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산모봉(黃山毛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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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모봉의 전신(前身) ‘운무차(雲霧茶)’와 창시자 사정화(謝靜和)
명대(明代)의 유명한 지리학자요, 여행가이며 문학가이기도 했던 서하객(徐霞客)은 “오악(五岳)을 돌아보고는 다른 산들이 산으로 보이지 않았는데, 황산을 보고나서 오악이 산으로 보이지 않는다.”라고 극찬하였다.
그야말로 중국 최고의 명산인 황산의 절경을 절묘하게 한 마디로 함축해 놓은 말이다. 서하객(徐霞客, 1586-1641)의 이름은 홍조(弘祖),자(字)는 진지(振之), 호(号)가 하객(霞客)이며, 강소성 강음(江陰) 사람이다. 명대 지리학자, 여행가, 문학가이다. 저술로는 30년 동안 천하를 답사하여 고찰한 것을 60만자로 저술한 《서하유기(徐霞客遊記)》가 있다.
명나라의 허차서(許次紓)는 《다소(茶疏)》에서 “천하의 명산(名山)에는 반드시 영초(靈草)가 난다.”고 했다. 여기서 영초란 영험한 풀, 즉 차(茶)를 의미한다. 중국에서도 절경이 가장 빼어나기로 유명한 황산이야 더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실제로 황산은 산수가 빼어난 만큼 그 산을 둘러싼 주변에 휘주(徽州: 안휘성)의 명차들이 집중적으로 생산되고 있는 지역이다. 둔녹차(屯綠茶), 태평후괴(太平猴魁), 기문홍차(祁門紅茶), 노죽대방(老竹大方), 황산모봉(黃山毛峰) 등이 그러하다. 뿐만 아니라 중국의 차문화를 대표하는 고대의 ‘휘주 차문화’가 그대로 잘 보존·계승·발전된 곳이기 때문에 차문화를 연구하는 다인들에게 중국 고대 차문화의 표본을 제시하기도 한다.
안휘성의 역사를 기록한 《휘주부지(徽州府志)》에 의하면, 황산에서 차가 본격적으로 생산되기 시작한 것은 송나라 인종 가우(嘉佑: 1056~1063년) 연간이며, 명나라 목종 융경(隆慶: 1567-1572년) 연간에 이르러 차업(茶業)이 흥성하기 시작했다.
즉 황산의 차 생산은 이미 천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명대에 이르러 비로소 황산차가 대내외적으로 유명해지게 된 것임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황산모봉’이란 이름은 전혀 찾아 볼 수가 없고, 청대 말기(약 1875년) 이전의 모든 문헌 기록에는 ‘운무차(雲霧茶)’란 이름만이 황산차를 대표하고 있었을 뿐이다.
청대 강징운(江澄云)의 《소호편록(素壺便錄)》에서는 “황산에는 운무차가 있는데, 아주 높은 산꼭대기에서 생산한다.”라고 하였고, 또 《황산지(黃山志)》와 명나라 허초(許楚)의 《황산유기(黃山遊記)》에는 “연화암(蓮花庵) 부근 바위틈사이에서 차가 자라는데, 향이 아주 은은하며, 고요한 운치가 사람들의 군침을 자극하는데, 이것을 ‘황산운무’라 한다. …
운무차는 산승(山僧)들이 바위틈새의 적은 흙 사이에서 재배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상의 문헌적 기록을 통해 황산운무가 불교 사찰을 중심으로 승려들에 의해 처음 재배되었음은 물론 황산모봉의 전신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다. 그래서 현지에서는 ‘황산모봉’을 일명 ‘황산운무’라고도 부른다.
《휘주상회자료(徽州商會資料)》에 의하면, “황산모봉은 청나라 광서(光緖) 연간에 ‘사유대차장(謝裕大茶莊)’에서 처음으로 창제한 것으로 이 차장을 창시한 사람은 사정화(謝靜和)이다. 사유대차장은 중국의 개혁개방 이후 다업(茶業)의 확장과 발전을 위해 ‘천명장(天茗莊)’으로 개명하였다.
