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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세〕생각을 감춘 얼굴, 흑안

Paul Ahn 2019. 12. 23. 10:13

생각을 감춘 얼굴, 흑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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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고서 중에 ‘흑안’(黑顔)을 높게 평가하는 책이 있습니다. 흑안은 글자 그대로 검은 얼굴입니다. 그러나 얼굴 피부색이 검다는 말이 아닙니다. 사람은 얼굴을 보면, 특히 얼굴 가운데 눈을 보면 그 마음을 읽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흑안은 검고 흐려서 그 속을 알 수 없는 얼굴을 말합니다. 이른바 마음을 감춘 얼굴이지요. 흑안을 좋게 여길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속생각을 숨긴 음흉한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먼저 떠오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난세의 처세술

그런데 ‘흑안’이란 말이 생긴 사정을 알고 보면 그런 대로 봐줄 만한 부분도 있습니다. 춘추전국시대, 권력과 사람이 쉬 출현하고 덧없이 사라지는 그 불안정한 시대에 뜻을 품은 사람들은 그 뜻을 펴기 위해 천하를 주유하기도 하였는데, 그런 사람들은 흑안이 될 필요가 있었을 것입니다. 음모와 술수, 배신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자신의 속뜻을 청명하게 다 드러내고서는 결코 목숨을 보장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삼국지를 보아도 자신의 속뜻을 숨긴 채 상대를 설득하여 결탁하거나, 또는 위협하고 농락하는 숱한 지략들을 보게 됩니다. 그런 상황에서 상대방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읽히는 순간, 모든 계획과 수고는 물거품이 되고 맙니다. 그러니까 흑안, 곧 마음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는 것은 처세술이라는 측면에서 필요성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본래 자신의 뜻을 정갈하고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 복선을 깔지 않고 말하는 것을 좋게 여기는 편입니다. 이른바 청안(淸顔)주의자라고나 할까요? 그러나 ‘흑안’이라는 말에 거의 조건반사적으로 솟아오른 거부반응을 가라앉히고, 곰곰 그 말을 생각하면서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 되었습니다. 흑안이 결코 처세술의 차원이 아니라는 반성이 생긴 것입니다. 제 머릿속에서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습니다.

 

‘너는 정말로, 언제나, 누구에게나 맑고 분명하게 마음을 드러냈던가?’ 자신할 수 없었습니다. 제가 믿을 수 없는 사람, 제게 해코지를 할 수 있는 사람, 쉽게 저를 곤궁에 빠뜨릴 수 있는 사람에게는 많은 경우 제 속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지 않았을 것입니다. 화를 당할 줄 뻔히 알면서도 용감하게 ‘당신 하는 일이 옳지 않다’고 말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저도 어느새 흑안의 소질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랬으면서도 저는 청안을 내세웠습니다. 자기기만이 아닐 수 없습니다.

 

◆ ‘맑음’의 모순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제 속생각을 정직하게 드러냈다고 하는 그 순간에도 제 속에는 이러저러한 다른 생각의 조각들이 꼬물거리고 있습니다. 제가 드러낸 생각이 제 생각의 전부가 아닌 것이니,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다른 생각이 있음을 숨긴 것입니다. 맑다고 생각한 것이 맑은 것이 아닐 수 있다는 말입니다.

 

거꾸로 제 생각이랍시고 덜렁 말한 것이 남에게 상처가 되기도 하고, 섣부른 조언이 되고 말기도 합니다. 말을 멈추고 좀 더 생각하고, 자신의 속생각 가운데서 올바른 것을 잘 정리하여 조심스럽게 말해야 했는데 말입니다. 생각을 있는 대로 드러낸다는 것이 남에게 해가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니 제 판단과 감정을 얼굴에 드러내기 전에 좀 더 살피고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고, 결국 그것은 흑안에 가까운 얼굴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제 생각을 제가 다 모를 수도 있습니다. 제 무의식은 제 의식을 배반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저는 제 얼굴에 드러낸 생각이 제 진정한 생각이라고 여기고, 마찬가지로 남의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남의 생각을 다 안다고 믿습니다. 돌이켜보면 어이없는 일입니다. 제 생각도 다 알지 못하면서 남의 생각을 다 안다고 확신하다니 말입니다.

 

◆ 자신만의 진실을 가진 존재

사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갈등과 문제의 상당수는 내가 상대의 생각을 다 안다고 하는 데서 생깁니다. 우리는 흔히 상대방의 말, 얼굴 표정, 행동거지를 보면서 상대를 다 안다고 확신합니다. 그런데 그가 내가 아는 바와 전혀 다른 일을 합니다. 그래서 배신을 당했다고 분노합니다.

 

이런 실수 중에 가장 흔한 실수는 자녀에 대해서입니다. 부모들은 다 자녀를 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결코 부모는 자녀를 다 알지 못합니다. 매일 보는 자녀의 얼굴에 드러난 감정과 생각, 그것이 결코 자녀의 전부가 아닙니다. 그래서 자녀를 그토록 사랑하면서도 자녀를 끝내 이해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상대가 내 자식이라 할지라도 내가 다 파악할 수 없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은 거꾸로 보면, 자식이라는 존재에 대한 존중이기도 합니다. 인간에 대한 존중입니다. 내 얼굴을 놓고 ‘흑안’을 생각한다면 남의 얼굴을 놓고도 ‘흑안’을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상대는 내가 다 파악할 수 없는, 그래서 그 자신만의 진실을 가진 존재입니다. 그럴 때 내가 기대한 것과 다른 행동을 해도 그 행동 자체를 인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저 자신이든 상대방이든 그 심중을 꿰뚫어보시는 분은 하나님뿐이십니다. 우리가 누구를 다 안다고 확신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역을 넘보는 잘못인지도 모릅니다.

 

흑안, 두고두고 생각해볼 화두인 것 같습니다.

 

서진한: 월간 ‘기독교사상’ 편집인이자 대한기독교서회 상무이다.

아름다운동행을 통해 삶과 신앙에 관한 부드럽지만 예리하고, 예리하지만 깊은 연민과 애정이 묻어나는 글들을 선보이고 있다.

 

(받은 글)

2016.10.07.

아름다운동행(http://www.iwithjesu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