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의 본질〕명품 구찌(It’s Gucci!)의 본질
◇늙은 구찌의 화려한 부활, 고상함 버리자 젊은층 열광
최근 패션업계에서 구찌의 부활이 화제다. 단순한 매출 수치뿐 아니라 구찌는 영미권에서 ‘멋진(cool)’, ‘놀라운(awesome)’ 같은 뜻으로 사용되고 있을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다. 구찌의 이런 변화 뒤에는 ‘핵심 고객층 변경’이라는 결단이 있었다. 명품 브랜드의 헤리티지는 유지하되, 밀레니얼의 감성과 라이프스타일을 디자인에 입히는 데 성공한 구찌는 젊은층이 열광하는 브랜드로 거듭났다.
작년 초 우리 가족은 유럽여행 막바지에 이르러 이탈리아 피렌체에 갔다. 16세기 르네상스 시대를 이끌었던 메디치 가문의 도시에 기대감이 컸던 나는 짐을 풀고 메디치 가문의 손때가 묻어있는 피렌체 성당에 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아내가 피렌체에 있는 ‘구찌뮤지엄’부터 가자고 하는 것이 아닌가. 아니 왠 명품숍? 구찌 매장은 한국 백화점마다 다 있는데, 굳이 여기까지 와서 구찌뮤지엄을 가야 할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지금 아니면 볼 수 없는 중세 유럽 유적이 많은데 굳이 명품 매장을 가야 하냐고 호텔에서 실랑이를 벌였다. 사실 명품 매장을 가자고 하는 순간 긴장하는 마음도 있었다. 가방이라도 사려고 카드를 꺼내면, 여행 경비가 한순간에 사라질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구찌는 곧 ‘좋다’, ‘멋지다’는 의미
아내를 이기지 못한 나는 택시를 타고 피렌체 시내 구찌뮤지엄으로 갔다. 그리고 아내에게 일장 훈계를 들었다. 어떻게 유통업에서 마케팅을 하고, 브랜딩을 한다는 사람이 구찌의 도시인 피렌체에 왔는데, 그냥 지나치냐고 호통을 쳤다. 브랜드의 기본도 모르는 사람이라는 말까지 들었다. 당시 아내는 구찌가 얼마나 ‘핫’한 브랜드로 변했는지 궁금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나는 대형마트 마케팅을 하는 사람이지, 명품 브랜딩하는 사람은 아니라고 답했다가 또 야단을 맞았다.
요즘 뉴욕이나 런던 젊은층 사이에서는 ‘구찌에요!(It’s Gucci!)’라는 말이 유행한다고 한다. 영미권에서는 아주 멋지고 소위 간지나는 무언가를 봤을 때 ‘멋져요(It’s cool)’, 혹은 ‘놀라워요(It’s awesome)’라는 단어를 쓰는데, 이제 그 대신 ‘구찌에요!(It’s Gucci)’라는 말을 쓸 정도로 구찌가 ‘핫’한 브랜드의 표상이 됐다는 것이다.
실제로 구찌뮤지엄에 들어서자마자 내가 알던 구찌 매장이 맞나 싶을 정도로 새로운 모습이 펼쳐졌다. 매장 전체가 따뜻하고 산뜻한 분위기를 풍길 뿐 아니라, 젊은 직원들이 구찌라고 새겨진 예쁜 유니폼을 입고 미소를 띠며 활발히 돌아다니고 있었다. 매장 한편에는 크지는 않지만 왁자지껄한 전형적인 이탈리아 파인다이닝 카페도 있었다. 아내는 그곳에서 식사를 하고 싶어 했지만 이미 예약이 꽉 차 있었다.
매장 인테리어도 상품 분위기와 콘셉트에 맞춰 화려한 플로라, 즉 꽃무늬 인테리어로 화사하고 밝은 분위기를 연출했다. 솔직히 나는 명품에 별로 관심이 없어 막연히 구찌라고 하면 말 안장의 고리에서 유래된 반복된 패턴에 ‘G’와 ‘C’를 모티브로 한 엠블럼 정도를 떠올렸다. 여기에 진한 브라운이나 연한 베이지 컬러의 빈티지 스타일로 된 가방, 차가운 느낌의 옷들 정도를 연상했다.
그런데 매장에 있는 구찌 제품들은 내가 상상하던 브랜드가 아니었다. 화사한 꽃무늬 패턴과 전통적인 구찌 가방이 조화를 이뤄 나의 상상과는 전혀 다른 제품들이 진열돼 있었다. 옷들도 플로라 무늬들이 펼쳐진 젊은 옷들로 변해 있었고, 우리나라 백화점 매장에서 볼 수 없었던 리빙·생활용품들도 다수 볼 수 있었다. 물론 가격은 동그라미가 하나가 더 붙은 듯한 고가였다. 그러나 나도 저런 제품이라면 하나 정도 샀으면 하는 상품들로 가득 차 있었다.
