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ype of Business/@Kitchen Goods

★웨지우드(Wedgwood) / 영국 1759, 본차이나(Bone China) 최초개발

Paul Ahn 2021. 5. 7. 17:25

웨지우드(Wedgwood) / 본차이나(Bone China) 최초개발, 1759년

Wedgwood

영국의 대표적인 도자기 브랜드.

조지아 웨지우드가 1759년 설립

1812년 본차이나(Bone China)를 최초로 개발한 회사.

고급식기, 티웨어, 액세서리나 타월, 홍차 등을 취급

 

영국의 세계적인 도자기 공예가인 조지아 웨지우드가 1759년에 설립하였고 로얄덜튼사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세계적인 도자기 브랜드의 하나로 자기매김하였다.

 

 

역사

영국의 도자기 산업은 17세기까지 런던과 브리스톨에서 생산되는 델프트 도기가 주를 이뤘지만, 18세기에 들어서면 고급 도자기와 석제품이 이를 대체 하였다. 이러한 생산에 고품질의 점토가 필요하며 잉글랜드 중부의 스트랫포드셔 주에서 양질의 점토와 석탄을 생산하면서 도자기 산업이 급격히 발전했다.

 

조지아 웨지우드는 1730년에 이 지역 도공의 아들로 태어나 젊었을 때부터 도자기 기술과 화학, 도판 등의 지식을 평가 받았다. 그리고 몇 차례의 공동 사업을 거친 후 1759년에 버슬렘(Burslem)에 있는 삼촌의 공장을 이어받아 사업을 시작했다. 이 때 사촌 토마스를 관리자로 고용했다.

 

이 아이비 하우스 공장(Ivy House Works)에서 개발한 녹색의 유약을 이용한 도기는 호평을 얻었으며, 3년 후 1762년에는 같은 버슬렘에 있는 브릭 하우스 공장(Brick House Works)으로 이전했다. 여기서 조시아는 회사의 대표작이 되는 에나멜을 이용한 엷은 황색의 도기를 완성시켰다. 이것은 샬로트 왕비(조지 3세의 아내)에게도 납품되어 1765년에 ‘퀸즈웨어’(여왕의 도기, Queen's Ware)라는 명칭의 사용이 허가되었다.

 

1769년에는 리버풀의 상인인 토마스 벤틀리(Thomas Bentley)를 공동경영자로서 맞아들이면서, 토마스의 인맥도 영입되어 회사는 발전을 계속했다. 퀸즈웨어는 유럽뿐만 아니라 미국 대륙에도 출시되었고, 1774년에는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에서 944점의 프로그 서비스라고 불리는 도자기 세트의 주문을 받았다.

 

 

웨지우드(Josiah Wedgwood)

 

출생 : 1730. 7. 12, 잉글랜드 스태퍼드셔 버슬렘에서 세례받음

사망 : 1795. 1. 3, 스태퍼드셔 에트루리아

국적 : 잉글랜드, 영국

17세기부터 도기를 만들어온 도공 집안 출신의 웨지우드는 도기 제조의 과학적 접근방식이 뛰어났으며 재료에 대한 철저한 연구와 논리적인 노동력 활용, 사업 조직에 대한 감각으로 유명하다. 1754년 당시 최고의 도공으로 짐작되는 스태퍼드셔 펜턴로의 토머스 휠던과 동업을 시작하고 당시 도예기법의 권위자가 될 수 있었다.

 

도기 제조의 과학적 접근방식이 뛰어났으며 재료에 대한 철저한 연구와 논리적인 노동력 활용, 사업 조직에 대한 감각으로 유명하다.

 

도공 토머스 웨지우드의 막내 아들인 그는 17세기부터 도기를 만들어온 도공 집안 출신이다.

 

1739년 아버지가 죽은 후 버슬렘 처치야드 워크스에 있는 가족 공장에서 일을 했으며 특히 물레성형에 능숙해졌다. 1744년에는 형 토머스 밑에서 도제수업을 받았다. 천연두를 앓게 되어 그가 일할 수 있는 양이 상당히 줄어들었으며(이 병은 나중에 오른쪽 다리에 감염되어 그 다리를 절단하게 되었음) 결국 육체활동을 할 수 없게 되었지만 그대신 독서와 연구, 그리고 자신의 기술을 실험했다.

 

그는 1749년경 토머스가 자신의 동업 제의를 거절하자 스태퍼드셔 스토크온트렌트에서 존 해리슨과 잠시 함께 일하다가(1752~53) 1754년 아마도 당시의 제일 가는 도공인 스태퍼드셔 펜턴로의 토머스 휠던과 손을 잡았다.

