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ket Issue/@Management

⊙한국기업 100년, 퀀텀점프의 순간들

Paul Ahn 2014. 10. 1. 12:25

⊙한국기업 100년, 퀀텀점프의 순간들

https://news.v.daum.net/v/20191209030132132

 

세계는 못할거라 했지만.. '반도체-철강-포니차' 보란듯 해냈다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래 청진에 가자. 어디 가서 어떤 노동을 해도 지금보다야 못하겠는가.”

(정주영 동아일보 에세이 ‘나의 기업 나의 인생’ 중)

 

1931년 강원 통천군 시골마을의 배고픈 열여섯 살 소년은 구장집이 받아보는 동아일보에 실린 구인광고를 보자 가슴이 뛰었다. 소년은 아버지에게 드릴 땔감 값을 1, 2전씩 빼돌려 가출 자금을 모았다. 첫 번째 가출은 아버지에게 덜미 잡혀 실패로 끝났다. 세 번째 가출도 동아일보에 난 부기학원 광고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소를 판 돈을 훔쳐 서울로 야반도주해 부기학원을 다녔다. 몇 달 뒤 아버지가 찾아와 “종손은 고향을 지켜야 한다”고 하소연하자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네 번째 가출은 성공이었다. 서울 쌀가게의 배달원 정주영은 특유의 바지런하고 정직한 성품으로 주인과 손님의 신용을 얻었다. 주인이 쌀가게를 넘겨준 1937년, 22세의 청년 정주영은 서울 신당동 일대 ‘경일상회’ 사장이 됐다. 이 쌀가게는 오늘날 현대자동차그룹, 현대중공업그룹, 현대그룹을 탄생시킨 사업 밑천이 됐다.

 

 

◇기업가 정신으로 일군 한국 기업 100년

 

동아일보가 자문위원 30인과 함께 100개를 선정한 ‘한국 기업 100년, 퀀텀점프의 순간들’ 중 상위 20개 가운데 현대그룹 창업주 정주영 회장과 관련된 장면만 6개였다. ‘한국 최초의 독자개발 승용차 포니’(1976년·3위), ‘현대차 설립’(1967년·6위), ‘현대중공업 1호선 진수 및 인도’(1974년·8위) 등이 해당된다.

 

1915년에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1919년 3·1운동 이후 등장한 신문, 철도, 산업화 등 ‘근대화의 물결’을 타고 조선·자동차·건설 강국을 일궈낸 정 회장의 삶 자체가 한국 경제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위 중 삼성과 관련된 장면도 6개다. 1위인 ‘이병철 도쿄 선언’(1983년)을 비롯해 ‘삼성전자 설립’(1969년·4위), ‘이건희 신경영선언’(1993년·7위) 등이다. 포항제철 건설과 관련된 ‘포항제철 첫 쇳물 생산’(1973년·2위), ‘박태준의 하와이 구상’(1969년·15위)도 높은 지지를 받았다. 미국에서 제철소 건설에 필요한 차관을 얻는 데 실패한 박태준 당시 포철 사장이 하와이에서 목 놓아 울다가 대일청구권 자금 활용 아이디어를 떠올려 오늘날 포스코를 만든 그 장면이다.

 

정구현 연세대 명예교수는 “한국은 정부가 먼저 중화학산업 육성책을 내놓았고 기업이 이에 발맞춰 경제성장을 이뤘다. 당시 한국으로서는 불가능한 과제를 가능케 한, 미래 비전을 제시하는 리더들의 출현이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1919년 첫 근대식 주식회사로 꼽히는 경성방직(경방)이 등장한 이후 창업가 정신으로 뭉친 기업인들이 농업 한국을 경공업 한국으로, 이어 중화학공업 한국, 첨단 전자산업 한국으로 퀀텀점프시키는 주역이었다는 의미다.

 

실제로 한국이 제철소, 조선소, 자동차 공장, 반도체 공장을 지을 때 세계는 비웃었다. 투자나 기술 자문을 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현대차 설립이 1967년인 것은 마침 미국 포드가 1966년 한국에 진출할 목적으로 사업 파트너를 찾으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회사를 만들었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포드가 기술 이전이 가능한 합작사 설립에는 발을 빼자 현대차는 독자 생존밖에 답이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게 ‘포니’다.

 

1973년 6월 9일 오전 7시 30분, 포철 용광로에서 쇳물이 나오자 박태준 사장을 비롯한 창립요원들은 모두 눈물을 흘렸다. 1968년 세계은행이 “한국의 제철공장은 엄청난 외환비용에 비춰 경제성이 의심되므로 종합제철 건설을 연기하고 노동 및 기술 집약적인 기계 공업 개발을 우선 해야 한다”고 주장한 지 5년 만의 쾌거였다.

