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에르이스탄 / 이스탄불
어릴 적 어머니 밥상 같은 '지에르이스탄'
이스탄불의 지에르이스탄 레스토랑은 몇 년 전, 악사라이 근처의 켈레 파차(양머리와 양다리로 끓인 수프)로 유명한 파사지 하산 레스토랑을 찾기 위해 헤매다 찾지 못하고 돌아가던 길에 눈에 띤 레스토랑이다.
깨끗하고 아담한 레스토랑 내부와 코를 찌르는 케밥 냄새의 유혹에 발목을 잡혀버린 후 이스탄불에 머물 때마다 들르게 되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양고기로 굽는 최프 케밥과 양 간과 기름을 숯불에 굽는 지에르 케밥이 맛있기로 현지인들의 입소문이 자자한 레스토랑이었다.
지에르 케밥을 주문하면 얇은 빵인 라와씨와 매콤한 양념 맛의 매제인 에즈메, 고춧가루로 버무린 양파 샐러드, 싱그러운 민트 한 접시와 구운 양파, 토마토, 풋고추로 한 상 가득 차려진다. 상이 차려지면 1인분에 작게 썬 양 간과 기름을 섞어 숯불에 구운 긴 꼬치 열 개가 고소한 냄새를 풍기며 나온다.
식사는 손을 닦으면서 시작된다. 먼저 얇은 빵인 라와씨를 왼손바닥에 놓는다. 오른손은 긴 쇠 꼬치에 꿰어진 지에르 케밥을 들어 왼손 바닥에 놓여있는 라와씨로 감싸서 꼬치를 살짝 돌리면서 뽑아낸다. 지에르 케밥 위에 양파 샐러드와 민트를 놓고 에즈메 한 숟갈을 쌈장처럼 얹어 둘둘 만다. 한 입 베어 물면 라와씨의 부드러운 빵 속에서 고소한 지에르 케밥에 알싸한 양파 맛, 매콤한 에즈메와 향긋한 민트가 서로 어우러지면서 맛과 향의 향연이 시작된다.
하나, 둘 쌈을 싸다보면 서로 어우러져서 내는 맛과 향에 마음을 뺏기게 되어 어느새 긴 쇠 꼬치 열 개가 스텐접시에 덩그러니 남게 된다. 마치 상추와 깻잎에 먹음직스럽게 구운 삼겹살과 마늘, 풋고추, 쌈장을 얹어 쌈을 싸는 것 같아서 먹는 재미도 한 몫을 한다.
지에르 케밥 쌈을 싸던 어느 날, 손바닥에 올릴 수 있는 잎이면 무엇이든 쌈으로 즐겼던 친정 식구들이 몹시 그리웠던 적이 있다. 어릴 적 우리 집에서는 봄동 배추와 솎음 상추쌈으로 봄 쌈이 시작되었다. 푸성귀가 귀한 겨울이 지난 후라 싱그럽고 풋풋한 어린잎은 바로 봄맛의 시작이었다.
또 곰삭은 묵은 김치쌈은 생각만으로도 침이 고여 오는 늦봄의 어머니 표 입맛 지킴이다. 어머니는 묵은 김치의 곰삭은 맛과 향은 그대로 남긴 채 짠 맛을 적당히 물에 우려내 쌈 싸먹기 좋게 간을 잘 맞추셨다. 그래서 묵은 김장김치 쌈에는 쌈장이 필요 없었다.
여름철이 되면 여러 가지 쌈으로 식탁은 더욱 화려해진다. 상추나 솎음배추에는 참기름 고추장을, 끓는 물에 살짝 데친 깻잎과 얼갈이배추에는 풋고추 젓갈쌈장을, 밥 위에 찐 호박잎에는 강된장을 곁들인다. 적당히 익어서 콤콤한 냄새가 폴폴 거리는 콩잎 물김치와 얼가리 배추 물김치는 여름철 쌈으로는 최고다. 그래서 여름철이면 어머니는 아예 쌈을 싸기 위한 물김치를 따로 담그셨다. 어렸을 때는 김치의 소금 간 때문에 손이 아프다고 물김치 쌈은 늘 어머니와 아버지께서 싸주셨다.
부모님께서는 다섯 자식들이 쌈을 받아먹을 때마다 “아이고, 제비 새끼들”이라고 하시면서 자식들에게 먹이는 재미를 낙으로 삼으셨고 우리는 제비 새끼들처럼 컸다. 속이 노오란 배추가 고소하고 달큰한 맛을 내는 가을이면 풋고추 젓갈 양념장으로 배추 속 쌈을 싼다. 싱싱한 배추의 아작거리는 맛으로 가을은 무르익는다.
겨울이 되면 바다 내음이 물씬 나는 김과 곰피, 다시마, 미역쌈이 식탁에 오른다. 끓는 물에 데친 곰피와 다시마, 생미역에는 풋고추를 다져 넣은 젓갈 양념장을, 끓는 물에 데친 미역에는 매콤한 초고추장으로 쌈을 싼다. 김은 참기름을 앞뒤로 바르고 소금을 흩뿌려 연탄불에 살짝 굽거나 날 김을 그대로 구워 참기름 간장에 찍어 먹는다. 그렇게 쌈을 싸는 동안 춥고 긴 겨울은 지나간다. 어렸을 때처럼 모두 둘러앉아서 이제는 제비 새끼들이 어머니, 아버지께 지에르 케밥 쌈을 싸 드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에 코끝이 시리고 아렸다. 지에르 케밥은 양 간을 작게 썰어서 굽기 때문에 숯불향이 골고루 배여서 어머니 아버지께서도 참 좋아하실 맛이다.
지에르이스탄은 케밥 전문 레스토랑이지만 랜틸 쵸르바(콩 수프)와 후식인 큐나베도 아주 특별한 맛을 낸다. 양 도가니를 넣고 끓인 랜틸 쵸르바는 주인 이즈마엘이 특별한 맛으로 추천한 쵸르바다. 고소한 콩 맛과 양 도가니의 깊고 묵직한 맛이 서로 어우러져서 숟가락마다 건강 덩어리를 건져 올리는 느낌이다. 애크매크(식사용 빵) 두어 조각을 곁들이면 든든한 터키식 아침 식사가 된다.
큐나베는 큐나베의 본 고장인 안타키아에서 처음 먹어 본, 치즈로 만든 후식이다. 지에르이스탄의 큐나베는 갓 만들었는지 따뜻했다. 따뜻하니 치즈가 더 부드럽게 느껴졌고 달큰한 뒷맛이 입안을 굴러 다녔다. 치즈의 놀라운 변신이었고 지옥처럼 달콤한 터키 후식들 중에서 찾아낸 보석같은 맛이었다. 서울 유학중인 터키어 선생님인 알레프도 제일 좋아하는 후식이라고 하니 기회가 닿으면 꼭 사다 드리고 싶다.
숟가락만 더 놓으면 누구라도 함께 앉을 수 있는 내 어릴 적 밥상 같은 지에르이스탄. 사람 냄새 풀풀 나는 이즈마엘과 지배인, 종업원들의 마음 씀씀이가 지에르 케밥을, 랜틸 쵸르바를, 또 큐나베를 더욱 더 그립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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