 

이것은 매우 성공적인 동업으로서 웨지우드를 당시 도예기법의 권위자가 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때 그는 스태퍼드셔의 도기제조에 관한 매우 귀중한 자료인 이른바 〈실험서 experiment book〉를 쓰기 시작했다.

 

오늘까지도 인기있는 개량된 녹색유약을 발명한 후 웨지우드는 휠던과의 동업을 끝내고 버슬렘에서 독립적으로 사업을 시작했는데 처음에 세운 사업장이 아이비하우스 공장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1765년 샬럿 여왕의 후원을 받았기 때문에 퀸스웨어(Queen's ware)라고 불린 크림색 도기를 완성했다.

 

단순한 장식과 함께 끝마무리가 잘 되어 있고 외형이 깨끗한 퀸스웨어는 견고한 소재와 편리한 형태로 인해 국내 도자기의 기준이 되었고 세계 시장에서 애호되었다. 1762년 그는 자주 방문하는 리버풀에서 상인 토머스 벤틀리를 만났다.

 

그의 사업망이 영국의 작은 섬에서부터 유럽 대륙에까지 고루 퍼져 있었기 때문에 웨지우드는 자신의 사업을 근처인 브릭하우스(또는 벨워크스) 공장으로 확장시켰다. 1768년 벤틀리가 그의 동업자가 되어 장식용품을 제조했다.

 

그 장식용품이란 주로 당시에 유행하던 신고전 양식의 형태와 장식을 가진 다양한 색깔의 무유약석기(無釉藥)였고 웨지우드는 이 제품의 생산에 주력했다. 이들 제품 가운데 주요한 것은 적색납화법(赤色蠟畵法)을 가미함으로써 그리스의 적회식(赤繪式) 도기를 모방한 흑색 무유약 석기와, 황산바륨이 포함되어 있는 흙반죽을 높은 온도에서 구워낸 결이 고운 유리질도기인 재스퍼 웨어이다.

 

장식용 꽃병을 생산하기 위해 웨지우드는 에트루리아 공장을 세웠으며 1771~73년에는 실용적인 제품의 생산지도 그곳으로 옮겼다(그의 후손들은 계속 그곳에서 사업을 운영해오다가 1940년에 스태퍼드셔의 발라스턴에 공장을 이전시켰음). 그가 에트루리아를 위해 고용한 가장 유명한 예술가는 밀랍 초상화와 그밖의 부조 형상을 재스퍼 웨어에 전사시킨 조각가 존 플랙스먼이었다.

 

그의 도자기는 특히 유럽의 신흥 부르주아 계급의 호감을 샀으며 자기와 파이앙스 공장들은 그와의 경쟁으로 심한 타격을 받았다. 살아 남은 공장들은 크림색 도기(대륙에서는 '정교한 파이앙스' 또는 '영국제 파이앙스'라고 불림) 제조로 업종을 바꾸고 주석 에나멜의 사용을 줄였다. 심지어 프랑스의 세브르와 독일 마이센에 있는 큰 공장도 타격을 입었다. 재스퍼 웨어는 세브르에서 초벌구이된 자기(磁器) 형태로 모방되었고 마이센에서는 웨지우다르바이트라고 불리는 유약 입힌 제품을 생산했다.

 

웨지우드의 크림색 도기가 인기 있었다는 증거는 1774년 러시아 제국의 예카테리나 여제를 위해 952개의 많은 양의 식기 세트가 만들어졌다는 것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재스퍼 웨어가 도입된 뒤에 나온 다른 도자기들, 즉 로소안티코(붉은 자기)·등나무색·황갈색·초콜릿색·올리브색 도자기 제품들은 산화물을 첨가시켜 만들어냈다.

 

웨지우드는 도자기에 관한 모든 종류의 형태와 기능을 탐구했다. 그는 도기를 굽는 가마의 온도를 측정하는 데 매우 중요한 고온 온도측정 장치인 고온계를 발명했고 그 공적을 인정받아 영국 학술원 회원으로 위촉되었다.

 

그와 친교를 나누었거나 함께 연구한 많은 훌륭한 과학자 가운데 이래즈머스 다윈이 있는데 그는 웨지우드에게 증기기관에 투자할 것을 권해 1782년 에트루리아에 처음으로 공장이 설치되었다.

 

웨지우드의 딸 수재나는 찰스 다윈의 어머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