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신백화점(和信百貨店) 1931 ~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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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치 : 서울특별시 종로구 공평동 (현재 종로타워 자리)
• 운영기간 : 1931년 ~ 1986년 2월
• 주요인물 : 신태화, 박흥식
- 화신백화점(和信百貨店)은 일제 강점기 국내 자본으로 운영되던 최초의 백화점으로, 운영법인은 화신산업이었다.
- 1918년 신태화가 '화신상회'를 설립하였고, 1931년 박흥식이 인수 후 1935년 화재로 1937년 11월에 지하 1층, 지상 6층의 현대식 백화점 건물을 세워 백화점의 모습을 갖추었으며, 이로해서 청계천을 대칭축으로 하여 종로의 조선, 황금정(을지로)의 일본 상권이라는 양대축을 완성했다.
1935년 준공한 화신백화점, 박길룡 설계
〈매장구성〉
〈신태화의 화신상회〉
- 조선시대부터 종로는 육의전을 중심으로 길가에 시전행랑들이 늘어선 상업의 중심지였다. 그 한복판인 종각 맞은편에는 중국산 비단을 취급하던 선전이 있었는데, 한때는 육의전 중 최고라고 불렸던 선전은 임오군란 후 중국인 상인들이 서울에 들어와 직접 물건을 팔았던 장소이다.
- 이 자리에 1890년대 말 신태화란 상인이 신행상회란 이름의 귀금속 상점을 열었다가 1918년 자기 이름의 '화'와 신행상회의 '신'을 따서 상점 이름을 바꾼다. 바로 '화신상회'의 시작이었다.
- 종로를 기반으로 화신상회는 꾸준히 성장해 1922년에는 서울에서 가장 큰 귀금속 상점이 되었으며, 주력인 귀금속 외에도 여러 잡화를 취급하며 사실상 준 백화점에 가까운 모습을 보이게 된다.
화신상회와 신태하
〈박흥식과 최초의 국내자본 백화점 탄생〉
- 1931년, 화신상회의 경영권은 박흥식에게 넘어가게 된다. 박흥식은 지물사업을 기반으로 자신의 사업을 확장하면서 화신상회에도 자금을 대고 있었는데, 화신상회가 경영난을 겪게 되자 구조조정을 이유로 신태화에게 화신상회를 주식회사로 전환하는 한편 자신의 채권을 주식으로 바꿀 것을 요구한 것. 계획대로 화신상회가 주식회사로 전환되자 박흥식은 자신의 주식을 기반으로 곧바로 화신상회의 경영권을 장악하고, 원래 목조건물이었던 화신상회를 3층 콘크리트 건물로 새롭게 지었다.
- 1932년, 화신상회의 바로 옆에 동아백화점이 세워지면서 양 업체 사이에 치열한 경쟁이 벌어졌으나, 방만했던 경영과 무엇보다도 집 1채를 경품으로 걸어버리는 경쟁자 화신상회의 패기에 버티지 못한 동아백화점이 개점 6개월 만에 화신상회에 인수합병되는 것으로 승부는 싱겁게 끝나버렸고 기존 화신상회 건물과 동아백화점 건물은 서로 연결되어 각각 서관, 동관이 되었다.
- 4년 뒤인 1935년 1월 27일에 화신백화점 서관에서 불이 나 전소된 후 박길룡의 설계로 1937년 11월에 지하 1층, 지상 6층의 현대식 백화점 건물이 세워졌는데, 이는 당시 서울에서는 가장 높은 건물이었으며, 내부에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가 설치되고 옥상에 전광뉴스판이 설치되어 있었다.
- 당시 일본계 백화점인 미쓰코시백화점(三越百貨店)과 조지야백화점(丁子屋百貨店) 미나카이 등이 있었으며, 일본계 백화점의 성세를 보면서 백화점사업에 진출하려는 야심을 갖고 있던 박흥식은 새로 창업하기보다 기존 업체를 인수하는 방법을 선택했고 ‘화신상회 매수공작’을 모색했다. 이에 경제공황 때 자금 유동성 위기에 봉착한 신태화에게 자금을 빌려주고 1931년 인수했다..