도대체 구찌에 어떤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어떻게 올드한 브랜드의 상품이 바뀌고, 매장이 변했으며, 직원들의 표정이 바뀌고, 젊은 고객들에게는 잇츠 구찌(It’s Gucci)라는 찬사까지 받게 되었을까. 플래그십스토어에서 한 시간 정도 보내고 나온 이후 궁금증은 더 커졌다. 16세기 메디치 가문과 다빈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보다 더 궁금해졌다.
◇구찌, 핵심 고객층을 재정의하다
2000년대 초반까지도 해도 잘 나가던 구찌는 2000년대 중반 이후 부진을 겪었다. 당시 구찌뿐 아니라 대부분 유럽의 명품 브랜드들이 성장 모멘텀을 찾지 못하고 한계에 봉착했다. 그나마 중국 등 아시아 국가의 신흥 수요에 힘입어 성장했는데, 아시아 시장도 점차 포화상태에 이르렀다.
이러한 상황에서 구찌는 2006년 젊고 감각 있던 34살의 프리다 지아니니를 총괄 크리에이터로 발탁하며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그녀의 사진을 보니 프리다 지아니니는 디자이너인지 모델인지 모를 정도로 상당한 미모의 소유자였다.
그녀가 리드하는 구찌는 ‘꽃을 모티브로 한 플로라’라는 디자인 콘셉트로 4년간 50%에 가까운 성장률을 보였다. 그러나 1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며 프리다 지아니니의 아성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아주 예민하고 섬세하며, 어린 나이에 성공한 천재 미모 디자이너의 성격은 아마도 새로운 것을 부정하고 본인 스타일만 고집하지 않았을까 추정된다. 물론 확인되지 않은 나만의 생각이지만, ‘뭐? 나 프리다야…’라는 자존감으로 뭉쳐있지 않았을까 한다. 내가 20년 넘는 직장생활을 통해 비춰봤을 때 젊은 시절 성공한 천재들의 후반부 모습은 대부분 그러했다.
결국 그녀는 2014년 12월, 매우 중요한 패션 콜렉션을 2주 앞둔 상황에서 구찌 오너와 다툰 후 바로 사표를 던져 버리고 만다. 총괄 크리에이터를 잃은 구찌는 위기에 봉착했는데, 그때 혜성처럼 나타난 또 하나의 천재 크리에이터가 알렉산드로 미켈레로, 지금의 구찌를 만들어 낸 장본인이다.
알렉산드로 미켈레는 프리다 지아니니와 같은 1972년생이지만 프리다 밑에서 핸드백과 액세서리를 디자인하는 평범한 디자이너 가운데 하나였다. 세련되지만 차가운 미모의 프리다와 달리 알렉산드로는 전형적인 히피와 같이 덥수룩한 수염에 머리를 기른 자유분방한 스타일이다.
그는 총괄 크리에이터가 되자마자 프리다가 던져버린 패션 콜렉션을 2주 만에 준비해 새롭게 달라진 구찌의 모습을 세상에 보여줬다. 그는 프리다가 만들어놓은 구찌 콘셉트와 철학은 버리지 않고 계승하면서, 새로운 구찌의 고객층인 젊은층이 열광할 만한 디자인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알렉산드로는 기존 구찌의 꽃 디자인 모티브를 더욱 버라이어티하고 화려하게 발전시켰다. 꽃과 어울리고 밀접한 다양한 모티브들 예를 들면 나비나 벌, 도마뱀, 뱀, 호랑이 등 각종 동물을 재해석해 가방, 액세서리, 의류 디자인에 등장시켰다. 또한 여성의 섹시함과 남성의 세련됨 등 남녀 젠더를 탈피해 개인의 개성이 넘치는 젠더리스 옷을 과감하게 디자인했다. 특히 그동안 대부분 명품 브랜드들이 등한시했던 디지털 마케팅을 적극 도입해 젊은 고객들과 소통하기 시작했다.
◇무명 디자이너를 파격 발탁한 결과?
인스타그램과 핀터레스트 등에서 활동하는 젊은 패셔니스타들은 SNS에 구찌 브랜드들을 홍보했고, 미국 힙합 가수인 릴 펍은 ‘구찌 갱(Gucci Gang)’이라는 노래까지 만들어 구찌를 찬양했다. 구찌의 개성 넘치는 옷들이 등장하는 릴 펍의 뮤직비디오는 유튜브에서 젊은층의 큰 인기를 얻었다. 결국, 할머니와 엄마들이 입는 브랜드라는 인식에서 탈피해 젊은층을 매료시킨 구찌는 다른 경쟁 브랜드들을 따돌리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히 알렉산드로만의 작품은 아니다.