 

LG그룹 창업주 구인회 회장은 한국에 전자산업을 뿌리내린 혁신적 기업인이었다. 한국 최초의 라디오, TV, 세탁기, 냉장고는 모두 금성사(현 LG전자)에서 나왔다. 한국인의 일상을 바꾼 화장품(럭키크림), 하이타이(최초의 합성세제) 등도 LG의 작품이었다.

 

 

 

▼ “불가능을 가능하게… 기업가 정신이 오늘의 한국 일궈내” ▼

 

 

◇한국을 넘어 세계로

 

1993년 이건희 삼성 회장의 ‘신경영선언’은 한국이 ‘품질 경영’으로 눈을 돌리는 계기를 마련한 획기적 순간이다. 시작은 일상에서 비롯됐다. 삼성 사내방송인 SBC가 한 프로그램에서 세탁기 뚜껑이 불량인데도 라인 작업자가 태연하게 부품을 칼로 깎아낸 뒤 대충 끼워 맞추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 보도했다. 당시 일본에서 독일로 출장길에 올랐던 이 회장은 기내에서 이 소식을 듣고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서울 비서실로 전화해 200여 명의 삼성 수뇌부를 독일로 불러들였다. “아내와 자식만 빼놓고 모든 것을 바꿔야 한다”는 명언이 이때 나왔다.

 

1985년 플라자 합의 이후 미국이 일본 견제에 나서면서 ‘엔고’ 시대가 열렸다. 세계시장에서 일본 제품의 값이 비싸지면서 1990년대 초반 한국 상품은 잘 팔리고 있었다. 하지만 불량품을 칼로 깎아 억지 제품을 만드는 수준의 품질로는 일류기업 근처에도 못 간다는 게 이 회장의 판단이었다.

 

김경원 세종대 경영대 학장은 “1990년대 삼성의 혁신적 경영방침, 조직개편 등은 많은 다른 기업에 영향을 줬다. 품질경영 선언 역시 재계로 확산돼 한국 기업의 체질 변화를 가져왔다”고 평했다.

 

이런 노력의 결과 2000년 이후 글로벌 정상에 오르는 한국 기업들이 속속 등장했다. 2000년 한국 조선산업이 수주량, 건조량 등 모든 분야에서 세계 1위를 휩쓸었다. 2006년 삼성전자 TV는 소니를 이기고 세계 1위를 차지했다. 현대차는 1999년 미국에서 실시한 파격적인 10년, 10만 마일 무상 보증제로 글로벌 시장에서 인정받아 자동차 5대 메이커가 되기도 했다. 1986년 ‘엑셀’로 미국에 첫발을 내디딘 지 13년 만이었다.

 

 

◇이동통신·인터넷·뉴 키즈의 등장

 

1990년대 인터넷과 이동통신, 386 기업인의 등장은 한국 경제의 지형을 또 한 번 바꿨다. 현재 재계 3위인 SK그룹이 한국이동통신(현 SK텔레콤)을 우여곡절 끝에 김영삼 정부 출범 둘째 해인 1994년 인수했다. 1996년 세계 최초 부호분할다중접속(CDMA) 상용화에 성공하면서 한국은 통신강국으로 떠오르게 됐다.

 

1995년 한메일이라는 e메일 서비스를 바탕으로 한 다음의 등장(19위)과 1999년 네이버 서비스의 시작(12위)은 ‘뉴 키즈’ 기업인 시대를 예고했다. 이재웅 다음 창업자는 27세에, 이해진 네이버 창업자는 32세에 회사를 차렸다.

 

한국 기업사의 주요 명장면 중에는 화려하게 등장했다 허무하게 사라진 ‘대우 해체’(1998년·10위)도 있다. 세계 경영의 자부심, 외환위기의 아픔, 어떤 기업도 영원할 수 없다는 교훈을 남긴 장면이었다.

 

 

◇퀀텀점프 100장면 어떻게 뽑았나

 

동아일보가 내년 창간 100주년을 맞아 선정한 ‘한국 기업 100년, 퀀텀점프의 순간들’은 취재팀이 자문위원 30명과 함께 자료 수집, 설문, 분석 등의 과정을 거쳐 나온 결과물이다. 동아일보 취재팀은 한국 기업사 주요 사건을 연도별로 1차 선정한 후 이를 △한국 기업사 △기술혁신 △거시경제 사건 △인수합병(M&A) △혁신 상품 및 브랜드 등 5가지 분야로 나눠 자문위원을 대상으로 설문조사 및 심층 인터뷰를 진행했다. 경제·경영학을 비롯한 이공계 분야 대학교수, 국책연구소, 경제단체, 전직 관료 등으로 구성된 자문위원은 중요한 장면에 순위를 매겼고 취재팀은 이를 바탕으로 총 100개를 확정했다.

 

2019.12.09

김현수 kimhs@donga.com·염희진·황태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