- 일제강점기 조선인 백화점을 대표했던 화신백화점은 폭리와 면포·비누 등 필수물자 불법유통으로 적발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으나, 조선인 백화점으로서는 선두 자리를 지켰다.
〈해방 이후〉
- 1945년 8.15 해방이 되면서 종업원들이 좌익성향 자치위원회를 만들어 친일파 박흥식 사장 대신 화신백화점을 장악했다. 10월 4일부터 백화점 재조직을 위한 요구 사항을 내걸고 박흥식과 협상을 벌였으나, 협상은 실패하고 12일에는 미군정에 의해 자치위원회가 와해되면서 화신백화점은 다시 박흥식의 손아귀로 돌아갔다.
- 그렇지만 화신백화점 평양점은 북한땅에 있었기 때문에 국영화되어서 평양 제일백화점이 되었고 현재까지도 운영되고 있다. 1946년에는 (주)화신에서 분사되어 독립법인이 되기도 했다.
- 한국전쟁으로 백화점 내부가 불타고 물자가 부족하여 백화점 직영이 곤란해져 1950년 10월부터 일반에 임대운영된 바 있었다. 같은 해에 화신백화점 법인도 (주)화신에 다시 합병되어 '화신산업'으로 출범했다.
- 1955년 11월 15일에 화신산업은 종로1가 화신백화점 근처에 자매백화점 '신신백화점'을 개점했다. 신신백화점 건물은 당시로는 드물게 넓은 유리창을 많이 달고 있었고, 헐리기 전까지 서울시내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오래된 가건물이었다.
- 1950년대 백화점 상권은 중앙백화점이 변신한 미도파가 선두를 지키는 가운데 화신과 신신이 그 뒤를 따르는 형세를 유지했다. 이들 백화점에는 당시 고급 소비품인 시계점·안경점·귀금속점 등 전문업체가 들어서 있었다. 1961년 서울의 백화점 수는 7개에 불과했지만 그 매상고는 1960년 현재 44억원, 1961년 82억원으로, 1958년 시장에서의 매상액이 32억원인 것에 비교해 보면 매우 규모가 컸음을 알 수 있다.
- 1961년 5.16 쿠데타 이후 군정에 의해 ‘재건국민운동' 여파로 7월 15일부터 외래품 판매금지가 실시되었고, 10월 1일부터 정찰제가 실시되었다.
〈화신백화점의 몰락〉
화신백화점은 1970년대를 기점으로 몰락하기 시작했고, 1978년 청천벽력같은 소식이 들려온다. 종로 확장계획과 맞물려 공평동이 도심재개발 사업 지역으로 지정되면서, 백화점 건물 면적의 절반이 도로확장 예정 부지에 포함된 화신백화점이 철거 대상에 오르게 된 것이다.
이 소식에 주요 일간지를 비롯한 언론과 전문가들이 철거를 반대하는 의견을 피력했지만 시대가 시대였고, 게다가 안 그래도 몰락중인 상황에서 1979년 소공동에 롯데백화점이 개점하면서 자금난은 가속화되었다.
끝내 결정적으로 건물주인 화신그룹도 무리한 사업확장까지 겹치며 이듬해에 해체되었고, 몇몇 사람을 거쳐 1986년에 최종적으로 한보그룹이 화신백화점의 주인이 되었다. 어쨌든 철거는 기정사실이 된 상황에서, 한보그룹은 그 자리에 새로운 백화점 신축계획을 세웠으며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친 끝에 건축가 김무언의 설계안이 확정되었다. 김무언의 설계안은 이왕 건물을 원형보존할 수 없다면 새로 짓되 적어도 구 화신백화점 건물의 전면부, 그러니까 파사드만 남긴 뒤 이를 신축 건물에 대입하는 방식 으로 화신백화점의 장소적 역사성을 살려보려는 의도가 담긴 것이었다.
그러나 1987년 부지 소유권이 동방생명으로 넘어간 후 마침내 신규 건축 허가가 떨어지면서 화신백화점은 폐업되고 그 해 철거가 시작되었다.
폐점 이후에도 1990년대까지 『화신앞』이라는 지명을 사용했을 정도였다. 여담으로 드라마 야인시대에서도 나왔었다. 김두한이 생애 처음으로 양복을 빼 입고 문영철, 김무옥과 함께 백화점 문을 나서는 그 장면이다.