사실 나는 알렉산드로보다 평범하던 디자이너를 발탁해 구찌의 혁신을 이끈 마르코 비자리 CEO에 더 주목하고 싶다. 그는 디자인이나 패션과는 거리가 먼 글로벌 컨설팅사인 앤더슨컨설팅 출신의 금융 전문 컨설턴트였다. 우연한 기회에 구찌를 운영하는 케링그룹에 입사해 스텔라 메카트니, 보테가 베네타 등의 CEO를 역임하며 구찌 오너 가문의 신뢰를 얻었다. 그러나 케링그룹 매출의 상당 부분을 담당하는 구찌 CEO로 그가 발탁된 것은 패션업계에 충격이었다.
패션도 제대로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구찌라는 제국을 이끌고 갈 것인가. 많은 사람들은 그가 금융 컨설턴트답게 구조조정에만 나서고, 패션의 생명인 크리에이티브에는 소홀히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진정한 비즈니스맨이었다. 명품 브랜드 비즈니스 본질을 명확히 꿰뚫고, 지킬 것은 지키면서 빠른 의사결정으로 과감하게 바꿔야 할 것은 바꿨다. 결국 2015년 초 그가 CEO에 취임한 후 2년 만인 2017년 구찌는 영국에서 가장 핫한 브랜드 1위에 올랐다.
마르코 비자리 CEO는 엄청난 속도로 구찌를 변화시켰다. 먼저 핵심 고객 타깃을 재설정했다. 바로 젊은층이다. 젊은 고객들은 더 이상 부모들이 가던 백화점에서 쇼핑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동안 구찌의 메인 채널이었던 백화점 채널을 구조조정하고, 패션 전문 편집숍에 새롭게 진출했다. 대부분 명품업체들은 자신들의 브랜드 위상과 맞지 않는다고 판단해 패션 편집숍이나 온라인 채널을 멀리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구찌는 젊은층들이 이미 온라인이나 편집숍으로 이동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상품아이템 수도 20% 줄이고, 핵심 상품에 집중했다. 명품 브랜드들이 주로 활용하던 전통 매체 광고(ATL)를 정리하는 대신 디지털 마케팅에 투자했다.
그가 내린 의사결정 가운데 가장 과감하면서도 현명한 것은 바로 알렉산드로 미켈레의 발탁이다. 신임 CEO로 임명된 그는 로마의 한 카페 사내 행사에서 우연히 알렉산드로를 만나 구찌 디자인에 대해 4시간 동안 열띤 토론을 벌였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바로 총괄 크리에이터로 발탁, 모든 전권을 그에게 주며 구찌 디자인을 파격적으로 혁신했다.
패션을 모르는 CEO가 구찌의 크리에이티브를 망칠 것이라는 주변 불신을 한방에 날려버리는 선택이었다. 자신이 잘 모르는 것은 과감하게 위임하는 CEO의 현명한 모습이다. 이 대목은 애플의 스티브 잡스가 평범하던 조너선 아이브를 애플의 총괄 크리에이터로 발탁해 지금의 애플 제국을 만든 이야기와 맥을 같이 한다.
◇낡은 유산에 얽매이면 브랜드 도태
흔히 명품 비즈니스의 본질은 헤리티지(Heritage ; 전통 유산)라고 한다. 사람들은 오래 전 유럽 귀족이나 상류층이 사용하던 브랜드를 자신이 누리면서 왠지 특별한 사람이 된 듯한 만족감을 느낀다. 그러나 시대가 흘러 지금 젊은층은 전통 명품 브랜드가 제시하는 라이프스타일에 만족하지 않는다.
럭셔리의 헤리티지는 동경하되, 나만의 개성과 라이프스타일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것을 담아내는 것은 쉽지가 않다. 자칫하면 오랫동안 지켜오던 브랜드의 헤리티지를 훼손하는 것처럼 받아들여져 기존 고객층마저도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헤리티지를 지키는 것과 모든 것이 바뀐 시장을 따라가지 못하고 기존의 레거시(legacy ; 낡은 유산)에 얽매이는 것은 다른 이야기다.
헤리티지와 레거시 사이에서 최적의 답을 찾는 것이야말로 가장 높은 수준의 크리에이티브가 아닐까 한다. 지금까지는 구찌 디자이너인 알렉산드로가 그 최적의 답을 찾아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방심하는 순간 구찌의 성공스토리는 옛 이야기로 변할 수도 있다. 대형마트 업계도 마찬가지다.
지금까지 성공을 구가하던 마트의 지켜야 할 것과 새롭게 등장한 온라인의 세계에서 받아들여야 할 것의 조화를 현명하게 이루면 고객에게 선택받고 사랑받을 것이다. 이는 정말 중요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 구찌의 CEO 마르코 비자리의 지혜가 필요한 시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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