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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dden Hero〕 독립운동의 요람 '연해주(沿海州)'

Paul Ahn 2024. 8. 17. 17:11

Hidden Hero〕 독립운동의 요람 '연해주(沿海州)'

(yna.co.kr)

 

러시아 공식 문서에는 한민족이 연해주에 살았다는 기록이 1864년에 등장한다. 그해 9 21일 남우수리스크 포시에트지구 노브고로드 경비대장인 레자노프는 상급 지휘관인 해군 소장 카자케비치에게 "함경도 무산 출신 최운보와 경흥 출신 양응범이 이끄는 14가구 65명이 올 1월 이주해 포시에트의 지신허(地新墟·치진헤) 마을을 개척하며 농사를 짓고 있다"고 보고했다.

 

 

@지신허(地信墟) 마을

지신허는 1863년 이후에 러시아 이주 한인이 모여 산 최초의 한인 마을이다.

두만강 주변에 살던 조선인들이 국경을 넘어 연해주로 들어간 것은 1860년 이전부터 이미 흔한 일이었다. 다만 기록에 의하면, 영구 정착을 목적으로 연해주로 이주한 것은 1863 12월 쯤이다. 함경도 무산 출신인 최운보(崔運寶)와 경흥 출신인 양응범(梁應範)이 농민 13가구를 이끌고 처음으로 러시아 포시예트(Posyet) 구역에 정착하면서 지신허 마을을 개척하였다.

 

한인들은 러시아의 국유지에 집을 짓고 살면서 자신들을 보호해 줄 것을 러시아 수비대 초소대장에 호소하였다. 연해주 군무지사였던 카자케비치(P.V.Kazakevich)는 수비대에게 한인의 정착과 보호를 명령하였고, 그 뒤 지신허 마을을 중심으로 티진헤강 주변에 대한 개척이 본격화하였다.

 

지신허 마을은 1864년에 60가구 308명이 살았지만, 1868년에는 165가구로 늘었고,1869년에는 766가구가 거주하는 대표적인 한인 마을로 성장하였다. 1882년에는 조선 관료인 김광훈(金光薰)과 신선욱(申先郁)이 지신허 마을을 방문하였다. 그에 의하면, 마을은 남북으로 수십 리, 동서로 4~5리 였는데, 집들이 즐비하였으며 서양인이 세운 초소와 함께 서양인이 설립한 기숙학교인 서학서숙(西學西塾)이 있었다고 한다. 1900년대에는 인구가 1,600명을 웃돌았으며, 마을 출신의 의병활동가들이 마을에서 활동 자금과 의병을 모집하곤 했다고 전한다.

 

1937년에 스탈린이 한인들을 강제 이주 시킨 뒤, 러시아 농민 집단농장으로 바뀌었다.

 

@연추(延秋) 마을

1869년에는 조선 북부 지방에 홍수로 인한 '기사흉년'이 발생해 함경도 농민 6500여 명이 대거 이주했다. 이들은 주로 지신허 마을에서 서쪽으로 14㎞ 떨어진 연추 강변으로 옮겨 정착하였다.

 

연추는 러시아 연해주에 있었던 한인 마을이다. 시모노보, 얀치헤(延秋, 煙秋, 烟秋)라고도 한다. 마을의 이름은 마을 옆을 흐르는 강인 연추하(延秋河)를 따서 붙였다산골짜기를 따라 동서로는 6~7, 남북으로는 27리 정도의 넓은 평지에 집들이 흩어져 있는 농촌 마을이다. 중국의 훈춘(琿春)에서는 남쪽으로 30리 가량 떨어져 있고, 지금은 크라스키노(Краскино, Kraskino)라고 불리는 러시아의 군영인 노보키예프스키(Новокиевский, Novokiyevskiy)에서 북쪽으로 10리 거리에 자리하였다. 강변의 기름진 땅을 경작지로 삼았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난 뒤, 1923년 중연추 마을이 집단 농장으로 개조되었다. 1937년 카자흐스탄의 크즐오르다로 마을 주민이 강제 이주되면서 상연추 마을도 폐쇄되었다. 1972년에 하연추 마을 이름을 러시아어인 추카노보로 바꾸었다.

 

 

◇ 착취·기근 피해 '신천지'로 건너간 조선인들

 

러시아인들은 자국으로 이주한 조선인을 '코리안'이라는 뜻의 '카레이츠' 혹은 '카레이스키'라고 불렀다. 당시 국호는 조선이었지만 서양에서는 코리아라고 불렀으니 한인들도 러시아인이 부르던 말을 직역해 조선인 대신 고려인을 자처했다.

 

'유라시아 고려인 150-디아스포라의 아픈 역사'의 저자인 원로 언론인 김호준 씨는 "한인이 연해주로 집단 이주한 것은 미국 하와이 농업이민보다 40년 앞선 우리 민족 최초의 해외 개척사"라고 평가했다.