▒ 동아백화점
- 1932년, 화신상회의 바로 옆에 동아백화점이 세워지면서 양 업체 사이에 치열한 경쟁이 벌어졌으나, 방만했던 경영과 무엇보다도 집 1채를 경품으로 걸어버리는 경쟁자 화신상회의 패기에 버티지 못한 동아백화점이 개점 6개월 만에 화신상회에 인수합병되는 것으로 승부는 싱겁게 끝나버렸고 기존 화신상회 건물과 동아백화점 건물은 서로 연결되어 각각 서관, 동관이 되었다.
▒ 신신백화점
- 1955년 11월 15일에 화신산업은 종로1가 화신백화점 근처에 자매백화점 '신신백화점'을 개점했다. 신신백화점 건물은 당시로는 드물게 넓은 유리창을 많이 달고 있었고, 헐리기 전까지 서울시내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오래된 가로 건물이었다.
신태화와 박흥식一家 / 근대 한국의 자본가들
http://www.ilyoseoul.co.kr/news/articleView.html?idxno=127999&replyAll=&reply_sc_order_by=I#reply
- 금은세공업자에서 화신백화점 창업주가 된 사연 -
자본주의는 어떤 과정을 통해 한국에 정착될 수 있었을까? 자본주의가 이 땅에 뿌리내릴 수 있게끔 활발하게 자본주의적 경제 활동을 벌인 인물로는 누구를 꼽을 수 있을까?
초기 한국 자본주의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묻고 넘어가야 할 질문들이다. 그러나 초기 한국 자본주의에 대해서는 여전히 식민지 근대화론과 내재적 발전론을 둘러싼 논란만 부각될 뿐, 정작 탐구해야 할 위의 문제들은 상대적으로 소홀하게 다뤄지는 듯하다.
그동안 ‘한국근대자본가연구(2002)’ 등의 저작을 통해 한국 자본주의 연구에 천착해온 저자 오미일은 근대의 다양한 자본가 군상을 그들의 사회적 신분이나 배경, 자본 축적 토대와 경로 등 몇 가지 기준에 의해 분류하여 각 유형의 대표적인 자본가들을 분석하는 작업을 진행해왔다.
2014년 3월 출간했던 ‘근대 한국의 자본가들―민영휘에서 안희제까지, 부산에서 평양까지’는 그 결과물이다. [일요서울]은 이 책을 통해 자본주의의 정착과정을 재구성해본다. 그 다섯 번째는 ‘금은세공업자에서 화신백화점 창업주로 성공한 신태화家’다.
일반적으로 화신백화점하면 대개 박흥식을 연상한다. 그러나 실상 화신상회를 창립한 이는 신태화이며, 박흥식은 자금 대부를 빌미로 이를 갚지 못하자 대신 차지했던 것이다.
박흥식
미쓰코시, 조지아, 미나카이 등 일본계 백화점의 성세를 보면서 백화점사업에 진출하려는 야심을 갖고 있던 박흥식은 새로 창업하기보다 기존 업체를 인수하는 방법을 선택했고 ‘화신상회 매수공작’을 모색했다. 이에 경제공황 때 자금 유동성 위기에 봉착한 신태화에게 자금을 빌려주고 1931년 인수했다.
주식회사체제로 변경한 후에도 3년여 동안 신태화를 회장으로 추대한 것은 화신상회의 전통을 계승했다는 기업 이미지를 부각시키는 한편 ‘매수공작’의 소문을 의식해 이를 무마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박흥식은 화신상회를 토대로 (주)화신, 화신연쇄점, 화신무역 등 화신왕국을 건설함으로써 ‘백화점 왕’으로 불렸다.
신태화는 한말~1920년대 격변의 경제상황 속에서 금은세공업계의 ‘패왕’이라 불린 신행상회를 남대문통에 설립 경영하고, 이후 백화점의 대명사로 불린 화신상회를 창립한 인물이다. 그는 1877년 서울 남촌 무반가에서 독자로 태어났다. 가세가 기울자 13세 때 종로 금은방 사원으로 취직해 집안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그가 직공으로 출발해 자본을 모아 소공업체를 자영하다가 마침내 공장을 설립·경영하는 과정은 자본 축적의 새로운 양상과 경로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종래 지주·상인 자본의 제조업 투자나 자본전환에 대한 연구가 주로 이루어져온 반면, 수공업자·기술자 출신의 자본 축적 과정에 대한 분석은 많지 않다.
