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당(李盛堂) / 1910, 한국최초의 빵집
• 위치 : 전북 군산시 중앙로 1가 12-2
이성당(李盛堂)은 전라북도 군산시 중앙로 1가에 위치한 제과점이다. 1910년에 일본인이 '이즈모야' 라는 화과자점으로 문을 열어 영업해오다 1945년, 해방 이후 한국인이 현재 상호명으로 바꾸어 단 이후 대한민국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빵집이다. 서울특별시 서초동에도 '햇쌀마루'라는 상호로 분점을 운영 중이다.
오전 11시, 전북 군산 ‘이성당’은 빵집 답지않은 긴장감이 팽팽했다. 집게와 사각형 플라스틱 트레이로 ‘무장’한 손님들이 무언가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가게 뒤쪽에서 수레바퀴 구르는 소리가 들리자, 손님들은 일제히 소리가 나는 쪽으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손에 쥔 집게에는 한층 더 힘이 들어갔다. 종업원이 밀고 나오는 3단 수레에는 따뜻하고 윤기 반지르르한 단팥빵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종업원이 단팥빵을 진열대에 내려놓기 무섭게, 손님들이 집어담기 시작했다. ‘지금 이 빵을 사지 않으면 안된다’는 집단최면에라도 빠진 듯 보였다. 30개 넘게 트레이에 담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 많던 단팥빵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늘 이렇느냐”고 묻자, 수레를 밀고 나온 종업원은 “매일 단팥빵만 1만 개 넘게 나간다”면서 “주말에는 손님이 하도 많아 1인당 판매 개수를 10개로 제한하기도 한다”고 대단찮다는 듯 심드렁하게 말했다.
이성당은 현존하는 국내 빵집 중에서 가장 오래된 곳이다. 올해로 68년째다. 일본인이 운영하던 화과자점 ‘이즈모야’를 1945년 현 대표의 시아버지와 친인척이 인수해 오늘에 이르렀다.
다양한 빵이 있지만 최고 인기는 ‘쌀단팥빵’(1200원)과 ‘야채빵’(1400원), ‘블루빵’(700•2500원)이다. 쌀단팥빵은 얇은 빵 속에 팥소가 가득 들어있다. 비싼 팥은 적게 넣고 저렴한 빵이 더 많은 대부분 빵집 팥빵과 크게 차이 난다. 빵 총무게 130g 중 팥이 무려 90g이나 된다.
더 대단한 건 맛이다.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이 “어렸을 때 먹던 바로 그 맛”이라고 칭찬하지만, 실은 전혀 다른 빵이다. 밀가루가 아닌 100% 쌀가루로 만든 빵이다. 너무 달지 않고 구수한 팥소도 훌륭하다. 가늘게 썬 양파, 당근 등 채소를 마요네즈에 버무려 넣은 야채빵은 오븐에 굽는다.
덕분에 대개 튀겨서 만드는 다른 빵집의 야채빵보다 덜 느끼하다. 2006년 개발한 블루빵은 새로운 인기 상품. 버터, 우유, 달걀을 넣지 않고 쌀가루, 물, 소금, 약간의 설탕만으로 만들어 빵을 잘 먹지 못하는 이들도 속이 편안하다. 전화 주문도 가능하다. 택배로 주문 다음날 바로 간다.
일제 강점기 군산의 근대 제과점 이즈모야와 이성당.
사람들은 주변에서 제과점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어느 동네는 여러 개의 제과점이 자리하고 있으며, 빵과 커피를 함께 판매하는 거리가 생기기도 했다. 이러한 현상은 그리 오래 된 것이 아니다. 한국에 제과점이 자리 하게 된 것은 불과 1세기의 역사에 불과하다. 빵은 19세기말 선교사들에 의해 소개되었다. 빵의 전래는 대한 제국 시기 비밀리에 입국한 선교사에 의해 이루어졌으나, 확실한 연대나 선교사의 이름은 알 수 없다고 한다.