흡현(歙縣) 조계(漕溪)사람으로 차업(茶業)에 종사하였다. 차장을 경영했을 뿐만 아니라, 채다와 제다의 기술에도 매우 정통하였다. 1875년 차시장의 수요에 영합하기 위해 매년 청명절에 황산 탕구(湯口)·충천(充川) 등지를 찾아 고산의 유명다원에 올라 두텁고 부드러운 찻싹을 채취하여 정교하게 차를 덖고 말리었는데, 상표를 ‘황산모봉’으로 명명하고 동북, 화북 일대에 수출하였다. 고급 ‘황산모봉’의 연생산량은 항전(抗戰) 이전에 이미 6,000킬로그램 이상에 달했다.”
사정화의 이름은 ‘사정안(謝正安)’이며 자(字)가 ‘정화(靜和)’이다. 청나라 도광(道光) 18년 12월 18일 휘주부 황산 남쪽자락에 위치한 조계촌에서 조상 대대로 차업(茶業)을 경영하는 명문 차상(茶商) 집안에서 출생하였으며 평생을 차생산과 차업 경영에 몰두하였다. ‘사유대’ 차장을 창건하여 1875년 황산모봉을 창시하고, 중국 내지와 유럽각국에 황산모봉을 수출하여 청나라 정부로부터 그 공을 인정받아 차상으로서 관직까지 두루 겸직하게 되었다.
1860년대 말기 태평천국의 난이 끝난 후, 청나라가 상무(商務) 활동에 적극적으로 힘쓰기 시작하면서 중국차를 해외로 수출하는 기구인 ‘양장(洋莊)’의 발전이 고조에 이르게 되었다. ‘양장(洋莊)’이란 당시의 무역상 혹은 수출상을 의미하는 말이다. 사정화는 운반거리가 먼 광주(廣州)보다는 비교적 가까운 상해(上海)의 ‘양장’을 거쳐 휘주지방의 차를 해외로 수출하기로 하고 상해로 가서 ‘사유대’라는 차장을 창건하였다. 그러나 이미 대내외적으로 널리 유명해져있던 서호용정, 노산운무(蘆山雲霧), 운남보이 등과 같은 명차들과 비길만한 경쟁력을 갖춘 좋은 품질의 명차가 휘주에 없음을 한탄하고는 휘주의 새로운 명차를 개발하기로 결심하게 된다.
오랜 고심을 하던 사화정은 황산의 숱한 봉우리에 올라 모든 차밭을 샅샅이 찾아 헤매게 되었으며, 그러던 중 연화암의 승려들이 바위틈에서 재배하고 있는 ‘황산운무차’를 발견하고는 이 차를 황산차를 대표하는 명차로 개량·발전시키기로 결심하고 직접 산에 올라서 채다(采茶)와 제다(製茶), 그리고 생산량과 판매에 이르기까지 온갖 정성과 심혈을 기울여 실험하고 연구한 끝에 드디어 1875년 ‘황산모봉’을 탄생시키게 되었다.
제품으로 완성된 찻잎은 하얀 솜털같은 백호(白毫)로 덮여있고, 찻싹의 끝이 뾰족한 게 마치 산봉우리 같았으며, 그 생산지가 황산원(黃山源)에 속하는데다가 황산(黃山) 부근이으로 ‘사정화’는 이 모든 의미를 담아 차의 이름을 ‘황산모봉’이라 명명하게 되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황산모봉’이 완성되어 상해에서 첫 출시가 되자, 속된 말로 한 번에 대박이 터져버렸다고 한다. 중국차를 수입하려고 상해에 온 영국 차상(茶商)들이 그 맛을 보자마자 모두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고 감탄하며 “OK, OK”를 외쳤다고 한다.
