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밀키트 시장 현황
‘○○박스’ 의 진화
쿠킹박스로 건강한 집밥 한상
줄 서서 기다리지 않아도 맛있는 한 끼 식사가 택배로 오는 시대다. 바야흐로 ‘미식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는 현재, 적은 노력과 시간으로 양질의 식사를 하려는 사람들이 쿠킹박스를 찾고 있다. 유명 요리사와 협업한 쿠킹박스를 개발, 밀키트 서비스로 제공하려는 업체가 늘면서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특별하고 건강한 요리를 집에서 즐길 수 있게 됐다.
서울 광진구에 사는 정 씨 부부는 맞벌이를 하며 한 주에 2∼3번 밀키트 업체의 쿠킹박스로 식사를 한다.
소고기 전골부터 안심 스테이크, 로제 파스타까지 다양한 메뉴를 새벽에 배송받아 평일 아침·저녁을 해결한다.
부부가 주문하는 식사 메뉴는 스티로폼 상자에 여러 개의 얼음 팩과 함께 포장돼 배송된다. 갓 만들어진 식재료는 집 앞 현관에 배송될 때까지 1∼8℃의 냉온에서 보관된다. 전골에 들어가는 고기는 먹기 좋은 크기로 양념이 된 채 포장돼 있고, 깨끗이 손질된 전처리 채소는 비닐 팩에 담겨 있다. 냄비에 물을 붓고 재료를 레시피 카드 순서대로 넣어 끓이면 한 끼 요리가 10분 안에 완성된다.
정 씨 부부의 사례와 같이 최근 밥상을 ‘차리기’보다 ‘받는’ 쪽을 택하는 사람들이 늘면서 밀키트 업체들이 제공하는 쿠킹박스가 인기를 끌고 있다.
요리는 다른 어떤 가사 활동보다 노동 강도가 높다. ‘오늘 뭐 먹지’ 고민하는 것으로 시작해, 장을 보고 재료를 손질해 조리한 후에는 설거지와 음식물 쓰레기 처리라는 잔업이 주어진다.
많은 이들이 매일 장 보는 삶을 저녁이 있는 삶보다 비현실적으로 여기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외식은 비용이 만만치 않고, 패스트푸드는 믿을 수 없으며, 편의점 간편식으로 하루 세끼를 채울 수는 없다. 아무리 바빠도 잘 먹고 싶은 소비자 욕구를 읽고 등장한 것이 바로 ‘밀키트 딜리버리(meal kit delivery)’ 서비스다.
◇재료·요리법 담은 요리노동의 구원자
밀키트는 가정에서 간편하게 요리할 수 있도록 한 끼 식사분량의 손질된 식재료와 소스, 레시피로 구성된 박스를 말한다. ‘쿠킹박스(cooking box)’ 또는 ‘레시피박스(recipe box)’로 불리는 밀키트는 레시피를 찾아보고 장을 봐서 식재료를 손질하는 번거로움 없이 바로 간단하게 집밥을 준비할 수 있다. 전문가가 고른 제철 식재료와 셰프 메이드 레시피가 박스에 담겨 매일 혹은 매주 현관 앞에 배달되기 때문이다. 장 보고, 요리하고, 설거지하는 시간에 비하면 밀키트 서비스가 훨씬 경제적이다.
조리기구만 준비돼 있다면 쿠킹박스로 배달되지 않는 것은 셰프뿐으로, 밀키트 서비스는 적은 노력과 시간으로 양질의 식사를 하려는 고객들을 주 타깃으로 한다. 가구 구성원이 갈수록 줄어드는 현시대에 식탁 위 음식은 점점 왜소해지고 있다. 어떤 음식은 고추 1개, 감자 4분의 1개, 향신료 한 꼬집만 필요한데, 한 끼 식사 후 남은 재료를 유통기한 내다 먹기란 쉽지 않다.
따라서 사놓고 시들어가는 식재료가 골칫거리로 남는 것이다. 밀키트 스타트업 ‘프렙’의 이송희 대표는 “식재료 쇼핑에 들어가는 시간을 아끼고, 재료 낭비를 막을 수 있다는 점이 쿠킹박스의 가장 큰 매력”이라며 “레스토랑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고급진’ 음식을 쉽고 빠르게 해 먹는 즐거움은 덤”이라고 말했다.