당시 선교사들은 숯불을 피운 후 떡시루를 엎고, 그 위에 빵 반죽을 올려놓은 다음 오이 자배기[둥글납작하고 아가리가 쩍 벌어진 질그릇]로 덮어 화로를 만들어 빵을 구웠다. 제품의 모양이 마치 우랑과 같다고 하여 ‘우랑떡’이라고 불렀는데, 이것이 최초로 소개된 빵 과자로 알려져 있다. 당시 빵은 ‘면포’라 불렀고, 카스텔라는 눈처럼 희다고 하여 ‘설고(雪餻)’라고 불렸다.
사실 한국의 제과 기술의 전래와 빵을 소비하는 문화의 확산은 일제 강점기와 깊은 관련이 있다. 일제 강점기 일본을 통해서 한국에 빵과 과자가 유입되었고, 이후 빵 기술자의 수가 증가하고 빵집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또한 한국 사람들이 소비하는 빵, 특히 팥 앙금이 가득 들어간 단팥빵은 서구에서 볼 수 없는 동양만의 독특한 빵이다. 단팥빵은 서구의 빵이 일본으로 전해지는 과정에서 일본인의 입맛에 맞게 변형되어 탄생한 것이다.
그 후 일본의 단팥빵이 한국에 전해지면서 우리들의 입맛에 맞게 변형되어 한국의 대표적인 빵으로 자리 잡았던 것이다. 빵의 전래와 빵과 관련된 소비문화가 일제 강점기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문헌 자료를 토대로 밝혀졌지만, 구체적인 제과점의 사례를 통해 밝혀진 것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군산에는 일제 강점기 운영되었던 제과점 ‘이즈모야[出雲屋]’의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어 흥미를 끌고 있다.
[기회의 땅 군산과 제과 문화]
조선 시대 군산에는 조창(漕倉)이 설치되어 있었다. 즉 군산은 개항 이전부터 미곡 집산지로서 유통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는 군산이 바다와 근접해있고, 주변 지역에는 김제 및 만경 평야가 펼쳐져 있는 우리나라 최고 미곡 생산지가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개항 이후 군산항은 새로운 근대 문물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자연 지리적 여건을 갖추고 있어 곡물을 일본으로 유출할 수 있는 주요한 통로로 기능하였다. 이러한 여건은 사람들로 하여금 군산을 기회의 땅으로 만들어 주었다. 이는 한국인과 일본인 모두에게 해당되었다. 일제 강점기 일본 정부는 일본인을 식민지국에 정착시키고자 하였다. 일본 정부는 한국으로의 이주를 권장했다. 경우에 따라서는 일정 금액을 보조해주기도 했다. 이러한 까닭으로 1900년(광무 4)과 1910년(융희 4) 군산 지역에는 일본인 인구가 증가하기 시작했다. 또한 한반도를 둘러싼 전시 상황이 일본에 유리해졌고, 특히 1904년(광무 8) 러일 전쟁에서의 승리 이후 일본인의 한반도 진출은 가속화되었다. 그 결과 군산의 인구는 해를 거듭할수록 급격히 증가했고, 군산은 새로운 도시의 모습을 형성해 갔다. 군산 내 일본인 인구의 증가는 자연스럽게 일본인들의 삶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제과 문화를 지역 사회에 등장하도록 했다.
[이즈모야의 등장]
이즈모야의 초대 사업주인 히로세 야스타로는 1869년(고종 6) 시마네현[島根県] 마쓰에시[松江市]에서 태어났다. 당시 도자기를 배로 운반하였는데, 그는 도자기 포장하는 일을 하였다. 이 후 그는 마쓰에시에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이즈모시[出雲市]’로 이사를 했다. 이곳에서 아내를 맞이하여 4남 1녀의 자녀를 두었다. 그리고 정확한 시기를 알 수 없으나, 히로세 야스타로는 시마네현 마쓰에시와 이즈모시에 거주하면서 제분 기술, 면 만드는 기술, ‘아라레(あられ)’라는 찹쌀 과자를 만드는 기술 등을 배웠다고 한다. 일본 시마네현[島根県]의 이즈모시[出雲市]와 마쓰에시[松江市]는 일본 내에서 전통 화과자로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곳이다.