 

'고려인 러시아 이주 150년 한반도 한민족 통사-까레이스키'를 펴낸 이창주 상트페테르부르크국립대 석좌교수는 "연해주가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신천지여서 소작이 아닌 자기 경작을 할 수 있었고, 일본인이나 중국인보다는 러시아인에게 적대감이 적어 연해주를 선호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개척리(開拓里) 와 신한촌(新韓村)

1863년 최초로 연해주에 한인들이 이주하기 시작했으며, 1865년 니콜리스크(현재의 우스 리스크)에 신한촌이 형성되었다. 1860~1870년대에는 하바롭스크, 사만리, 블라디보 스톡에도 한인촌을 개척했다.

 

1904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 제국은 1905 7월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미국으로부터 일본 제국의 한국에 대한 종주권을 인정받았으며, 8월에는 제2차 영일동맹을 통해 영국으로부터도 한국에 대한 지도 감리 및 보호의 권리를 인정받은 뒤,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을사늑약(乙巳勒約, 1905 11 17)을 강제하여 체결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군대가 해산되고 의병 운동이 탄 압을 받자 급격하게 정치적 망명이 증가하여 최소 6만 명에서 최대 20만 명의 한인이 러 시아에 거주한 것으로 추정한다.

 

1910년을 전후하여 항일민족운동가들이 망명길에 올랐을 때에 개척리는 이미 연해주 일대의 독립운동 기지로 주목을 받았다. 신채호(申采浩, 1880∼1936), 홍범도(洪範圖, 1868∼1943), 유인석(柳麟錫, 1842∼1915) 등이 개척리로 모였고, 계동학교(啓東學校)를 비롯한 여러 한인 학교가 자리하였으며, 해조신문(海朝新聞), 대동공보(大東共報) 등의 한인 언론기관도 있었다.

 

하지만 1911 5월에 러시아 당국은 블라디보스토크에 유행한 콜레라를 근절시킨다고 하면서, 개척리를 강제로 철거한 뒤 러시아 기병대의 주둔지로 만들었다. 개척리에 살던 한인들에게는 블라디보스토크시의 서북쪽에 자리한 새 이주지로 이주하도록 명령하였다. 개척리 북쪽 언덕 너머에는 200여 호가 거주하는 새로운 한인촌이 만들어졌고, 그것은 구개척리와 구분되어노바야 카레이스카야 슬라보드카인 신개척리(新開拓里)로 불렸다. 그 뒤 신개척리는 신한촌(新韓村)으로 바뀌어 불리면서 한인 사회의 새로운 중심지로 기능하였다.

 

그 당시 고려인에 대한 러시아 당국의 태도는 들쭉날쭉했다. 고려인의 뛰어난 근면성과 농사 기술을 높이 사 농경지 개발에 이용하려는 총독이 있는가 하면, 고려인들이 토지에 대한 집착이 강하고 집단의식이 높다는 점에 우려를 표명하며 반고려인 정책을 취한 총독도 있었다.

 

 

"빼앗긴 국권 되찾자" 영웅들의 활동무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1910년 강제합병이 이뤄지던 시기를 전후해서는 빼앗긴 국권을 되찾고자 우국지사들이 대거 건너가 연해주는 항일독립운동의 요람이 됐다.

 

 

@이범윤

간도관리사를 지내다 의병을 조직해 일본군과 싸우던 이범윤은 러일전쟁 직후 연해주로 옮겨 국내 진공작전을 폈고,

 

@안중근

안중근도 이범윤과 함께 전투를 펼치다가 이토 히로부미 처단 계획을 세워 거사에 성공했다.

 

@이상설과 이위종

만주에 서전서숙을 세워 항일지사를 길러내던 이상설은 헤이그 특사의 임무를 마친 뒤 연해주에서 권업회와 동지회를 결성하고 대한광복군정부를 세우는 등 애국혼을 불살랐다. 그와 함께 헤이그 특사로 파견된 이위종도 한때 이곳에서 숙부 이범윤과 함께 활동했다.

 

@이동휘와 이동녕

북간도에서 민족의식을 고취하며 국권 회복을 꾀하다가 일제의 위협이 노골화하자 연해주로 옮겨 이상설 등과 독립투쟁을 이끌었다.

 

@홍범도

봉오동 전투의 영웅 홍범도는 연해주와 만주를 넘나들며 일본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최재형

러시아 이민 초기 연해주에 정착해 사업을 벌인 최재형은 모은 돈과 구축한 네트워크로 독립운동과 민족교육의 든든한 후원자가 됐다.

 

 

◇ 신한촌·자유시 참변 거치며 독립군 세력 약화

 

1917년의 러시아혁명은 연해주 한인사회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이동휘를 비롯한 민족주의적 사회주의자들과 김알렉산드라·오하묵 등 한인 2세 볼셰비키 당원들은 1918 5 13일 아시아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인 한인사회당을 결성했다.