이는 해외에서도 마찬가지로 미국 소비자들은 밀키트 서비스의 가장 큰 매력으로 ‘시간 절약’을 꼽았다. 닐슨컴퍼니가 지난해 미국 성인 2,015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밀키트 구입 이유를 묻는 질문에 46%가 ‘메뉴 고민 시간 단축’이라고 답했다. ‘요리시간 단축’과 ‘장보는 시간 절약’이 각각 45%와 37%로 그 뒤를 이었다. 이 밖에 ‘새로운 레시피로 요리가 가능해서’를 장점으로 꼽은 응답자가 36%, ‘더 건강한 식사가 가능해서’라고 답한 비율은 34%로 나타났다.
◇푸드 스타트업, RTC 메뉴 차별화 경쟁
밀키트는 HMR 중에서도 껍질을 벗기는 등 최소한의 재료 손질만 거쳐 요리하는 ‘RTP(Ready to Prepared)’나 ‘RTC(Ready to Cook)’로 분류된다. 식재료만으로 전문 요리사가 조리한 레스토랑 맛을 내는 RTP나 RTC 상품은 대형유통업체가 아니라 소규모 스타트업에서 택배로 배송하고 있다. 국내에서 밀키트에 대한 소비자 니즈를 가장 먼저 포착한 곳도 푸드 스타트업들이다. 몇 년 전만 해도 배달 앱 등으로 완성된 음식을 배달하는 서비스가 대세였다면, 이제는 신선함과 간편함을 내세운 밀키트 스타트업들이 쿠킹박스로 한 끼 식사를 책임지고 있다.
실제로 프렙, 프레시지, 원파인디너 같은 스타트업들이 밀키트 시장을 선도하며 벤처캐피탈 업계의 투자도 이끌어내고 있다. 다양한 푸드 스타트업들이 등장해 경쟁을 하다보니 개성도 제각각이다.
예를 들어, 2015년 12월 론칭한 프렙(prepbox.co.kr)은 2005년부터 도산공원 앞을 지킨 ‘그랑시엘’과 ‘마이 쏭’의 오너 셰프 이송희 대표의 이름을 내걸었다. 레스토랑과 별도로 자체 공장을 운영하며, 쿠킹박스 안에 들어가는 식재료 경쟁력을 높인 것이 특징이다.
2016년 창립한 프레시지(fresh-easy.co.kr)는 다른 스타트업보다 밀키트 메뉴의 장르가 다양하다. ‘중국 사천 라즈지’, ‘타이 치킨그린커리’ 등 이색 메뉴를 찾아볼 수 있는데, 특급호텔에 재직 중인 셰프와 손잡고 레시피를 개발했다.
중점을 둔 것은 가정에서의 재현 가능성으로, 전처리 전문기업을 인수해 재료의 신선함을 보장함과 동시에 조리단계를 최소화했다. 기존 유통업체의 모바일 슈퍼에도 입점해 롯데슈퍼의 온라인 전용 배송센터인 롯데프레시센터를 통해 판매하는 제품들이 호평을 받고 있다.
요리에 어느 정도 익숙한 이들이라면 원파인디너(onefinedinner.com)를 추천할 만하다. 기존 쿠킹박스가 유명 셰프와 레시피 협업을 하거나 맛집 메뉴를 집에서 재현하는 ‘국내용’이라면 원파인디너는 ‘세계의 식탁’을 콘셉트로 운영된다. 프랑스·스페인·그리스 등 세계 각국의 ‘집밥 정기구독’을 궁극적인 목표로 하며, 외국 대사관이나 문화원과의 협업도 이뤄진다.
◇유통·식품업계도 밀키트 시장 정조준
스타트업이 주를 이뤘던 밀키트 시장이 급성장하면서 식품 및 유통업계의 발걸음도 분주해지고 있다. 한국야쿠르트는 HMR 브랜드 ‘잇츠온’에 밀키트 분야를 추가했다. 전국에 퍼져있는 야쿠르트 아줌마 채널을 활용한 유통망으로 밀키트를 직접 배송해주는 것이 장점이다.