1902년 무렵 중곡염직공소를 설립한 직물업계의 김덕창과 함께, 신태화는 수공업자 출신으로서 기업가로 성장한 사례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신태화의 자본 축적 과정은 재벌 자본가의 경영 활동의 부침이 당시의 경제주기 및 상공업 동향과 어떻게 관련되고 있었는가를 알려준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자본 축적의 수준과 그 의미
그러면 신태화가 축적한 자본은 어느 정도였으며 최대 자본을 축적한 시기 또는 축적속도가 가장 빨랐던 시기는 언제인지 등의 자본 축적 상황에 대해 살펴보자.
그는 13세부터 직공으로 일하여 약 6년 만인 19세에 40원을 모아 이를 기반으로 조그만 가내 공업체를 영위할 수 있었다. 그로부터 약 13년 동안 축적한 4000원의 자본과 동업자 김연학의 4000원을 합쳐 32세에 비로소 소공업체를 확대해 공장(신행상회)을 설립했다.
일정한 자본력을 갖춘 신행상회는 그 자본 축적 속도가 소공업체 시기보다 매우 빨랐으니, 1908년 창립 시의 8000원은 1911~1915년 기간에 1만5000원, 그리고 1918년 이전 무렵 14만 원에 달했다. 그러면 신행상회에서 분리하기 전인 1918년 초 무렵 신태화의 개인 자산은 어느 정도였을까? 일단 신행상회 자본금의 절반인 7만 원은 그의 자산으로 봐야 한다.
그리고 1917년께 신태화 소유 경성 지역 부동산의 대지 가격을 시가(건물가 미포함)로 계산한 결과 최대 3만 1265원에 달했다. 그러므로 신행상회 자본금과 파악된 부동산을 합하면 10만원에 조금 미달하는데 여기에 현금과 경성부 교외 소재 부동산 등을 합하면 적어도 15만 원 정도는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추론은 독자적 사업체인 화신상회의 1919년께 자본금이 15만 원인 사실로도 뒷받침될 수 있다. 이를 통해 신태화는 화신상회에 거의 대부분의 자산을 투자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화신상회의 초기 자본금은 15만 원이었는데 이후 1920년대에는 어느 정도의 자본을 축적했을까?
1927년께의 자료에서는 20만 원 정도라고 했는데 이는 불확실한 추정치이므로 검토를 요한다. 화신상회의 경영이 악화된 시점은 1930년 무렵 일본흥신소 경성지점이 조사한 바에 의하면 신태화의 1년간 상거래액은 80만 원이며, 재산 내역은 부동산 15만 원 기타 자산 26만3000원이고, 실질 자산은 14만 원이었다. 그렇다면 부채가 26만3000원이었던 셈이다.
따라서 그는 1920년대에 20만 원 이상의 실질자산을 축적했으며 이는 1920년대 말 1930년대 초 공황을 거치면서 14만 원 내외로 축소되었다고 추론할 수 있다. 요컨대 화신상회 설립 후 1920년대 중반에 거래액 확대에 따라 외형적 자산이 크게 확대되었으나 실질 자산의 팽창은 그리 크지 않았던 셈이다.
그의 20만 원 자산의 상당부분을 축적한 시기는 바로 1916~1918년 무렵이었다. 이렇게 볼때 신태화의 자본 축적 사이클은 경제 주기 사이클과 거의 같은 궤적으로 움직였음을 알 수 있다. 즉 1915~1918년 호황기에 매우 빠른 속도로 자산의 대부분을 축적했고, 불황기였던 1920년대에는 사업 확장으로 오형 자산을 팽창했으나 자본 축적 속도는 상대적으로 더뎠으며 실질자산의 증가도 크지 않았다.
