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업보국' '인재제일' ‘합리추구’
삼성경영학은 호암의 3대 이념인 ‘사업보국’, ‘인재제일’, ‘합리추구’가 그것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핵심 기업 삼성의 창업스토리〉
삼성그룹의 창업자인 호암 이병철 회장은 1910년 2월 12일 경상남도 의령군 정곡면 중교리에서 출생했다. 그는 유교적 가정에서 출생해 그 가풍아래 성장했다. 그의 조부는 유학자였고 그의 부친 역시 유학을 숭배했다. 호암은 5세부터 5년간 그의 조부가 설립한 문산정(서당)에서 한학을 배웠다. 이 때문에 호암은 항상 논어를 좌우에 두고 애독했다고 한다.
이런 영향 때문이었는지 호암은 회견장이나 교육장에서 논어를 자주 인용했다. 「호암자전」에는 ‘도의는 천윤의 시초’, ‘효는 만득의 근원’, ‘사필귀정’ 등 논어에 관한 인용문이 많이 보인다.
호암은 “내 생각이나 생활은 논어의 세계에서 벗어날 수 없다”라고 말했다. 논어를 생활신조로 삼았던 호암의 철학·사상·인생관·경제관·세계관은 유교사상이나 유교윤리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호암이 사업보국이라는 기업동기를 가지고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해방 이후. 호암은 해방으로 나라가 독립을 찾은 후 생각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고 한다. 일제시대의 나라 잃은 서러움과 이후 전쟁으로 겪은 아픈 기억이 그로 하여금 국가는 강하고 부유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기업을 설립해 국가와 국민에게 봉사해야겠다는 생각을 굳히고 사업보국이라는 이념을 기업동기로 하여 기업의 설립에 매진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의 경영이념에 따라 1950년대 이후 삼성은 급속하게 발전했다.
삼성은 산업발전단계설에 입각해 여러 계열기업을 단계적으로 설립·육성했다. 삼성은 한나라의 기업은 생필품 등 소비재생산을 하는 경공업단계에서 중공업단계로 이행하고 그 다음에는 중화학공업단계로 이행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 다음 단계는 첨단기술 산업으로 이행할 것으로 내다봤다.
삼성이 1950년대의 삼성물산공사의 종합무역업에서 생필품등 소비재생산을 하는 경공업인 제일제당과 제일모직을 설립하는 쪽으로 사업전환을 한 것은 삼성의 산업발전단계설에 따른 것이었다.
그리고 1960년대의 중공업, 1970년대의 중화학공업으로의 진출 역시 산업발전단계설에 따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980년대에는 세계정세를 분석하는 가운데서 당시의 미래첨단산업은 반도체산업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반도체산업에 뛰어들게 되었다고 한다.
삼성이 산업발전단계에 따라 기업을 설립하고 발전시켰다고 하더라도, 무턱대고 아무 산업이나 선택한 것은 아니다. 50년대의 한국사회가 요구하는 산업이 설탕이나 양복 등 생필품이었기 때문에 호함은 제일제당과 제일모직을 설립했던 것이다.
제일제당과 제일모직은 그 당시의 선도 산업으로 삼성은 다른 기업에 앞서서 시대가 요구하는 새 산업을 선택해 경제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담당했다. 삼성이 설립한 60년대의 중공업, 70년대의 중화학공업 및 80년대의 반도체산업은 그 당시의 선도 산업으로서 한국의 경제발전을 주도했다.
1982년에 미래에는 반도체산업이 세계의 주도산업이 된다고 예측한 삼성은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반도체산업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1983년 10월에 삼성전자 내에 반도체·컴퓨터사업팀을 조직하고, 다음 해인 1984년 3월에는 중앙일보 매스컴에 이 사업을 광고했다. 또한 수원 기흥단지 내에 내·외자 1000억 원을 투입하여 공장 건설에 착수했다. 1984년 5월에는 삼성반도체·통신기 및 VLSI 공장을 준공했다.
이렇게 설립된 삼성반도체통신 기흥공장에서는 가동과 더불어 64KD램이 제1라인에서 생산되기 시작했고, 1985년 5월에는 다시 1900억 원을 투입하여 256KD램을 주축으로 하는 제2라인을 준공시켰다. 이 256KD램은 삼성반도체 자체 내에서 독자적으로 개발한 것이다.
◇사업보국의 역사
삼성은 기업경영에 있어서 많은 시련과 역경을 극복하는 동시에 재계의 정상에 오른 기업이다. 따라서 삼성의 역사는 시련과 변신의 역사라고 말할 수 있다.
삼성은 일제시대에 조선식산은행에서 돈을 빌려 토지사업에 투자를 했다가 실패를 했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조선총독부의 경제통제령(임시자금조정법)이 내려지고, 그 결과 조선식산은행 등 금융기관들의 대출자금 회수가 강행되었다.
삼성은 조선식산은행에서 빌린 돈을 강제적으로 회수 당하게 되었고, 설상가상으로 토지 값이 급락해 파산하게 되었다. 삼성은 협동정미소·일출자동차회사 도산 등 모든 재산을 처분해 은행 빚을 갚고, 토지도 헐값으로 처분하면서 결국 도산하고 말았다.