그는 자식들을 군대에 보내지 않기 위해 성(姓)을 ‘엔조’에서 ‘히로세’로 바꾼 후 한국으로 이주해왔다. 그리고 군산에서 ‘이즈모야[出雲屋]’라는 제과점을 시작하게 된다. 처음 히로세 야스타로는 군산에서 이즈모야라는 조그마한 과자점을 열었다. 이즈모야는 일본 시마네현[島根県]의 이즈모시[出雲市]의 지명을 붙인 것이다. 초대 사업주인 히로세 야스타로가 이즈모시에서 왔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에서 주로 팔았던 제품은 아라레라는 과자였다. 아라레는 찹쌀을 잘게 썰어 약한 불에 살짝 데친 과자이다. 이는 찹쌀을 절구에 넣고 찧은 다음 새우를 넣고 만든다. 이즈모야에서는 새우를 넣어 만든 ‘에비 아라레(えびあられ)’를 동그란 캔에 담아 판매하였다. 그리고 과자점에서는 아라레 뿐만 아니라 모찌(もち) 과자, 화과자(和菓子) 등의 일본식 전통 과자도 판매하였다.
그의 첫째 아들인 히로세 켄이치[広瀬 健一]는 제과점 일을 도우며 일본식 과자 만드는 법을 차츰 배워나갔다. 그는 사가현 출신의 아내와 군산에서 결혼한 후 제과점 일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1920년대 초반에는 제과기술을 전문적으로 배우기 위해 동경으로 건너갔다. 그는 동경에서 주로 양과자 기술을 배워 한국으로 돌아왔다. 전문적인 제과기술을 배워 온 그는 손재주가 뛰어난 그의 동생 히로세 스케지로[広瀬 助次郎]와 함께 빵을 만들었고, 이즈모야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1920년대에는 아라레 과자점을 군산시 중앙로 1가로 확장하여 옮겼다. 이곳은 당시 군산의 중심 번화가였다. 히로세 야스타로는 두 아들과 함께 이즈모야를 본격적으로 운영하기 시작했다. 처음 아라레, 모찌와 같은 일본식 전통 과자들을 주로 판매했던 것과 다르게 단팥빵, 크림빵, 케이크와 같은 다른 종류의 양과자들을 선보였다.
1930년대에는 군산 내에 일본인 거주자가 증가하였는데, 이에 따라 제과점을 찾는 이들도 많아졌다. 이 때 히로세 켄이치는 아버지로부터 이즈모야를 물려받았다. 그리고 그의 동생 히로세 스케지로는 이즈모야 근처에 분점을 운영했다. 두 형제는 새로운 방식을 제과점에 도입했다. 그것은 바로 사람들이 제과점에서 빵이나 간단한 음식을 먹을 수 있도록 커피숍과 레스토랑을 함께 운영한 것이다. 이는 손님들에게 차를 낼 때 차만 내는 것이 아쉬워 생각해 낸 것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레스토랑 운영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1930년대 후반부터 일본은 전시 상황으로 접어들게 된다. 일본 정부는 전시 태세를 갖추면서 모든 물자를 통제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은 군산에 있는 거의 모든 일본 업자들에게 해당되었다. 제과점의 경우 제과 업자들도 빵을 만들 때 필요한 재료들을 통제받았다. 따라서 한 공장에서 빵을 만들어 군산 내의 여러 제과점에 일괄 배급해주는 시스템으로 전환하였다. 이 때 히로세 켄이치는 공장의 임원을 맡아 이즈모야가 부족함 없이 빵을 배급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또한 이 기간 동안 이즈모야는 군인들이 식사할 수 있는 식당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히로세 켄이치는 제과점의 성공으로 군산에서 부유한 생활을 했다. 