또 신태화의 사회적 활동은 두드러지지 않은 편이다. 1920년 동양염직주식회사를 설립한 김덕창은 기업 경영과 관련된 사회 활동이 필요함을 인식하고 재계·사회계 인사들과의 교류에 적극적이었던 반면, 신태화는 경제 영역의 경영 활동에 국한했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금융권의 지원을 보장받거나 재력가의 확보에 의해 투자를 유치하고, 혹은 경제 관련 정보를 획득하는 데에 현실적인 처세술이 아니었다. 다양한 사회세력과의 연계를 통해 조선인 자본의 성장을 모색한 김덕창의 경제운동과 주요 은행의 지배인들로부터 전폭적인 금융 지원을 받음으로써 급성장할 수 있었던 박흥식의 ‘능수능대한 교제술’에 비교해 신태화의 ‘진충과 신용’은 식민지 중소기업가 앞에 가로놓인 벽을 뛰어넘기에는 나약한 관념이 아닐까? 하는 의문을 갖게 만든다.
일요서울i
2016-02-22
이범희 기자 skycros@ilyoseoul.co.kr
종로에서 일본 자본과 겨뤄 백화점 시대 열다
1930년대 일본 백화점들의 득세 속에서 박흥식은 화신백화점을 열어 일본 상권의 종로 진출을 막고자 했다. 일본에서 직접 물건을 들여오고 통 크게 사은행사를 벌여 조선 4대 백화점이 됐으나 광복 후 친일파로 지목되는 등 그의 시대는 저물었다. 결국 1980년 부도를 맞아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졌다.
1930년대 경성(서울)에 백화점 열풍이 불어 닥쳤다. 사람들은 형형색색의 근대를 전시하는 쇼윈도를 통해 백화점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패션, 화장품, 귀금속, 시계, 카메라, 전화기 등 고급스럽고 이국적인 명품들이 남녀 고객들을 유혹했다. 자녀를 데리고 온 가족 단위 손님들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한식, 일식, 양식을 모두 갖춘 식당으로 올라갔다. 오늘날 백화점과 크게 다를 바 없는 풍경이 식민지 조선에 펼쳐진 것이다.
조선총독부에서 밀어주는 일본 백화점들이 기세를 올렸다. 미츠코시백화점이 선두주자로서 첨단 유행을 선도했고, 뒤에 들어선 미나카이백화점은 최대 규모를 자랑했다. 소비자 유치 경쟁에서 조선 상인들은 속수무책으로 밀리고 있었다. 당시 경성에서는 진고개(을지로, 충무로, 명동)의 일본 상권과 종로를 중심으로 한 조선 상권이 맞서고 있었다. 백화점을 앞세운 일본 자본의 공세는 조선 상권을 고사 위기에 빠뜨렸다.
이렇게 되자 조선 상인들도 백화점 창업으로 맞불을 놓았다. 화신백화점은 1932년 5월 종로 기독교청년회관 인근에 문을 열었다. 사장 박흥식은 종이 유통으로 돈을 번 인물이었다. 그는 화신을 키워 일본 상권의 종로 진출을 막고자 했다.
◇대담한 상술로 일본 백화점과 경쟁
백화점 업계에 발을 들인 박흥식은 우선 조선 상권의 주도권을 노렸다. 화신백화점 바로 옆에는 몇 달 전에 개업한 동아백화점이 있었다. 고물상 출신 사업가 최남이 세운 이 백화점은 미모가 출중한 여점원들을 대거 고용해 세간의 화제가 되었다. 화신은 이웃집의 미인계부터 상대해야 했다.
‘숍걸’은 1930년대 백화점의 꽃이었다. 여성이 일자리를 얻기가 쉽지 않은 시대였다. 백화점들이 경쟁적으로 여점원을 뽑자 지원자들이 대거 몰렸다. 숍걸 채용 기준은 어땠을까. 잡지 ‘별건곤’ 1934년 5월호에 업계 선두인 미츠코시백화점의 사례가 실렸다. “주로 여상을 마친 점잖은 집안의 따님을 뽑는데 얼굴과 스타일이 선결 조건이었다.” 제복을 차려입고 예쁘게 화장한 여점원들이 반겨주니 남자들이 백화점으로 모여들었다. 로맨스가 피어나고 인기 스타도 탄생했다. 숍걸 마케팅은 은근히 잘 먹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박흥식은 이런 얄팍한 수단 대신 정공법을 택했다. 소비자는 싸고 좋은 상품을 찾는다는 믿음에서 출발했다. 그는 도매상을 거르고 일본으로 직접 갔다. 제품 동향을 파악하고 물건을 싸게 들여왔다. 덕분에 가성비 좋은 상품을 두루 갖출 수 있었다. 염가 할인판매도 가능해졌다. 사은행사는 통 크게 벌였다. 경품으로 서구식 주택을 내놓을 정도였다. 화신백화점은 결국 동아백화점을 인수· 합병하고 조선 상권을 장악했다.