삼성은 토지 투기로 많은 돈을 벌었으나 은행의 강제 자금회수로 일시에 도산한 것이다. 이때의 쓰라린 경험으로 호암은 다시는 투기나 요령 또는 부정한 행위로 사업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게 된다. 그리고 해방 이후에 간신히 재기에 성공했다.
1961년 5·16 군사정부에 의해 호암은 부정축재자 제1호로 지명수배를 받았다. 당시 그는 도쿄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에 당장 체포되지는 않았으나 얼마 후 귀국하여 군사정부에 전 재산을 헌납한다는 각서를 써야 했다. 그리고 정부의 경제개발개혁에 참여하고, 벌금은 사업을 하면서 갚는 것을 조건으로 풀려났다. 벌금을 갚음으로써 부정축재 문제는 해결되었지만 동시에 그가 소유하고 있던 은행주식(1958년 상업은행주식 33% 소유, 1959년 조흥은행주식 55% 소유)은 모두 국가에 헌납됐다.
이처럼 삼성은 일제시대 토지사업의 실패·박정희 군사정부에 의한 부정축재자 지명에 의한 벌금형과 소유금융기관의 전 주식헌납·한국비료공장의 헌납 등 뼈아픈 시련을 경험하면서, 그 시련을 거울삼아 정도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한다. 삼성은 요령이나 부정한 거래, 부실한 경영은 실패한다는 교훈을 얻은 것이다.
삼성그룹을 태동시킨 삼성경영학이 성문화된 것은 1973년이다. 즉 사업보국·인재제일·합리 추구의 세 가지 항목으로 되어 있는 삼성의 경영이념이 성문화 된 것은 1973년에 수립된 ‘제2차 삼성경영 5개년계획’에서다.
그러나 삼성그룹이 추구하는 경영이념은 삼성의 창업 때부터 기업 활동에 내재·전승되어 온 기업정신을 단지 요약·공식화 시켰을 뿐이다.
다시 말해서 8·15 해방 후 삼성의 기업 동기는 사업보국이었으며, 삼성의 경영사상은 사업보국·인재제일·합리추구였다. 삼성은 이 같은 경영사상에 입각해 삼성그룹 산하의 각종 기업을 설립했다. 삼성의 경영사상은 삼성그룹의 이념으로서 기업경영의 지침이 되었으며, 그것은 삼성맨이 공감하는 삼성정신이 되어 삼성그룹의 정신적 지주역할을 했다.
한편 1984년에는 삼성정신이 설립되었는데 이것은 삼성그룹의 경영이념을 일상생활 속에서 실천해 나가기 위해 좀 더 구체적이고 명백하게 제시된 삼성인의 생활 지표였다. 삼성정신은 성문화되기 이전인 삼성그룹의 창업 때부터 삼성의 경영이념과 함께 지켜왔던 것이다. 즉 삼성정신은 경영사상의 실천이념으로서 삼성맨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 있다. 따라서 경영사상에는 삼성정신까지 포함하게 되는 것이다.
기업가의 철학이나 경영신조가 기업의 이념으로 명시될 때 이를 경영사상이라고 하며 경영이념은 기업환경의 변화에 따라 변화 내지 확대되는 이른바 미래지향적인 것이다.
삼성의 경영이념은 창업기의 사업보국·인재제일·합리추구에서 점차 삼성정신인 창조정신·도덕정신·제일주의·완전주의·공영공존정신으로 확대 해석되어 있는 것이다. 삼성의 경영이념인 사업보국은 이미 삼성그룹의 사훈이 되었다. 삼성그룹의 경영사상은 삼성인이 공유해 왔으며, 삼성인의 의사결정과 경영행동의 기준이 되어 있다. 또한 그 경영이념은 삼성인의 나침반 같은 것이기도 하다.
삼성경영학은 창업자인 호암의 경영철학에서 그 틀을 형성했다. 3대 이념인 ‘사업보국’, ‘인재제일’, ‘합리추구’가 그것이다. 삼성의 모든 경영 활동이 지향하는 궁극의 목표가 사업보국의 이념이라면 인재제일과 합리추구는 그 이념을 실현하는 수단과 행위의 규범이라 할 수 있다. 인재 육성을 통해 합리적인 방법으로 사업을 발전시켜 국가에 기여한다는 것이다.
◇호암과 삼성반도체
그래서 착안한 사업이 ‘제일제당’이었다. 수입대체산업으로 우리나라에서 근대 산업시설을 토대로 갖춘 최초의 회사였다. 1953년의 일이다. ‘제일’이라는 사명은 ‘제일의 기개를 갖고, 한국 경제의 제일주자로서 국가와 민족의 번영에 크게 기여하자’라는 취지에서 채택되었다. 공장 설비는 모든 비용을 합쳐서 약 18만 달러가 소요되었는데 기계의 조립·설치·시운전을 어떻게 할 것이냐가 문제였다.
그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단 한사람의 일본인도 우리 땅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했다. 기술자도 예외가 아니었다. 결국 국내 기술자들이 달려들어 그 일을 해냈다. 제일제당의 건설로 우리 국민은 우리 손으로 제조한 싼 값의 설탕을 맛보게 되었다.
