매우 무겁고 불편했지만 치명상을 피하기 위해선 다른 대안이 없었다. 물론 전신 갑옷에도 한계는 있었다. 갑옷 입은 기사를 상대하는 전술과 기술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특히 명예 같은 것에 구애받지 않는 용병들은 당시 관점에서 치사한 짓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들은 말 위의 기사를 투망 혹은 미늘창으로 잡아 끌어내리거나 말 또는 갑옷 위를 타격용 해머로 때려 낙마시킨 후 갑옷 틈을 찔러 치명상을 입혔다.

 

전신 갑옷 시대의 막을 완전히 내린 것은 대형 석궁에 이어 등장한 총이었다. 쇳조각으로 온몸을 가려봤자 총 앞에선 소용이 없었다.

 

석궁과 총의 등장 이후 기사, 장교들은 머리, 목, 가슴처럼 중요 부위만 가린 갑옷을 입었다. 이것이 바로 '흉갑(cuirass)'이다. 없다가 새로 등장한 것은 아니고, 중세 시대에 재력과 후원자 없는 기사가 이런 형태의 갑옷을 입기도 했다. 흉갑의 별칭이 '빈자의 갑옷'인 연유가 이러하다.

 

▲ 18세기 경 독일 지역에서 사용되던 흉갑

출처= ⓒ이베이

 

▲ 19세기 중반 프랑스 중기병이 입던 흉갑

출처= ⓒ영국국립박물관홈페이지

 

아래 사진을 보자. ①, ②번의 경우 전신 갑옷 속의 옷은 드러날 일이 없다. 기능만 훌륭하면 되었다. 그러나 ③, ④번처럼 흉갑만 착용할 경우엔 어떠한가. 옷의 일부가 드러난다. 여기에 귀족들은 색과 장식을 더하기 시작했다.

 

① 야코포 다 폰테(Jacopo da Ponte)의 1560년 작,

"군 지휘관의 초상"

출처= ⓒrobilantvoena.com

 

② 반 다이크(Anthony van Dyck)의 1627년 작,

"암브로지오 스피놀라 후작의 초상"

출처= ⓒ스코틀랜드국립미술관홈페이지

 

③ 윌리엄 돕슨(William Dobson)의 1640년 작(추정),

"제이콥 애슬리 경의 초상"

출처= ⓒmutualart.com

 

④ 테오도르 게리콜풍(Theodore Gericault)의 1814년작,

"총기병의 초상"

출처= ⓒ루브르박물관홈페이지

 

당대의 출전(出戰)이라는 것은 일정한 규모 이상의 부대를 입히고 먹일 재력이 있는 귀족들의 경쟁이었다. 돈이 넘친들 전장에 직접 나가지 않으면 용맹을 인정받지 못했다. 따라서 더블릿의 착용은 부와 명예를 동시에 거머쥔 자의 훈장 같은 것이었다.

 

출전 경험이 있는 귀족은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더블릿을 입고 예식이나 사교 모임에 나갔다. 그 속에서 전장의 무훈을 뽐내는 것은 귀족의 일생일대 염원이었다.

 

 

03. 더블릿에서 쥐스토코르로

 

화려한 귀족 패션의 대명사 더블릿은 '패션왕' 루이 14세 치세 기간에 정점이자 종점을 찍었다. 루이 14세는 패션을 권력의 도구로 활용하고자 했다. 그는 '모든 복장은 목적과 장소에 부합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복제를 정비해 강화했다. 귀족들은 왕실이 정한 바에 따라 지정된 복장을 입고 나타나야 했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더블릿은 흉갑 안에 입는 것이었고 그렇다면 이를 궁정에 입고 들어오는 것은 격식에 맞지 않았다. 그래서 루이 14세는 왕실 주재 행사에 더블릿을 입고 오는 것을 금지했다.

 

▲ 클로드 르페브르(Claude Lefevbre)의 1670년 작,

“루이 14세의 초상”. 흉갑 안에 더블릿을 입은 모습이다.

출처= ⓒwww.pop.culture.gouv.fr

 

▲ 금색과 은색의 수실, 길게 늘어뜨린 리본, 여러 겹 레이스로 화려함의 극치를 보이는 더블릿.

17세기 중후반의 것으로 추정

출처= ⓒwww.baroque.it

 

더블릿의 대안으로 루이 14세가 내놓은 것이 쥐스토코르이다. 그는 샘플을 만들어 입고 다녔고 나무 인형 위에 입혀 전시했으며, 귀족들을 왕궁에 초대하여 옷을 만들고 관리하며 입는 과정을 공개했다. 그리고 쥐스토코르를 입고 나오도록 종용했다.