영국과 러시아 등의 차상들이 앞을 다투어 차를 예약하게 되자, 급기야 중국의 고위관원들과 귀족들의 고급음료로 인기를 독차지함은 물론이고 그들 사이에서 고급 선물로 각광을 받게 되자 ‘황산모봉’은 드디어 세상에 그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2. 황산모봉차의 최대기지 ‘사유대(謝裕大)’차장의 생산과 경영
‘사유대’ 차장은 흥업한지 40여년이 흘러 사정안(謝正安) 세상을 떠난 뒤, 그의 네 명의 아들들에 의해 합작경영으로 그 명맥을 이어오게 된다. 그러나 연이어 발생한 중국 내지의 군벌들의 내란과 중일전쟁 등의 크고 작은 전란이 끊이지 않던 역사적 인 격동의 혼란기를 겪으면서 황산 모봉(毛峰)은 그 생산량이 감소됨과 동시에 각지에 있던 ‘사유대차장’의 분점들마저 하나 둘씩 패쇠되어 갔다. 이로 인해 영국과 러시아 등지로 대량 수출되던 국제 판로마저 막히게 되자 ‘황산모봉’은 마침내 세상으로부터 서서히 잊혀져가기 시작했다.
이렇게 사양길에 접어든 ‘황산모봉’이 다시 기사회생(起死回生)하게 된 것은 모택동이 이끄는 중국공산당이 장개석이 이끄는 국민당(중화민국)과의 내전에서 승리하고 ‘신중국’이라고 표방하는 ‘중화인민공화국(中華人民共和國)’을 건립한 후, 중국 정부의 장기적인 경제계획정책의 통제를 받기 시작하면서이다.
그러나 초기에는 정통 ‘황산모봉’의 생산량은 여전히 위축되어 있는 상태였다. 생산량 통계에 따르면, 1982년에 3등급 모봉이 445.5킬로그램; 1983년에 2등급과 3등급의 ‘모봉’이 합쳐서 2863.3킬로그램; 1984년에 특1, 특2, 특3등급이 7382.3킬로그램, 1985년에는 11405킬로그램이 생산되었다. 비록 ‘황산모봉’이 외교부와 상업부에서 우수명차의 칭호를 받았지만 당시 시장의 명품의 관리가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채, 여전히 혼란한 틈을 타 가짜 ‘황산모봉’이 대량으로 시장에 출시되는 바람에 중국에서 전국적으로 시행한 찻잎추출검사에서 ‘황산모봉’의 명성은 거의 0점에 가까운 낮은 합격률을 받아 많은 사람들을 안타깝게 하였다.
이 때 가짜 황산모봉(黃山毛峰)으로 인해 ‘정통 황산모봉’의 명성이 훼손되는 모습을 더 이상은 차마 눈 뜨고 볼 수가 없었던 모봉의 창시자 사정안(謝正安)의 적통후손인 ‘사일평(謝一平)’은 ‘정통 황산모봉의 회복’이란 기치를 내걸고 ‘모봉’의 품질과 명성의 회복에 발 벗고 나서게 되었다.
사일평(謝一平)은 1995년 자신이 근무하던 ‘흡현(歙縣)차엽공사’를 사직하고 직접 차사업을 하기 위해 낙향하여 조계(漕溪:현재 안휘성의 부계富溪)에서 조상 대대로 내려오던 가업을 이어 드디어 ‘조계차창(漕溪茶廠)’을 창업하기에 이른다. 그는 조상들로 물려받은 전통 가공기법의 기초에다 현대과학기술을 접목하여 마침내 모봉(毛峰)의 품질을 한층 더 발전시킴은 물론 명차(名茶)로써의 모봉의 원래 명성을 회복하는데 성공하기에 이른다.
중국의 휘상(徽商)들의 경영이념은 바로 ‘성신(誠信)’을 우선으로 한다. 원래의 맛과 향을 살린 황산모봉을 생산하기 위해 ‘사일평’은 두 가지 방법을 동시에 실시하였다. 한쪽으로는 차 생산기지를 건설하면서 또 한 편으로는 상품의 이미지를 결정짓는 상표관리에 주중하였다.
아울러 황산모봉의 재배에 적합한 지역, 기후, 토양 등의 조건에 부합하는 해발 500미터 이상에 위치한 부계(富溪)와 갈석(竭石) 두 마을에 모봉차의 생산기지를 건설하였다. ―참고로 ‘사유대(謝裕大)차엽박물관’의 자료에 의하면 ‘사유대’에서 운영하는 황산모봉의 재배 차밭(茶園)은 모두 해발 800미터로 소개하고 있다.
