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ype of Business/@Kitchen Goods

★심수관요(沈壽官窯) / 1598, 일본 사스마도기(薩摩燒) 개창, 명예총영사

Paul Ahn 2021. 5. 9. 21:23

★심수관요(沈壽官窯) / 일본 사스마도기(薩摩燒) 개창, 명예총영사

http://www.chin-jukan.co.jp/

 

 

위치 : 1715 미야마, 오키구, 가고시마 일본

 

심수관(沈壽官)은 1598년 정유재란 때 조선에서 일본으로 납치된 심당길(沈當吉)의 후손으로 제12대 심수관(1835년 ~ 1906년) 이후의 역대 도예가를 말한다.

 

본관은 청송(靑松)이고 가고시마현 히오키시 나에시로가와(苗代川, 현재의 히가시이치키 정 미야마)에서 지금까지 사쓰마 야키(사쓰마 자기, 사쓰마 도기, 薩摩)라고 하는 도자기를 만들며 일본 도예계를 이끌고 있다.

 

1598년 12월, 시마즈요시히로에 의해 남원 등지에서 심당길과 박평의를 비롯하여 40여인이 피랍되어 가고시마현 구시기노시마하라(串木野島平)에 상륙하였다. 이 가운데는 심당길(沈當吉)은 청송 심씨로 남원근교에서 피랍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족은 1603년 구시기노(串木野)로부터 현재의 히오키군 히가시 이치키죠 미야마(日置郡 東市 來町 美山) 나에시로가(苗代川)에 이주하여 나에시로가와(苗代川燒)를 열었다.

 

그로부터 18년 후 심당길은 박평의와 함께 도자기의 원료인 백토(白土)를 발굴하여 오늘날의 사쓰마도기를 개창하였다. 사쓰마번주는 이들을 사무라이급(士班)으로 예우를 하였으며, 이들이 구워낸 도자기에 사쓰마의 번명(藩名)을 붙여 사쓰마도기(薩摩燒)라고 명명하였다. 그 후 명치유신에 이르기까지 대를 이어가면서, 조선도자기의 흐름과 기예를 계승·발전시켜 나갔다.

 

1873년 제12대 심수관은 오스트리아만국박람회에 대화병 한쌍을 출품하여 서구세계에 사쓰마도기의 수출이 시작되어 ‘사쓰마웨어’라는 이름은 일본도자기의 대명사가 될만큼 유명해졌다.

 

제14대 심수관은 작가 시바료타로(司馬遠太郞)가 쓴 『고향을 잊을 수가 없소이다』의 주인공으로 널리 알려졌으며, 1988년 일본인으로는 처음으로 대한민국명예총영사로 임명되었다.

 

 

 

‘조선 도공 후예’ 15대 심수관 “한일 가교 역할 하겠다”

https://www.donga.com/news/Inter/article/all/20210406/106270529/1

 

“한국과 일본 사이 여러 정치 문제가 있지만 그것과 별개로 문화면에서 활발하게 교류해야 한다. 거기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

 

 

조선 도공의 후예인 15대 심수관(沈壽官·65·사진)은 6일 가고시마현 히오키시 미야마의 심수관요(窯·도자기를 굽는 가마)에서 진행된 대한민국 명예총영사관 개관식 행사에서 이처럼 소감을 밝혔다. 한국 정부는 1월 그를 주가고시마 명예총영사로 임명하고 심수관요에 명예총영사관을 개설키로 결정했고, 2월 일본 외무성의 승인을 얻으면서 최종적으로 이날 개관식을 열었다. 15대 심수관은 일본 국적자이기 때문에 일본 정부의 승인이 필수적이다.

 

행사에 참석한 이희섭 주후쿠오카 총영사는 “지난해 11월부터 명예총영사 임명 작업을 진행했는데, 한일 관계가 좋지 않아 일정이 길어질 줄 알았다”며 “한일이 임명 절차를 빠르게 끝낸 것은 양국이 그만큼 관계 개선에 대한 열망이 크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15대 심수관의 아버지인 14대 심수관은 앞서 1989년 명예총영사에 임명됐다. 2019년 6월 작고하면서 명예총영사가 없는 상태가 지속되다가 이번에 다시 15대 심수관이 명예총영사가 됐다.