지난해 말 선보인 월남쌈, 파스타, 스테이크 등 20여 종의 밀키트를 연내 40∼50여 종으로 확대, 밀키트 제품으로 간편식 시장을 공략할 예정이다. ‘DIY 식단’, ‘MD 추천식단’ 등 취향에 맞는 간편식 주문도 가능하다. 동원홈푸드는 2016년 인수한 HMR 온라인몰 ‘더반찬’에서 밀키트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반조리 RTC 메뉴로 분류된 스키야키와 해물볶음우동 등 10여 종의 메뉴를 판매하고 있다.
유통업체들의 시장 진출도 이뤄지고 있다. 국내 유통업계에서 밀키트 산업을 선도하는 곳은 지난해 12월 밀키트 전문브랜드 ‘심플리쿡’을 론칭한 GS리테일. 슈퍼마켓, 편의점, 홈쇼핑 등 계열사 온라인·모바일 몰에서 판매하는 심플리쿡은 출시 2개월 만에 누적 판매량 2만 개를 기록했다. 일평균 판매량이 500여 개까지 늘어나며 다양한 메뉴로 밀키트 영역을 확대할 예정이다.
지난달에는 국내 고객들에게 생소한 밀키트 배송 서비스에 대한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현대백화점 판교점에서 심플리쿡 팝업스토어를 운영하기도 했다.
◇레시피 상품화·푸드테크 도입, 차별화의 관건은?
스타트업에 이어 대기업들 참여로 시장 규모가 커지자, 서비스 제공업체들은 단순히 밀키트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수준을 넘어 재구매율 확대로 충성고객을 유지하는 방법을 찾고 있다.
각사별로 비슷비슷한 메뉴와 서비스에 이용 가격대마저 비슷하면 고객들이 작은 차이에도 경쟁업체로 이탈하기 때문이다. 현재 밀키트 시장에서 차별화의 관건은 무엇인지 살펴본다.
① 콘셉트의 명확화
현재의 밀키트 상품은 글로벌 메뉴가 주를 이루고 있다. 대부분 업체들이 ‘오리엔탈’, ‘프렌치’, ‘이탈리아’, ‘아메리카’ 등으로 월드 키친을 구분해 중식, 일식, 양식 등 전 세계 입맛에 맞춘 제품을 판매한다. GS리테일의 심플리쿡과 프렙의 베스트셀러 메뉴를 봐도 스키야키나 감바스, 엔초비 오일 파스타 등이 베스트 5 제품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GS리테일 밀킷팀 임태민 선임 MD는 “에스닉 푸드 중심으로 밀키트에 대한 인지도를 높이고 있는 단계”라며 “제3세계의 요리를 밀키트로 받아봐 홈파티용이나 손님 접대용으로 내놓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물론, 먹어보지 않았던 새로운 식재료로 요리해볼 수 있다는 점은 밀키트의 매력적인 소구 포인트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밀키트를 일상식으로 즐기게 하려면 진정한 집밥 개념의 한식으로 영역을 넓혀야 한다. 특히 국내 소비자들이 선호하는 한식 카테고리 중에서도 조리에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전문 메뉴 위주로 개발 초점을 맞추면 차별화할 수 있다. 김치찌개처럼 집에서 쉽게 해먹을 수 있는 상품보다 소고기 전골 등 요리하기 어려운 상품을 밀키트로 출시해 주부들이 실질적인 혜택을 누리게 할 필요가 있다.
② 메뉴의 집밥화
이용자가 언제든지 마음을 쉽게 바꿀 수 있는 밀키트 서비스의 특성을 감안하면 차별화된 비즈니스 영역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미국 사례를 들면, 밀키트 스타트업 퍼플캐롯(Purple Carrot)의 사업 콘셉트는 명료하다. 유기농과 채식이다. 건강한 라이프스타일과 환경 보호에 관심을 갖는 젊은 밀레니얼 세대들을 공략한 것이다. 채식주의자가 아니어도 채식을 시도해보고 싶은 젊은이들, 혹은 인스턴트에 질린 싱글족들이 주요 고객층이다. 이들은 ‘따라 하기 쉬우면서(easy to follow)’, 시중에서 쉽게 즐기지 못하는 요리를 집에서 스스로 해먹을 수 있다는 점을 퍼플캐롯의 강점으로 꼽는다.