 

루이 14세는 옷에 매력을 더하여 귀족들이 스스로 입고 싶게끔 만들었다. 우선 푸른색 실크에 금사와 은사로 장식된, 무릎까지 내려오는 외투를 샘플로 제시하여 화려함으로 귀족들을 매료시켰다. 여기에 명예와 희귀성을 더했다. 그는 측근 50명만 푸른색 쥐스토코르를 입을 수 있다고 선언했다.

 

▲ 18세기 쥐스토코르를 잘 묘사한 장 랑크(Jean Ranc)의 1724년 작,

“스페인왕 카를로스 3세의 초상”

출처= ⓒ스페인프라도 미술관 홈페이지

 

흥미롭게도 루이 14세는 '푸른색 쥐스토코르를 입을 수 있는 50인 명단'을 주기적으로 바꿨다. 교체의 기준은 무엇이었을까? '공식 및 비공식 행사 참가' '왕과 함께 사냥' 등 이른바 '충성 실적'이었다.

 

루이 14세의 패션은 대내적으로 프랑스 왕실과 귀족의 계서를 확고히 하는 저울 역할을 했다. 대외적으로는 유럽 왕가의 정통성의 상징, 따라하고 싶은 매력의 원천이 되었다. 그리하여 쥐스토코르는 당대 유럽 귀족의 표준 외투가 되었다.

 

 

04. 쥐스토코르의 특성과 변화

 

쥐스토코르의 특징은 칼라가 없고 길이가 허벅지까지 내려오는 것이었다. 전면에는 한 줄로 단추가 달려 있었는데, 통상 목 부위의 단추만 잠그고 나머지는 그대로 두어 앞섶이 역'브이(V)'자 형으로 열리게 해놓고 다녔다.

 

▲ 18세기 중반의 쥐스토코르

출처= ⓒ메트로폴리탄박물관 홈페이지

 

▲ 18세기 중후반 스위스 지방의 의 쥐스토코르

출처= ⓒ메트로폴리탄박물관 홈페이지

 

아랫단에는 고래뼈를 넣었는데 이렇게 하면 형태도 유지되고 무게가 있으니 옷이 아래로 쭉쭉 떨어지는 효과도 있었다. 앞섶 하단에는 장식용의 큰 주머니가 달려 있었다. 위 사진으로 알 수 있듯이 너무 아래쪽에 있어 손이 닿지 않았다. 소매는 팔꿈치 근처까지 길게 뒤집어 장식과 핀으로 고정시킨 후 레이스를 달고 자수로 꾸몄다.

 

▲ 쥐스토코르의 특징을 잘 살려 그린 삽화들 /출처= ⓒbritishmuseum.org

 

유행의 물결을 타고 쥐스토코르는 궁정 밖으로 나가 18세기 남성 외출복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면서 디자인도 조금씩 바뀌었다.

 

레이스와 자수는 야외 활동에 거추장스러운 혹이니 곧 없어졌다. 멋을 위해 길게 뒤집은 소매도 사라졌고 주머니는 손이 닿는 위치로 올라왔다. 전체적인 길이는 무릎 부근까지 내려와 더 길어졌으며 뒷도련에는 활동성을 높이기 위한 주름이 들어갔다. 앞섶 전체에 일렬로 달았던 장식용 단추는 목에서 허리 부근까지로 줄였다.

 

▲ 쥐스토코르의 디자인 변화 /사진=ⓒbritishmuseum.org

 

 

05. 제식 군복이 된 쥐스토코르

 

18세기 중반이 되자 쥐스토코르의 디자인은 화려하고 풍성한 것에서 단순하고 직선적인 것으로 바뀐다. 디자인 변모의 원인은 군대였다. 당대 전선에 지휘관으로 나간 귀족 중 일부가 쥐스토코르를 개조하여 입었는데 실용적이고 보기에도 좋았다. 이것이 점차 널리 퍼졌고 나중엔 장교용 제식 복장이 되었다.

 

▲ 1758년 프랑스 랑그독(Languedoc) 연대 장교의 복장

출처= ⓒ캐나다전쟁박물관홈페이지

 

1755년에는 프랑스 보병에 쥐스타코르가 지급되었다. 색은 옅은 회색으로 했고 전체적으로 장식과 주름을 빼고 길이는 무릎 위까지만 오게 줄였다. 뒷도련은 둘로 갈라지게 마무리했는데 활동성을 높이기 위한 것이었다.