 

시오타 고이치(¤田康一) 가고시마현 지사는 축사를 통해 “15대 심수관은 일한(한일) 청소년 교류, 문화 교류, 장애인 교류 등에 폭넓은 역할을 해 왔다”며 “명예총영사관 개관을 계기로 가고시마현과 한국이 한층 더 교류를 늘리길 희망한다”고 말했다.

 

행사 후 15대 심수관은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징용, 수출규제 등으로 한일 국민 감정이 좋지 않아 솔직히 (명예총영사를 받아들일지) 주저했다. 하지만 아버지에 대한 존경, 또 한일 관계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다는 생각에 수락했다”고 말했다.

 

그는 “나에게 한국은 조국(祖國·조상 대대로 살던 나라)이고, 일본은 모국(母國)이다. 한일 관계가 나쁘면 나는 부부싸움을 보는 듯하다”고 털어놨다. 그러면서 “한일 정부 사이는 체면이 중요하고, 기업 사이는 이익이 중요하지만, 개인 사이는 이득이 없어도 친구가 될 수 있다”며 “나의 역할은 한국을 사랑하는 일본인, 일본을 사랑하는 한국인을 한 명이라도 더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일 간 차이를 알고, 그것을 인정하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했다.

 

그는 “과거에는 한일 관계가 안 좋더라도 개인적 인연을 가진 한일 정치인들이 갈등을 줄였는데, 요즘은 그런 정치인들이 적어진 게 안타깝다”고 했다.

 

15대 심수관은 1598년 정유재란 때 때 조선에서 끌려 온 도공 심당길의 15대손이다. 심수관 가문은 423년 동안 도자기 명가의 맥을 이어오고 있다. 메이지유신 때 가업을 빛낸 12대 심수관을 기려 이후 자손들이 ‘심수관’이란 이름을 계승하고 있다. 15대 심수관도 와세다대 교육학부 사회학과를 졸업한 뒤 교토와 이탈리아, 경기 이천 등지에서 도예를 공부했고 1999년 1월 아버지의 이름을 이어받았다.

 

그는 “기자가 되고 싶어 방송국 시험에 합격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버지보다 어머니가 도자기 가업을 이어가길 원해 결국 도공이 됐다”고 했다. 그는 아들 두 명 중 한 명에게 역시 가업을 잇게 할 생각이다.

 

현재 심수관요에는 제작을 담당하는 기술인 20명과 판매 담당 8명이 일한다. 그는 첫 디자인을 포함해 전반적인 제작을 총괄한다. ‘1년에 몇 개 도자기를 만드느냐’는 질문에 한참을 생각하더니 “수백 개는 만들 텐데, 정확한 개수를 모르겠다”고 말했다.

 

이날 개관식엔 NHK, 아사히신문, 마이니치신문, 니시니혼신문 등 일본 언론사 약 20개사가 취재하며 높은 관심을 보였다. 각종 단체로부터 온 화한도 15개나 됐다. 그 중에는 하기우다 고이치(萩生田光一) 문부과학상으로부터 온 화한도 있었다. 한일 문화교류가 문부성 영역이어서 화한을 보낸 것으로 보인다.

 

2021-04-06 14:56

미야마=박형준 특파원 lovesong@donga.com

 

 

세계 최고 도자기 가문 심수관요 세습의 '비밀'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128058

 

임진왜란에 이은 정유재란! 정유재란 당시 전라도 남원의 도공이었던 심당길 일가는 왜군에게 끌려와 1597년 가고시마 사츠마 마을에 정착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왜군의 포로로 끌려오면서도 "고향의 흙과 유약 그리고 한문과 한글 서적을 배 밑창에 숨겨 왔다"고 합니다. 박물관에는 고향의 흙과 유약으로 만들었던 도자기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심당길의 후손들은 일본 가고시마 사츠마에 자리를 잡고 도자기 기술자로 살아오면서도 '석자로 된' 이름을 자손대대로 버리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심수관요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바로 그런 까닭입니다. 400여 년간 일본인들과 함께 살아가면서 조선식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였고 그로 인해 당하는 차별과 굴욕을 온전히 감내하였던 것입니다.