하지만 해방과 동시에 군산 내의 일본인들은 서둘러 본국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히로세의 가족도 예외는 아니었다. 가족들은 서둘러서 짐을 꾸렸다. 하지만 히로세 켄이치는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고 군산에 남아 이즈모야를 지키고자 했다. 가족들은 너무나 완강했던 히로세 켄이치의 마음을 돌릴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히로세 켄이치를 제외한 다른 가족들만 일본으로 떠나기 위해 배에 올랐다. 가족들은 군산에서 작은 배를 탔다. 배는 스무 명 정도 탈 수 있을 정도로 작았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배가 고장이 나서 여수에서 며칠을 머무르게 되었고, 이때 히로세 켄이치의 부인이 다시 군산으로 돌아갔다. 히로세 켄이치는 부인의 설득에 결국 일본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이들은 부동산 문서와 증권 관련 서류들을 챙겼다. 또한 돈과 돈이 될 수 있는 옷, 신발, 음식 등을 챙겨 여수로 갔다. 그리고 히로세 가족은 부인의 고향인 일본 사가현으로 돌아가 정착하게 되었다.
[제과점 이즈모야의 특징]
1910년 이즈모야는 찹쌀과자 아라레를 파는 조그마한 상점이었다. 1920년대 제과점을 군산의 번화가 ‘메이지마치 2쵸메 85번지의 2’로 확장했다. 그 규모는 군산에서 가장 컸다고 한다. 이즈모야의 특징을 공간, 유통 구조, 기술과 기구, 경영 네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 볼 수 있다. 쇼윈도와 노렌[暖簾]을 통해 본 공간의 특징 이즈모야는 당시 군산의 중심 번화가에 위치해 있었다. 이즈모야의 총 면적은 약 423㎡로 목조 건물에 기왓장 지붕으로 지어진 2층짜리 건물, 목조 아연 지붕으로 된 주방 하나 딸린 1층짜리 주택, 목조 건물에 아연 지붕으로 된 1층짜리 공장 한 동이 있었다. 1층은 제과점이었고, 2층은 가족들이 생활하는 공간이었다. 목조 아연 지붕으로 된 1층짜리 주택은 한국 종업들이 숙식을 했던 곳이었다. 1층 제과점 한 쪽에는 자리한 공장에서는 빵과 과자를 구워냈다.
이즈모야의 1층 제과점의 경우 입구 앞에 쇼윈도를 마련했다. 쇼윈도에는 빵과 과자를 넣어 진열하여 근대적인 판매 모습을 갖추었다. 쇼윈도에 진열된 제과 제품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소비를 유혹하기에 충분했다. 일본 상점에서는 상호나 가문을 새겨 놓은 천을 상점 입구에 걸어놓는데, 이를 노렌[暖簾]이라 한다. 노렌은 햇빛을 가리고 바람막이 구실을 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 상가를 표시하는 상징이 되기도 한다. 이즈모야의 간판과 이즈모야 입구 양쪽에 있는 노렌은 사람들의 시선을 한눈에 사로잡았다. 이는 이즈모야를 알리기 위함이었다. 즉 간판과 노렌의 이미지와 문자는 사람들로 하여금 관심을 이끌어내었고, 이는 시각적인 홍보 효과를 가져왔다. 즉 쇼윈도와 간판 그리고 노렌으로 꾸며진 외관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왔고, 이는 사람들의 소비를 자극하는 근대의 소비 공간이라 할 수 있다.