일본 백화점들과의 경쟁에서도 밀리지 않았다. 박흥식은 선진 경영기법을 도입하고 대담한 상술을 발휘했다. 소설가와 시인에게 광고 업무를 맡겨 화신 이미지를 차별화시켰다. 경성 최초로 발행한 백화점 상품권은 큰 인기를 끌었다. 사람들이 너도나도 구입해 여기저기 선물했다. 박흥식은 성공에 안주하지 않고 고객 확대에 매진했다. 화신대식당을 오픈해 가족 고객을 유치하고, 통신판매를 개시하여 고객의 집으로 찾아갔다.
‘삼천리’ 1933년 2월호에 따르면 화신백화점의 일일 방문자 수는 11만 7천 명으로, 미츠코시백화점(12만 6천 명)에 이어 2위를 달렸다. 당시 경성 인구가 30만 명이었으니 놀라운 수치가 아닐 수 없다. 화신은 1930년대 중반에 미츠코시, 미나카이, 조지야와 함께 조선 4대 백화점의 하나로 발돋움했다. 박흥식은 일약 조선 상권의 지도자로 떠올랐다.
◇조선 상권 지키려다 친일파로 몰려
“화신이 잘되고 못 되는 것은 곧 조선 사람의 역량을 증명하는 시금석입니다.”
잡지 ‘삼천리’ 1934년 8월호에 기고한 글에서 박흥식이 주장한 바는 명확했다. 그는 ‘약진하는 조선의 화신’을 각종 광고에 내걸고 동포애를 사업의 원동력으로 삼았다. 이러한 민족주의 마케팅은 1935년 초부터 연쇄점을 추진하며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각 지역의 주요 잡화점들을 화신연쇄점으로 묶어 조선 상권 전국망을 구축한 것이다.
화신의 거침없는 행보는 화재 사건으로 잠시 주춤했다. 1935년 1월 27일 목조 4층 백화점 건물에 큰불이 나는 바람에 막대한 손해를 입은 것이다. 박흥식은 곧바로 은행 융자를 얻어 건재를 알렸다. 1937년 11월에는 종로 사거리에 신관을 새로 열었다. 지하 1층 지상 6층의 이 르네상스식 건물은 일개 점포를 뛰어넘어 조선의 명소가 되었다.
1945년 광복이 될 때까지 화신백화점의 위상은 굳건했다. 시골 학생들이 수학여행 오면 화신에 들러 신문물을 구경했다. 촌로들은 백화점에서 에스컬레이터 탄 얘기를 손주들에게 자랑삼아 들려줬다. 화신백화점 옥상의 전광판을 바라보며 경성 시민들은 뉴스와 화젯거리를 주워섬겼다. 조선 사람들의 긍지이자, 민족자본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빛이 휘황찬란할수록 그림자도 깊어지기 마련이다. 광복 이후 화신백화점은 곤경에 빠지고 말았다. 박흥식 사장이 친일파로 지목된 것이다. 1944년 비행기 공장을 만들어 일제 침략전쟁에 협조하고 그 밖에도 여러 친일단체에 이름을 올린 혐의였다. 그는 1949년 반민특위 검거 1호로 잡혀 들어갔지만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공장에서 실제로 비행기를 제작하지 않았고 친일단체 참여는 사업상 어쩔 수 없었다는 점이 참작됐다.