 

박물관을 둘러보면서 가장 먼저 품었던 의문은 심당길의 12대 손 이후로 심수관이라고 하는 이름을 세습하더라는 것입니다. 처음엔 12대 이후로 넘어오면서 아버지, 할아버지의 이름을 세습하면서, 본인들은 일본 이름을 사용하는 편법 혹은 타협책을 사용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짐작하였습니다(안내 해주는 분이 없어서 명확한 답을 확인하지 못하였네요).

 

그런데 나중에 자료를 검색해보니 일본에서는 높은 기술과 권위를 갖춘 명인의 경우 그 이름 자체를 세습하는 제도가 있다고 하더군요. 심수관 가문이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된 것은 바로 12대 심수관 때부터였다고 합니다.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 만든 도자기 '대화병 환조'를 1875년 오스트리아 만국박람회에 출품하여 세계 최고 수준의 작품으로 평가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이후 13대, 14대 연속으로 만국박람회에 작품을 출품하였으며, 이후 사츠마 도자기는 세계적인 명품 도자기를 이르는 이름이 되었다고 합니다. 12대 심수관 이후 도공으로 가문의 업을 계승하는 자손은 모두 심수관이라는 이름을 세습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현재의 심수관은 15대 심수관으로 12대의 증손자 되는 분이 1999년에 습명을 이어받았다고 합니다.

 

이러한 세습은 "아무리 혈손이라고 하더라도 명인의 수준에 이르지 못하면 이름을 줄 수 없고, 피가 섞이지 않아도 제자 중 누군가가 더 나은 수준에 도달하면 그 제자에게 이름이 돌아간다"고 합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심수관이라는 이름이 그의 자손들에게 세습되고 있는 것입니다.

 

심수관요에는 몇 가지 눈에 띄는 것들이 있습니다. 일본 국기와 한국 국기가 나란히 계양되어 있고, 대한민국 명예총영사관이라는 현판도 붙어 있으며, 조선의 형식의 정자도 한 채 있었습니다.

 

▲  조선 도공들이 사용하던 일본어 회화책

 

가장 볼 만한 전시장은 박물관과 심수관요의 작품전시관이었습니다. 박물관에 전시된 도자기들도 눈에 띄었지만 그 보다 더 놀라웠던 것은 조선에서 가져갔던 서책들과 직접 제작한 일본어 회화책 지도 같은 것들 이었습니다. 일본에 정착한 조선인들이 일본어를 익히는 과정을 짐작할 수 있겠더군요.

 

사쯔마 도자기의 기원은 임진, 정유재란(1592-1598) 때로부터 시작됩니다. 1598년 사쯔마에서 출병하였던 시마즈 요시히로가 귀국할 때 끌고 온 조선 도공 약 80여 명이 사쯔마에 뿌리를 내리면서 '사쯔마 도자기'가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현재 심수관요가 있는 지역에 가장 많은 도공들이 정착하여 번성하였고, 현재까지 사즈마 도자기를 제작하고 있습니다.

 

초기 작품으로 유명한 히바까리 다완은 사쯔마의 불을 사용하지만 조선의 흙과 기술을 사용하여 만든 도자기를 말합니다. 심수관요가 있었던 지역은 에도시대까지도 대부분 조선 이름을 사용하고, 조선의 풍속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조선어가 보존된 지역이었다고 합니다.

 

12대 심수관이 명성을 얻기 시작한 것은 1867년 파리만국박람회 참가와 오스트리아 빈 만국박람회에서 수상하게 된 것이 결정적이었습니다. 메이지 유신 이후에 번경영도기제작소의 공장장에서 민간 도자기 회사의 공장장이 됩니다. 그러나 그가 일하던 도기 회사는 국제적 명성에도 불구하고 경영실패로 파산하게 되었습니다.

 

1874년 심수관은 옥광산도기제작소(훗날 심수관요)를 설립하게 되고, 동경에 지점을 내면서 판매량을 늘이고 기술개발을 통해 도자기 제조 수준을 높여나갔다고 합니다. 마침내 1893년 시카고 박람회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상을 받으면서 명성을 높이게 된 것이지요. 앞서 소개한 것처럼 그때부터 심수관이라는 명인의 이름이 세습되었고, 현재는 15대 심수관이 이곳을 책임지고 있더군요.