10여년의 고심어린 경영 끝에 사일평의 ‘사유대’에서 생산한 황산모봉은 마침내 ‘국가원산지 생산품 보호범위’에 속하는 국가 주요 농산품으로 지정되었음은 물론, ‘중국차왕’이란 칭호까지 얻게 되었다. 현재 ‘사유대’차창에서 생산되는 차는 10 만여 킬로그램에 달하며 생산가로는 인민폐 2000만여 원(한국 돈 27억여 원 상당)에 달한다.
‘황산 사유대 유한공사(황산 휘주 조계차창)’는 ‘황산모봉’의 창시자인 사정안(謝正安)의 고향인 황산시 휘주구(徽州區)에 위치하고 있다. 모봉의 생산・가공・판매와 과학적 연구가 합일되어있는 민영 과학 기술 기업단체이므로 안휘성 농업 산업화의 선두 기업에 속한다. ‘사유대’기업의 사장(법인대표)은 바로 창시자 사정화의 제5대손이자 가업인 ‘황산모봉’을 부흥시킨 ‘사일평(謝一平)’이다.
현재 회사 직원과 공원들은 모두 286명이며, 그중에서 고급 설계사 2명, 농예사(農藝師)가 4명, 회계사 1명, 상품포장설계사 1명, 농업기술연구원 8명, 공정기술인원이 28명인데, 이를 통해 ‘황산모봉’이 상품으로 출시되기까지 모든 분야가 굉장히 구체적이고 과학적인 단계를 거쳐 연구 진행되고 있음은 물론이고, 또한 각 책임분야가 체계적으로 세분화되어 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황산(黃山)모봉(毛峰) ②
작설 형태로 빛깔은 상아와 같아
▲ 일반 황산모봉(위)와 고급 황산모봉(아래).
‘사유대(謝裕大)’차장은 ‘황산모봉’의 정통원산지로써 품질이 우수함을 밑천삼아 ‘황산(黃山) 제일가(第一家)’라는 명성에 걸맞게 투철한 경영이념과 새로운 시장 요구에 맞추어 가기위해 부단히 연구하고 있다. ‘황산모봉’이 명차로써 우뚝 설 수 있었던 것을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과거 조상들의 전통을 이어받아 전수하고, 끊임없이 연구하고 발전시켜 오늘의 모봉 최고의 조계품질을 생산하게 되었다.”라고, 게다가 이들은 전통공예를 철저히 계승하여 복원함은 물론 선진과학기술을 수용하여 활용함과 동시에 우수한 인재들의 과감한 등용으로 ‘품질의 개선’과 ‘상품 브랜드 전략’을 실시하여 마침내 세계적으로 유명한 ‘황산모봉’으로 거듭나게 하였다. 그들은 새로운 차의 생산 기지를 건립하고 협회를 조직하며, 농민을 함께 이끌고 가는 즉, ‘기업+기지+협회+농가’ 형태의 일원화된 선진 산업화 경영시스템을 이룩하였다.
‘사유대(謝裕大)’의 표준 찻잎의 초제(初制)가공 기지는 황산모봉의 원산지인 휘주구 부계향(富溪鄕)으로 점유면적이 253아르(a)이고 작업장 건설면적은 약 1만 평방미터 규모로 각종 공정단계가 완전히 현대화 설비시스템으로 갖추어진 중국 최대의 황산모봉차 생산기업이다.
뿐만 아니라 조계(漕溪)는 중국 정부에서로부터 ‘황산모봉차의 생산기지(生産基地)’로 공식 지정되었으며, 동시에 조계의 ‘황산모봉차’는 중국의 10대 명차 중에서도 중국의 ‘국차(國茶)’로 공식 지정되는 영예를 얻기도 하였다. 2007년 3월 중국의 국가주석 ‘후진타오(胡錦濤)’는 중국을 방문한 러시아의 ‘푸친 대통령’과 함께 부계(富溪)를 방문하여 공장과 ‘사유대차엽박물관’을 관람한 뒤, 직접 그에게 ‘황산모봉’을 선물하기도 했다.