무죄 선고에도 불구하고 친일파 꼬리표는 떨어지지 않았다. 그것이 박흥식 사장에게는 평생의 한이 되었다. 결국 화신은 1980년 부도를 맞았고 박흥식 사장은 재기를 위해 노력하다가 1994년 향년 92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죽기 전에 자신의 한을 이렇게 토로했다.
“상인으로서 민족자본을 일으켜 조선 상권을 이뤄보려고 일본인들과 친하게 지냈을 뿐이오. 그게 친일파라면 일제강점기를 지나온 이 나라에서 지금 살아 있는 사람들은 무엇이오(강준만, ‘한국 근대사 산책’ 9권, 인물과사상사, 2007).”
해방 직후 최고갑부 박흥식의 몰락
1945년 해방 이후 등장한 거부(巨富)들은 서구식 자본주의가 도입되면서 설립한 기업의 성공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 인물들이다.
이들은 대부분 토착부호나 대지주 출신이 많았지만, 간혹 탁월한 경영능력으로 일약 ‘재벌’로 성공한 자수성가 기업인도 많았다.
이들 중 박흥식의 몰락은 그야말로 한편의 드라마였다. 평남 용강에서 태어난 박씨는 1926년 신문용지 수입업체인 선일지물, 화신백화점을 설립하면서 기업가로 변신해 막대한 부를 손에 쥐었다.
그는 당시 ‘금박명함’을 뿌려 일대 화제가 되기도 했다. 화신은 해방 이후 일본 소니와 손잡고 전자업에 진출하면서 최정상에 올랐지만, 후발주자인 삼성과 LG의 연합군에 밀린 데다 막대한 투자를 감행한 섬유업이 부채를 감당하지 못하면서 끝내 몰락했다.
정선섭<재벌닷컴 대표> chaebul@chaebul.com
종로 명물, 우리나라 최초 백화점, 화신백화점 철거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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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2월15일 종로2가에 있는 화신백화점 철거 계획이 발표됐다. 1985년 5월부터 건물을 철거하고 신축공사를 해서 1986년까지 새 건물을 완공한다고 발표했다(사진/ 화신백화점 1984.2.15.)
화신백화점 자리는 1980년에 도심재개발지구로 지정됐다. 신생, 화신산업 등 지주 20명의 토지소유자들이 재개발을 추진했다. 화신백화점 자리에는 현재 높이 133m의 지하6층 지상 33층의 종로타워가 서있다(1995년 착공, 1999년 완공)
원래 화신백화점 자리에는 1929년 9월 박흥식이 건립한 화신상회가 있었다. 화재로 소실되자, 박흥식은 1935년 거금 40만원을 투자하여, 화신백화점 건립을 추진했다.
화신백화점은 우리나라 최초의 건축사인 박길용이 설계했다. 박길용은 1919년 경기공전을 졸업하고 총독부에서 건축 업무를 했다. 박길용은 1932년 5월7일 건축사 자격증을 따고, 총독부를 나와 1932년 7월 종로 관훈동에 건축설계사무소를 열었다.
화신백화점 건립을 맡은 박길용은 연인원 3만5천명을 투입하여 2년6개월 만인 1937년 완공했다. 지하1층 지상 6층의 철근콘트리트 건물로 매장 면적 2천5백평이었다. 당시 삼월(신세계백화점)은 1천800평이었다.
르네상스식 6층 건물로 당시로서는 6.25 이전까지 서울에서 가장 큰 규모였다. 화신백화점 은 옥상에는 당시 동양 최대 길이인 20m에 달하는 전광뉴스판이 있었고,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 등 첨단기술을 적용된 건물로, 서울의 명물이었다.
건물양식 측면에서 보면 1910년부터 우리나라에 유입된 건축 양관은 르네상스식 양식이 대부분으로, 화신백화점을 포함 백화점 건물들은 르네상스식에서 근대주의로 넘어가는 과도기 양식으로 보였다.
일제 강점기에 우리나라에서 운영되던 백화점은 4개가 있었다. 일본 백화점으로 신세계백화점이 된 ‘삼월오복점’과 미도파가 된 ‘정자옥’ 이 있었고, 우리 자본으로 세워진 것으로는 종로에 화신백화점, 서울부자인 최남의 동화백화점이 영업을 했다
[헤럴드DB/ 우재복 기자 jbwoo@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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