한편 1930년대부터 이즈모야에서는 제과점 옆에 공간을 마련하여 레스토랑과 커피숍을 함께 운영했다. 레스토랑과 커피숍은 서양의 외식 문화를 받아들인 것이다. 레스토랑에서는 양식을 판매하였다. 커피숍에서는 커피와 함께 빵과 케이크를 판매하였다. 이즈모야의 레스토랑과 커피숍 테이블과 의자를 두었고, 제과점 앞에는 쇼윈도를 두었다. 새로운 유통 구조를 통해 들여온 재료와 상품 초기 이즈모야에서는 아라레가 주요 상품이었다. 아라레는 찹쌀을 잘게 썰거나 절구에 넣고 빻아 곱게 만든 후 이것을 약한 불에 살짝 데친 과자이다. 일반적으로 불에 데쳐서 만들기도 하지만 기름에 튀겨서 내는 것도 있다.
이때만 해도 이즈모야에서는 버터와 치즈와 같은 유제품을 넣지 않았다. 오븐의 사용도 찾아 볼 수 없었다. 이즈모야의 초대 사업주의 아들인 히로세 켄이치는 제과기술을 전문적으로 배우기 위해 동경으로 갔다. 이때 그는 크림빵, 단팥빵, 케이크와 같은 양과자 기술을 배웠다. 양과자는 밀가루를 주재료하고 버터와 향료를 넣어 반죽한 뒤 오븐에 구워 만든다. 이는 일본 전통 과자를 만드는 방법과 다른 것이었다. 그는 얼마간 동경에서 양과자 만드는 기술을 배워 군산으로 돌아 왔다. 그리고 손재주가 좋았던 그의 동생 히로세 스케지로와 함께 양과자를 만들기 시작했다. 양과자를 만들기 위해서는 기존에는 없는 새로운 재료들이 필요했다. 즉 빵에 들어가는 버터와 치즈와 같은 재료들이 필요했는데, 항구 도시인 군산은 재료를 쉽게 구할 수 있다는 지리적 이점을 갖고 있었다.
일본에 본사가 있었던 메이지 제과[明治の菓子]는 군산 지역에 지점을 두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빵에 들어가는 버터와 치즈와 같은 유제품을 비롯하여 캐러멜, 초콜릿, 사탕과 같은 완제품을 제과업자들에게 공급했다. 이모즈야는 메이지 제과의 일을 함께 했다. 다른 제과 업자들을 대신해서 메이지 제과에 주문을 넣어주었고, 메이지 제과의 수익 중 일정 부분을 이즈모야에서 가졌다. 따라서 이모즈야에서는 빵의 주재료인 밀가루는 군산에서 구했고, 설탕, 향료, 버터, 치즈, 크림 등의 부재료는 일본에서 들여왔다. 이러한 재료들로 만들어진 빵은 군산 지역에 소개되었다. 이 때 군산 사람들은 빵을 통해 버터, 치즈, 크림 등의 유제품을 처음 접하였다. 이들이 꼭 직접 맛을 확인한 것은 아니지만, 이들은 당시 군산의 번화가를 오며 가며 간접적으로 경험하고 있었다. 그리고 군산 지역 사람들은 떡과 전통 과자류에서 느낄 수 있던 한국의 전통적인 맛과는 다른 맛을 경험하게 되었다.