(3) 황산 모봉의 제다(製茶)와 등급
현재 황산모봉의 생산지역은 이미 황산산맥 남쪽자락에 위치한 황산시의 휘주구(徽州區), 황산구(黃山區), 흡현(歙縣), 이현(黟縣) 등의 황산 주변의 많은 곳으로 확대되어 재배 생산되고 있다. 황산은 골이 깊고 산봉우리가 연이어져 숲이 우거지고 곳곳마다 계곡을 흐르는 시내가 널려 있다.
기후가 온화하고 강우량이 풍부하고 연평균온도가 15~16℃며, 연평균 강수량이 1800~200미리이다. 토양은 산지 황양(黃壤)에 속하며, 토층이 매우 깊고 두텁다. 토질이 부드러워 투수성(透水性)이 매우 좋다. 풍부한 유기질과 PH(페하: 수소이온농도)가 4.5~5.5로서 차나무 생장에 매우 적합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황산모봉은 일반적으로 가늘고 여린 잎인 ‘세눈(細嫩)’만을 채취하여 만드는데,
특급 황산모봉은 ‘일아일엽초전’을,
1등급은 ‘일아일엽(一芽一葉)’, ‘일아이엽초전’을
2등급은 일아일엽과 ‘일아이엽(一芽二葉)’을
3등급은 ‘일아이·삼엽초전(一芽二・三葉初展)’등을 표준으로 삼아 구분한다.
참고로 설명하자면, ‘일아일엽초전(一芽一葉初展)’은 차나무의 맨 끝에 창처럼 뾰족하게 솟아 있는 싹과 바로 그 밑에 달려 있는 갓 전개되는 한 개의 찻잎을 가리킨다. ‘일아일엽(一芽一葉)’은 한 개의 차싹과 그 밑에 달려있는 찻잎을 가리키며, 일아이엽초전(一芽二葉初展)은 하나의 찻싹과 그 밑에 붙어서 잎으로 막 펼쳐지고 있는 2장의 싹 잎을 가리킨다. 그리고 ‘일아이·삼엽초전(一芽二·三葉初展)’도 위와 마찬가지로 한 싹 아래 붙어서 갓 피어나는 두 잎 혹은 세 잎을 가리키는 말이다.
찻잎을 따는 시기를 보면,
특급 황산모봉은 청명(淸明) 전후이고,
1~3등급 황산모봉은 곡우(穀雨) 전후에 채취한다.
채취된 신선한 찻잎이 공장에 들어오게 되면 먼저 찻잎을 선별하게 된다. 겨우내 언 잎이나 병충해에 상한 잎을 제거하고, 그 다음에는 각 등급에 부합되지 않은 찻잎이나 줄기 등을 가려서 추려내어 차싹과 찻잎의 품질을 수준이 고르게 유지되도록 한다.
이렇게 엄선된 찻잎은 다시 그 부드러운 정도에 따라 구분하여 따로 펼쳐놓고 찻잎의 수분을 부분적으로 제거한다. 찻잎의 신선도를 유지하기 위해 오전에 채취한 찻잎은 오후에 제다하고, 오후에 채적한 찻잎은 당일 밤에 제다를 진행한다.
황산모봉의 제다 공정은 ‘살청(殺靑)・유념(揉捻)・홍배(烘焙)’의 삼단계로 진행된다.
제1단계인 살청은 직경 50센티미터 정도의 솥을 사용하며, 솥의 온도는 먼저 고온에서 나중에 저온으로 하여야한다. 즉 150~130℃로 하여야한다. 솥에 매번 투입되는 찻잎의 양은 특급일 경우 200~250그램, 일급이하 일 경우에는 500~700그램까지 증가할 수 있다. 신선한 찻잎을 솥에 넣었을 때 깨 볶는 듯 소리가 나면 온도가 적당한 것이다.