③ 레시피의 상품화
밀키트 업체들은 창의적인 메뉴와 레시피를 주요 경쟁력으로 꼽는다. 그러나 아무리 특급호텔 셰프와 손잡고 레시피를 개발해도 정작 중요한 것은 가정에서의 재현 가능성이다. 프로의 레시피를 그대로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같은 결과물을 낼 수 있도록 조리법을 얼마나 최적화하는가가 관건이다.
이를 위해 고객들이 집에서 쉽게 만들기 어려웠던 메뉴의 레시피를 잘 이해하도록 전문 용어를 풀어쓰거나 표준화하고 재료에 번호를 붙여 순서대로 조리하는 방식으로 단순화하는 것이 좋다. GS리테일의 심플리쿡 경우 레시피 카드의 QR코드를 찍으면 조리 과정을 동영상으로 보여준다. 레시피와 함께 요리에 사용되는 주방도구나 식재료를 별도로 판매하기도 하는데, 프렙 경우 밀키트 이용고객의 20%가 주방용 도구도 구입하고 있다. 밀키트 이용객들은 대부분 요리에 대해 호의적이거나 즐거움을 느껴보고 싶어 하므로 이를 마케팅에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다.
④ 포장의 푸드테크화
레시피 개발뿐 아니라 식재료가 배송 중 상하지 않도록 포장하는 기술도 밀키트 사업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고려 대상이다. 국내 스타트업도 포장 기술 역량을 다지는 데 힘 쏟고 있다. 푸드 스타트업 프레시지가 시도하는 ‘쿠킹박스 추적 시스템’이 대표 사례다. 프레시지 경우 포장 박스에 센서를 부착해 배송 안전성을 높이는 기술을 개발 중이다. 쿠킹박스 안에 위치 추적 장치와 온·습도 확인 센서를 달아 소비자가 자신이 주문한 상품이 몇 도의 온도로 배송되는지 추적할 수 있게 만들 계획이다. 이를 통해 배송 안전에 기반한 밀키트 서비스 품질 향상에 나설 계획이다. 또한 친환경 콘셉트를 표방하는 밀키트 업체라면 포장 박스부터 단열재, 냉각 처리재까지 재활용 패키지나 아이스 팩을 이용해 고객 신뢰를 높일 수 있다.
◇집밥도 정기 구독하는 시대 온다
미국에서는 밀키트를 정기배송해주는 서브스크립션 커머스 중심으로 시장이 정착됐다. 서브스크립션 몰에서 정기배송서비스를 신청하면 배송횟수, 주별 식단 등을 선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국내 경우 아직 소비자들이 집밥을 정기 구독해 받아볼 정도로 시장이 활성화되지 않았다.
큐레이션이 필수인 밀키트는 구독자 개개인의 취향을 얼마나 잘 맞추는지가 서비스의 성패를 좌우하므로 생수나 기저귀 같은 생필품을 정기적으로 받아보는 개념과는 다르다.
단순히 시간을 아끼는 차원이 아니라 구독자에게 새로운 경험을 제공하는 데 중점을 둬야 하는데, 국내 소비자들이 밀키트를 집밥만큼 믿고 받아들일 정도로 제반여건이 구축된 것은 아니다. 직장인들의 퇴근 시간도 일정치 않아 일주일치 메뉴를 받아 봐도 그날그날 소화하기 힘든 것이 현실이다. GS리테일 임태민 MD는 “미국이나 일본의 사회 문화 환경과 달라 서브스크립션 적용은 시기상조”라며 “시장 규모가 커지고 밀키트 제품에 대한 신뢰도가 쌓이면 일상식 개념으로 정기배송 신청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사)농식품신유통연구원
2018-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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