 

박물관을 둘러보면서 타국으로 끌려와 정착하면서 겪었을 고초 그리고 일본에 정착하여 살면서도 조선어와 이름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겪어야 했던 차별과 불이익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 힘든 조건 속에서도 일본 국내는 물론이고 세계 최고 수준의 도자기를 제작 기술을 보유하고 세계적인 명성을 지켜나가고 있다는 것도 놀라웠습니다.

 

박물관 건물의 윗층에는 작품들이 전시된 전시관이 있었는데, 도자기가 아니라 무슨 장신구나 장식품 같은 작품들이 즐비하였습니다. 생활에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라 그냥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심미적인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그런 도자기들이었습니다

 

흙을 가지고 사람의 손으로 어떻게 저런 도자기를 만들 수 있을까 싶은 작품들로 가득하였습니다. 얼마나 많은 시간 동안 얼마나 열심히 기술을 연마하면 과연 저런 작품을 사람 손으로 만들 수 있을까 생각하면서 감탄사를 연발할 수밖에 없더군요.

 

박물관 건너편에는 판매장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머니 사정이 넉넉치 못한 제가 살 수 있는 작품은 없더군요. 눈으로 보고 구경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시실에 있는 작품들과는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나더군요. 생활용 도자기와 작품용 도자기의 차이라고 할 수 있겠더군요.

 

심수관요를 둘러보고 나와 근처에 있은 도고 시게노리(동향무덕,東鄕武德, 1882-1950)의 동상을 보러 갔습니다. 워낙 가까운 거리에 있어 걸어서 이동하였는데, 마을 안쪽 넓은 공원 같은 곳에 꼬장꼬장한 노신사의 동상 하나가 서 있더군요. 그가 바로 박무덕이라는 조선 도공의 후예이면서 두번에 걸쳐 일본 외상을 지낸 도고 시게노리였습니다.

 

그는 심수관과 함께 백토를 발견하고 사쓰마 도기의 번영을 일으키는데 크게 기여하였던 박평의의 후손이었습니다.  네 살 무렵 그의 아버지가 도고 야치로 가문에 입적하면서 일본 이름을 갖게 되었고, 도쿄대학 독문과를 졸업한 후에 외교관의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중국의 봉천 스위스, 독일 등에서 근무하였으며 외교관으로서 입신한 끝에 2차 대전을 일으킨 도죠 히데키 내각의 외상까지 오르게 됩니다.

 

이때부터 도고 시게노리는 현재의 심수관요가 있는 나와시로가와의 '빛나는 별'이라고 불리기 시작했다고 하더군요. 전쟁 막바지인 1945년에는 스스키 내각의 외상이 되어 정전협상에도 참여하였다고 합니다. 그는 태평양 전쟁의 전범으로 감옥에서 생을 마감하였다고 하더군요. 그의 인생 역정을 듣고보니 그에게는 조선인의 후예라고 하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었을 것으로 짐작되더군요.

 

조선 도공의 후예로 한 마을에서 자랐던 심수관과 도고 시게노리(박무덕)은 참으로 다른 삶을 살았으며, 한국인의 입장에서 볼 때는 참으로 대비되는 인물이기도 하더군요. 조선 도공의 후예인 심수관은 말과 이름을 지키면서도 세계 최고 수준의 심수관요로 명성을 얻었고, 박씨 성을 버린 조선 도공의 후예로 일본의 최고 관료가 된 도고 시게노리는 전범으로 감옥에서 생을 마감하였으니 말입니다.

 

양국 관계가 선린우호적인 관계였다면 이들의 삶도 훨씬 더 나았을텐데, 국가간의 불행한 역사가 개인의 삶을 참으로 기구하게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무리 그가 조선인의 후예였다고 해도 박무덕 외상이라는 이름은 한 없이 낯설게 느껴지고, 도고 시게노리라는 전범으로 기억될 수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오마이뉴스

15.07.17 18:14l

이윤기(ymcam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