오직 손으로 가볍게 뒤집어 가며 재빨리 볶아야 하는데, 통상 분당 50~60차례 정도로 한다. 이때 찻잎을 솥을 걸어놓은 부뚜막에서 약 20센티미터 정도 높이로 들어 올려가며 볶아야한다. 높이 들어 올려 찻잎을 흩뜨릴 때는 뭉치지 않도록 골고루 잘 흩어지게 하며, 솥에서 찻잎을 볶으며 위로 끌어 올릴 때는 솥 안이 깨끗하게 비도록 전부 다 끌어올린다. 살청은 찻잎을 적당히 시들게 하는 작업으로 찻잎이 부드러워지고, 찻잎 표면의 광택을 사라지며, 푸릇한 기가 없이 차향이 드러나기 시작하면 된다.
제2단계인 유념(揉捻)과정은 찻잎 비비기 과정이다. 특급과 일급은 살청이 적당이 이루어졌을 때, 계속해서 솥에서 약간 쥐었다 놓았다하면서, 가볍게 비비고 가닥을 정리하는 작용을 가한다. 2~3급은 살청 후, 솥에서 꺼내어 열기가 식은 뒤에 가볍게 1~2분 정도 비비게 되는데, 찻잎의 가닥이 약간 구불구불하게 되면 된 것이다. 이때 주의할 사항은 찻잎을 천천히 비벼야하며(揉捻), 무겁게 압력을 가하지 말고 가볍게 눌러 주어야한다.
제3단계인 홍배(烘焙)는 불에 쬐어 말리는 과정으로서 ‘초홍(初烘)’과 ‘족홍(足烘)’으로 나눈다. 초홍(初烘)은 첫 불 쬐기를 말하며, 족홍(足烘)은 충분히 불에 쬐어 찻잎을 완전히 건조시키는 과정을 뜻한다.
초홍은 살청 솥 마다 4개의 건조용 대바구니를 사용한다. 불의 온도는 처음에 고온으로 높였다가 낮추어 가는데, 홍배 때 제일 위에 놓이는 첫 번째 대바구니의 불과 거리가 제일 멀기 때문에 불의 온도를 90℃이상으로 하고, 두 번째와 세 번째, 네 번째 바구니로 내려갈수록 80℃, 70℃, 60℃로 차차 불의 온도를 낮추어간다. 이때 찻잎이 고열에 타지 않도록 자주 뒤집어 주어야하며, 또한 위에 놓인 바구니와 아래 놓인 바구니의 순서를 수시로 바꾸어 주어야한다.
첫 불 쬐기(初烘)가 이 끝난 차는 곡식을 까불 때 쓰는 대나무 키에 옮겨 담아 30분간 가량 열을 식혀 찻잎의 수분이 다시 고르게 분포되도록 한다. 초홍을 거친 찻잎은 다시 8~10번의 불 쬐기를 거쳐 마지막 단계인 족홍(足烘)의 과정을 진행하게 되는데, 이때 온도는 60℃정도로 하며, 찻잎이 충분히 건조될 때까지 여린 불(文火)로 천천히 건조시켜간다. 차가 완전히 건조되면, 잡티를 골라내고, 다시 한차례 ‘불 쬐기’를 하여 차향을 북돋아준 뒤, 밀폐된 찻통(茶罐)에 넣고 봉합하여 보관한다.
상품으로 완제된 황산 모봉의 등급은 일반적으로 특급과 1, 2, 3 등급으로 나누어지고, ‘특급’은 다시 상중하 3등급으로 나누어지며, 1~3등급은 다시 각각 상하 2개 등급으로 세분화 되어 진다.
특급 황산모봉은 중국 모봉차 중의 최고 극품으로 인정되며, 그 형태가 작설(雀舌)의 형태이며 잎은 고르게 견실하다. 찻잎은 뾰족하고 하얀 솜털로 덮여있으며, 빛깔은 마치 상아(象牙)와 같다. 다 자란 찻잎은 황금빛을 띠고 있으며, 맑은 차향이 높고 오래 지속된다.
2014년 10월 09일 (목)
박영환 p-chona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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