본국으로부터 수입한 기구와 기술 일제 강점기 군산 지역에는 빵을 만들 수 있는 오븐과 조리 기구가 거의 없었다. 제과 업자들은 빵을 굽는 데 필수적인 오븐을 일본에서 배로 가져 왔는데, 안전하게 운반하는 데에 한계가 있었다고 한다. 이에 일본 제과 업자는 조선인 기술자에게 일본에서 보았던 오븐의 모습을 설명하거나 그림으로 그려주며 직접 만들어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필요한 조리 기구는 조직을 구성하여 오사카에서 단체로 주문했다. 필요에 따라서는 조리 기구를 구입하러 직접 오사카로 가기도 했다. 이즈모야는 일본에서 가져온 조리 기구와 신식 기계들을 이용하여 체계적으로 빵을 만들었다. 계량컵을 이용하여 재료의 양을 측정하였고, 오븐을 이용하여 빵을 구워냈다. 특히 일제 강점기 대부분의 제과점에서는 목탄 오븐을 사용했지만, 이즈모야는 최고급 전기 오븐을 사용했다. 이처럼 이즈모야에서는 전기 오븐, 팥 앙금을 만드는 기계, 아이스크림 기계, 얼음분쇄기, 계량컵 등의 근대적 조리 기구를 사용하였다. 또한 이즈모야에서는 진열대를 이용하여 빵과 케이크를 정리하였고, 식당에는 테이블과 의자를 두어 손님들을 맞이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경영상의 특징
초대 사업주인 히로세 야스타로는 처음 첫째 아들과 둘째 아들과 함께 이즈모야를 운영했다. 이즈모야는 군산 지역의 제과점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제과점이었다. 이 후 빵을 찾는 이들이 증가하자 이즈모야 근처에 분점을 내었다. 본점은 첫째 아들인 히로세 켄이치, 분점은 둘째 아들인 히로세 스케지로가 운영하였다. 이즈모야는 과자부, 영업부 또는 서빙부, 차(茶)부, 식당부로 나누어 운영되었다. 과자부는 빵과 케이크를 만들었다. 차부에서는 차를 만들었다. 식당부는 레스토랑에서 주문한 양식을 담당했다. 영업부 또는 서빙부에서는 빵과 차를 손님들에게 나르고 판매하는 일을 했다. 이처럼 이즈모야는 내부 조직을 나누어 상당히 체계적으로 운영되었다. 당시 지점, 단합회 등과 같이 제과점과 관계를 맺고 있었던 외부 조직도 주목할 만하다.
당시 군산에는 이즈모야 뿐만 아니라 개성당(開城堂), 조화당(調和堂) 등의 여러 제과점이 있었다. 초기에는 일본인이 운영하는 제과점이 대부분이었지만, 이 후 조선인이 운영하는 제과점이 한두 군데 생겼다. 군산의 제과 업자들은 고국을 멀리 떠나 의지할 곳이 없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들은 친목과 이익추구를 위해 ‘군산 과자 상조합’를 조직했다. 이들은 함께 모여 제과점 운영과 관련하여 상의를 하기도 하고, 필요한 재료와 조리 기구를 단체로 본국에 주문하는가 하면, 단합을 위해 한자리에 모여 어울렸다. 이를 통해 과거 전통사회에서 가족, 친지, 이웃들과 모이는 것과는 다른 특정한 이익을 위한 모임의 형태를 알 수 있다.
이즈모야의 종업원은 20명 가까이 있었는데, 모두 조선 사람이었다. 그리고 식당부에서 일했던 여성 한 명을 제외하고 모두 남자였다. 이들 중 몇 명은 이즈모야 뒤편 건물에서 숙식하며 지냈다. 이즈모야에서 조선인을 고용한 것은 인건비를 절약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들에게 제과기술을 가르쳐주지는 않았다. 빵과 과자는 철저하게 히로세의 가족들이 만들었다. 조선인 종업원은 단순히 이즈모야의 허드렛일을 도왔다. 이즈모야의 종업원들은 부서에 따라서 제복(制服)을 다르게 입었다. 제복은 일본식 기모노를 활동에 편리하도록 개조한 형태였다. 영업부는 와이셔츠와 바지를 입었고, 판매하는 사람은 양복을 입었다. 배달하는 사람은 ‘출운옥(出雲屋)’이라고 쓰여 진 제복을 입었다. 자신이 속한 상점의 이름을 쓴 옷을 한텐[半纏]이라 하는데, 이는 단순한 노동복이라기보다는 자기가 소속해 있는 집단을 공중에게 보이는 표지이다. ‘출운옥(出雲屋)’이라고 쓰여 진 제복인 한텐은 종업원을 관리하기 위한 목적뿐만 아니라 다른 목적도 있었다.