 

사회주의 계열의 한인 의병들은 러시아혁명군(적군)에 가담해 그해 4월 블라디보스토크에 상륙한 일본군과 싸웠다. 1919 3·1운동 이후 독립군 세력이 속속 연해주에 집결하자 1920 4월 일본은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을 급습해 한인 300여 명을 학살하고 방화와 파괴를 저질렀다. 이른바 '4월 참변(신한촌 참변)'으로 이때 최재형이 붙잡혀 총살됐다.

 

1921 6월에는 국제공산주의 조직 코민테른의 지원을 업은 고려공산당(이르쿠츠크파)과 한인의 지지가 두터운 민족주의 계열의 한인사회당(상하이파)이 주도권 다툼을 벌이던 중 적군과 이르쿠츠크파가 상하이파를 공격해 300명 넘게 숨졌다. 이 사건이 '자유(스보보드니)시 참변(흑하사변)'이다. 이로 인해 독립군 세력이 크게 약화됐다. 더욱이 1922년 일본군이 물러나자 적군은 갑자기 태도를 바꿔 독립군을 무장해제했다.

 

 

◇ 고려인 20만명까지 불어나신문·학교·극단도 등장

 

독립 열기는 퇴조했지만 연해주로 이주하는 한인은 더욱 불어났다. 1930년대 무렵에는 20만 명 넘게 거주하는 것으로 추산됐다. 고려인의 집단 거주지에는 한글 신문과 잡지가 발간되고 공연단체도 등장했다. 아마추어 공연단체들을 토대로 1932년 창단된 것이 지금도 카자흐스탄에서 명맥을 잇고 있는 고려극장이다.

 

한국어로 교육하는 학교도 곳곳에 설립돼 고려인 교사들을 가르치는 사범대까지 생겨났다. 1922년에는 45개이던 한인 학교가 1927년에는 267개로 늘어났다.

 

벼 재배의 북방한계선을 높여놓은 것은 전적으로 고려인들의 공이다. 기록상으로는 1905년 연해주에서 본격적인 벼농사가 시작된 것으로 나타나 있다. 러시아인들은 수리시설도 없는 황무지에서 벼농사를 지으려는 것을 무모하게 여겼지만 고려인들은 보란 듯이 성공했고 끈질긴 노력으로 박토를 옥토로 바꿔나갔다.

 

1928년에는 벼농사조합도 탄생했다. 당시 벼 재배 농부 11378명 가운데 러시아인이 1196, 중국인이 6명이고 나머지는 모두 고려인이었다. 1925년 세워진 10개년 계획을 보면 벼 재배 면적을 1926 13천㏊에서 1936 94천㏊로 늘리는 것을 목표로 삼았는데, 이는 고려인들의 이주와 개간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 한인 강제이주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스탈린 정권은 일본의 첩자가 될 수 있다는 이유로 한인의 강제이주를 결정했다. 또한 한인 지도자 2 5백 여명을 첩자로 누명 씌워 숙청했다. 연해주 일대에 흩어져 살던 우리 민족 17만 명은 모두 라즈돌리나야 역으로 집결되었고, 목적지도 모르는 채 빈 손으로 쫓기듯 지붕도 없는 가축용 화물열차에 올라탔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는 혹한 속에 40일간 6천 킬로미터를 내달렸고, 추위와 굶주림으로 인해 절반 이상이 사망했다. 살아남은 이들의 종착지는 중앙아시아의 황량한 벌판이었다. 우리 민족은 땅굴을 파고 엄동설한을 견디며 황무지를 개간하여 삶을 이어갔다.

 

 

◇ 러 극동 연해주, 북러 밀착 '가늠자' 부상

 

러시아에서 유일하게 북한과 국경이 맞닿은 연해주에서는 최근 들어 북한과의 교류·협력 강화를 위한 준비가 여러 방면에서 이뤄지고 있다.

 

양국은 인적 교류 확대의 첫걸음인 관광객 방문 활성화를 위해 이미 개방된 하늘길에 이어 연해주로 연결되는 육로와 바닷길 활용에도 관심을 두고 있다.

 

지난달 올레그 코제먀코 연해주 주지사는 올해 안에 하산 역과 북한 나진항으로 오가는 여객 철도 노선을 개통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북러는 교역 증대 등을 위해 양국 국경인 두만강에서 추진했던 자동차 전용 국경 다리 건설 재개 방안도 논의하고 있다.

 

이밖에 연해주 정부는 북한 농민에게 농업용지 일부를 제공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며, 최근 북한 농업기술 대표단도 러시아를 방문했다.

 

한때 한국 신북방정책의 핵심 요충지였던 극동 연해주가 아이러니하게도 국제사회가 우려하는 북러 밀착의 중심 공간으로 변한 요즘이다.

 

연합뉴스

heeyong@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