 

▲ 1750년대의 프랑스군 복장. 신병(좌측)을 교육하고 있는 부사관(우측)의 모습이다.

출처= ⓒ캐나다전쟁박물관홈페이지

 

 

 

▲ '7년 전쟁(1754-1763)' 당시 프랑스군과 캐나다군 보병의 모습.

입고 있는 것이 제복으로 지급한 쥐스타코르이다.

출처= ⓒ캐나다전쟁박물관홈페이지

 

 

06. 영국으로 건너간 쥐스토코르

 

한편 17세기 말 영국으로 건너간 쥐스토코르는 본고장인 프랑스에서와는 다른 변용을 겪었다. '잉글랜드 내전(청교도 혁명, 1642~1651)'을 피해 프랑스에 있다가 1666년 복귀한 영국왕 찰스 2세의 선결 과제는 왕권 강화였다. 그는 루이 14세가 했던 것처럼 패션을 이용하여 귀족을 통제하고자 했다.

 

가. 화려한 원색에서 중후한 검은 색 계열로

 

그러나 당시 영국 귀족은 프랑스 귀족처럼 값비싼 복장을 감당할만한 부가 없었다. 또한 영국에 남아있는 청교도적 전통을 어느 정도는 존중해야 했다. 이에 찰스 2세는 쥐스토코르를 영국식으로 해석한 복장을 내놓았다.

 

화려한 원색 원단에 금은실 자수를 놓은 것이 프랑스식이었다면, 영국식은 엄숙한 검은색 원단에 선명하게 대비되는 백색 장식을 더한 것이었다. 그는 프랑스에 망명해 있을 때부터 검은색과 흰색이 대비된 깔끔한 디자인의 복장을 즐겨 입었었다.

 

▲ 이에로니무스 얀센(Hieronymus Janssens)의 1660년 작(추정),

"궁정에서 춤추는 찰스 2세". 찰스 2세가 입은 것은 흑백의 더블릿이다.

출처= ⓒ런던로얄컬렉션 홈페이지

 

 

나. '쓰리 피스 정장(three piece suit)'의 등장

 

찰스 2세는 왕궁에 등정할 때 슈미즈 드레스(chemise dress) 위에 상의 조끼(vest 혹은 waistcoat)를 입고 다시 그 위에 코트를 입고 오도록 지침을 내리면서, 루이 14세가 그랬던 것처럼 각 복장의 기준을 제시했다.

 

여기에 더하여 찰스 2세는 바지, 조끼, 외투를 하나의 통일된 디자인으로 맞춰 입도록 했는데 외투는 쥐스타코르를 영국식으로 개량한 것으로 정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흔히 말하는 '쓰리 피스 정장(three piece suit)'의 기원이다.

 

▲ 토마스 휴워트(Thomas Hewart) 등의 1676년 연작, "찰스 2세에게 파인애플을 바치는 궁정 정원사"

출처= ⓒ런던로얄컬렉션홈페이지

 

▲ 우측이 18세기 영국식 쓰리 피스 정장의 전형이다.

출처= ⓒfiveminutehistory.com

 

매경프리미엄

2019.10.01 15:01

남보람 군사편찬연구소 연구원 elyzcamp@naver.com

 

 

〈한국의 양복 역사〉

 

한국에서 양복은 1894년 갑오개혁을 계기로 당시 조선 정부가 서양 문명을 받아들여 제반제도 개혁을 단행할 때 복제개혁으로 처음 입게 되었다.

 

1896(고종 33) 4 7일 칙령 제78호로 육군복장규칙을 제정하여 당시 사용하던 군복을 폐지하고 서양식 육군복장을 제정하였다. 1900(광무 4) 4 17일에는 칙령 제14호로 문관복장규칙을 정하였고, 15호로 문관대례복제식(文官大禮服制式)을 정하여 조정 대신들의 관복을 서양식 관복으로 바꾸었다.

 

당시 정한 서양식 문관복은 일본을 통해서 들어온 것이며, 일본은 영국의 대례복을 모방한 것이었다. 개화기의 양복은 주로 관복으로 이용하였으며, 일부 상류층에서만 드물게 볼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당시 조선 및 대한제국 정부가 정한 칙령은 군복과 공복(公服)에 관한 규정으로 일반인의 복장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