‘군산 단합회’의 사진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군산 지역에는 여러 제과점이 있었다. 이들은 소비자의 구매를 부추기기 위해 또는 많은 제품을 팔기 위해 각자 제과점에 맞는 방법으로 홍보를 했다. 이즈모야의 경우 ‘출운옥(出雲屋)’이라고 쓰여 진 한텐을 활용한 것이다. 즉 이들은 한텐을 입고 군산 지역을 다니며 이즈모야를 자연스럽게 홍보하였다.
[새로운 맛에 대한 조선인의 경험]
군산 지역 일본 거주자가 증가하면서 여러 제과점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일본 전통 과자를 팔았던 제과점들이 차츰 양과자를 만들기 시작했다. 제과점에서는 밀가루, 버터, 설탕, 소금, 이스트를 넣어 반죽하고, 동그란 모양을 만들어 안에 팥 앙금을 넣어 구워냈다. 또는 빵을 구워낸 후 빵 사이에 크림이나 잼을 넣었다. 다양한 모양과 종류의 빵은 조선인들에게 신기한 모습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이는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데 충분했다. 하지만 당시 빵과 과자는 일부 계층만이 사먹을 수 있는 고급 음식에 속하였다.
대부분의 조선인들이 생활고에 시달리던 하층민이었지만, 돈을 번 조선인들도 적지 않게 있었다고 한다. 한 예로 군산 지역에 성행했던 ‘미두(米豆)’는 몇 명의 조선인들을 벼락 부자로 만들어줬다. ‘미두’는 오늘날의 증권과 비슷한 것으로 쌀을 가지고 투기하는 것을 말한다. 조선인들은 ‘미두’를 하여 재산을 잃기도 했지만, 반대로 수익을 얻은 이들도 있었다. 이처럼 당시 군산 지역 조선인들은 하루 생활이 어려웠던 노동자들로부터 벼락 부자가 된 자본가들에 이르기까지 여러 계층이 있었다. 생활이 윤택했던 이들은 제과점을 자주 드나들 수 있었다고 한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군산에는 대규모 농사를 짓거나 자본을 축적해서 부자가 된 사람에서부터 한 끼의 식량을 걱정할 정도로 생활고에 시달리던 사람들까지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생활하고 있었다. 이러한 이국적인 먹거리는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특별한 날에만 잠시 즐길 수 있는 호기심과 선망의 대상이었다고 볼 수 있다.
예컨대 ‘센베이(せんべい)’라고 불리던 전병(煎餠)은 명절, 소풍, 운동회과 같은 특별한 날 어쩌다가 먹을 수 있는 기회를 얻기도 했다. 조선인들은 제과점에서 종업원으로서 일하며 빵과 빵 문화를 경험하게 되었다. 요컨대 조선인들 입장에서 일본인이 운영하는 제과점과 그 안에서 팔고 있는 빵과 과자들을 소비하는 일부 계층과 행인 또는 관람객으로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나 혹은 상상으로 그 맛에 대한 간접 경험을 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 더 많았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빵과 과자를 직접 소비하는 계층이 적었고, 소비할 수 있는 상황도 제한적이기는 했다. 하지만 행인이나 관람객으로 먼발치에서 또는 간접적으로 군산의 조선인들은 이국적인 맛을 호기심과 선망의 대상으로 두고 있었다는 점이다.
[해방 이후 문을 연 이성당]
군산 지역의 이성당은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제과점으로 알려져 있다. 해방 후 자리 잡은 이성당의 초대 사업주는 이즈모야 근처에서 조그마한 과자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사업주는 ‘이씨’ 성을 가진 사람이었는데, 이에 ‘이(李)씨 성을 가진 사람이 운영하는 집’ 즉 ‘이성당(李姓堂)’이라고 불렀다. 초기의 과자점은 지금의 이성당 자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그는 과자를 구워 팔면서 제법 수익을 남길 수 있었다. 작은 판자집에서 시작한 이성당은 점차 사람들의 입소문을 타고 많은 사람들이 찾았다. 이씨는 제과점을 좀 더 크게 확장하고자 했다.
1947년 이즈모야가 적산 가옥으로 등록되었다. 이씨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돈과 모자란 돈을 대출 받아 이즈모야 건물의 반절을 불하 받았다. 이씨는 일본 제과 업자를 통해 기술을 배운 종업원을 고용하여 본격적으로 과자를 팔기 시작했다. 이씨는 제과점뿐만 아니라 재료 상사도 함께 운영하였다. 당시 운영했던 삼영 상사는 군산 지역의 제과점 업자들이 모여 설립했다. 삼영 상사는 제과에 필요한 재료를 취급했다. 즉 빵을 만들기 위해서 설탕과 밀가루가 필수적인데, 재료를 쉽게 구하기 위해 재료 상사를 설립한 것이었다. 이씨는 계산이 빠르고 다른 업자들에 비해 젊어 삼영 상사 대표를 맡았다. 삼영 상사는 재료를 대량으로 주문해서 각 제과점에 배달을 하는 일을 하였다. 주로 재료는 군산에서 구할 수 있는 것이었으나 가끔 서울로 직접 가서 재료를 사오기도 했다. 이후 이성당과 삼영상사가 점점 바빠지자 이씨 부모님의 고향인 남원에서 살고 있던 친척들이 이성당의 일을 돕기 시작했다. 이씨는 다른 사업을 시작하기 위해 서울로 떠나면서 제과점을 친척인 조씨에게 넘겼고, 지금은 조씨의 며느리인 김씨가 이성당을 운영하고 있다.
[의의]
이즈모야 사례는 일제 강점기 지역 사회에 빵과 빵 문화가 어떻게 전래되어 정착되었는지의 과정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즈모야가 생산, 유통시킨 것은 새로운 맛을 지닌 빵과 과자만이 아니라, 근대적인 공간에서 흘러나오는 문화까지 포함된 것이었다. 유리로 만든 투명한 쇼윈도와 간판을 달고 소비자들을 유혹하는 공간과, 말끔하고 세련된 유니폼을 입고 훈육된 방법으로 서빙을 하는 종업원들, 근대적인 경영 방법으로 이윤 추구에 성공한 제과점이 풍기는 풍요로움 등이었다. 그러나 당시 이러한 문화를 즐기며 소비할 수 있었던 사람들 가운데 조선인들은 극소수였을 것이다. 대신 종업원으로, 행인이나 관람객으로 이즈모야가 보여주고 있는 근대적인 빵 문화를 간접적으로 경험하였을 뿐이라는 점을 지적했다.
당시 군산에는 거주하던 일본인 집단과 조선인 집단의 구성이 단순하지 않았을 것이다. 민족적, 경제적 차이에 따라서 음식 소비에서도 차이가 났을 것이고, 특히 빵과 과자는 대중적인 음식이 아니어서 특정한 계층만이 소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간혹 경제적인 여유가 없는 사람들은 특별한 날에만 즐길 수 있는 음식이었다고 한다. 당시 직접 맛본 사람들만이 소비의 주체는 아니었다. 이즈모야의 빵과 과자를 간접적으로 경험한 사람들이 더 많았다고 보여 진다. 제과점 앞을 오가는 행인으로 눈, 코를 통해서 맛을 느낄 수 있었고, 귀를 통해서 빵과 빵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즉 그 맛을 간접적으로 경험하는 집단의 사람들은 ‘행인’ 또는 ‘관람객’에 불과했지만, 이들이 지역의 제과점이 자리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맛을 수용하고 소비하는 토양을 만드는데 일조를 하고 있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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