삼성은 민간 기업으로서는 처음으로 설탕 생산(1953), 서독에서 모직 플랜트를 민간 무역에 의해 수입(1954), 소모복지 생산(1955), 민간 차관 제1호로 한국비료 시설용 차관 4390만 달러의 도입(1965) 등을 실현했다.
그 이후 기술 혁신의 시대를 맞이해 진공관과 브라운관(1979)·야시경(1979) 생산에 이어서 제트 엔진의 조립(1981)·X선 필름(1983)·퍼스널 컴퓨터(1983)·8미리 VTR(1983)·마이콤(1983)·64K D램(1983)·제트 엔진 부품 생산(1983)·256K D램(1984)의 개발 등으로 언제나 업계의 선두 주자로 개척의 길을 달려 왔다.
사업의 요체가 시대의 움직임을 예리하게 통찰하는 데 있다는 신념 아래 호암은 국제 정세의 변화와 세계 시장의 추이를 눈여겨보았고, 그 속에서 배양된 국제 감각으로 언제나 한 발 앞서가는 선견력을 발휘했다.
전후 폐허 혹에서 원조 물자에만 의존하고 있던 시절, 수입대체 산업으로 도전적 모험을 했던 제일제당과 제일모직의 설립을 통해 삼성은 현대적인 대기업으로 한발을 내디뎠고, 1970년대의 중화학공업 참여와 1980년대부터 시작된 첨단 산업으로의 과감한 변신을 통해 글로벌 기업으로 그 면모를 드러냈다.
통찰력, 창의성을 통한 자기 변신의 노력은 호암이 50여 년간 최고 경영자로서 불후의 성가를 받을 수 있게 한 절대적 비법으로 보여진다. 호암이 삼성정신의 첫 머리에 놓고 있는 ‘새로운 것을 탐구하고 개척한다’라는 창조정신은 곧 변화에 기민하게 대처하면서 미지의 분야에서 과감하게 사업을 추진하는 것이다.
“선도 기업이 되기 위해서는 과감한 궤도 수정을 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기업은 새롭게 살아날 수 있게 된다. 재생재흥에의 혁신적 기풍을 이루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호암의 당부는 기업가의 프론티어 정신과 직결된다.
그의 기업가로서의 프론티어 정신이 유감없이 발휘된 사례가 호암의 말년에 시작된 반도체사업이었다.
호암이 반도체사업에의 투자를 구체적으로 결심한 것은 고희를 맞은 1980년이었다. 당시 일본을 방문 중이던 호암은 전후 일본 경제부흥계획의 입안자 가운데 한 사람인 이나바 슈조 박사를 만나 그로부터 “앞으로의 산업은 반도체가 좌우한다.
경박 단소한 물건을 만들어야 한다”는 의견을 들은 것이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그 후 1982년 미국에 갔을 때 그곳의 산업 시설을 두루 돌아보고 “반도체 진출은 늦을수록 뒤쳐진다”라는 생각이 굳어져 현지에서 본사에 전화를 걸어 사업 착수를 지시하면서 본격화된 것이다.
그러나 반도체사업에 대한 호암의 집념은 시기적으로 이보다 훨씬 거슬러 올라간다. 그 집념은 한 나라 최고 기업인으로서 가졌던 그의 굳은 소신이기도 했다.
◇이건희 시대의 개막
1987년 삼성그룹의 제2대 회장으로 취임한 이건희 회장은 이제까지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글로벌 경영환경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 첫째는 1990년대부터 촉발된 소련체제의 붕괴, 동유럽 공산체제의 몰락, 중국의 개방으로 인한 경영환경의 급변이었다. 이로 인한 글로벌화가 국가의 최대 아젠다가 되었으며, 그동안 글로벌화에 내면적으로 역량을 키워온 삼성은 웅비할 준비를 갖추게 되었다.
두 번째, 세계는 아날로그시대에서 디지털시대로 전환하고 있었다. 삼성전자 등 디지털시대의 선봉에 선 기업들이 디지털화의 선두에서 삼성그룹을 이끌었고, 이는 한국정부의 IT정책과도 맞아 떨어졌다.
이건희 회장의 신경영은 이러한 경영환경에서 빛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정부의 정책·기업의 역량·이건희 회장의 리더십이 21세기를 선도하는 창조적 기업의 탄생을 이끌어내게 되었던 것이다.
이건희 회장의 삼성경영학은 인간존중, 기술 중시·자율경영의 세 가지 항목으로 구성된다. 그는 선대의 삼성경영학을 창업이념으로 규정하고, 삼성그룹의 기본 이념을 견지하는 한편 새로운 삼성경영학을 강조했다.
삼성그룹의 2대 회장으로 취임한 이건희 회장은 1988년 3월 20일 창립 5주년을 맞이해 제2의 삼성경영학을 선포하였다. 제2의 삼성경영학으로서 당초 아홉 가지 항목(위기의식·인식의 전환·업의 개념·전략적 기회경영·기술 중시의 경영·인간존중의 경영·구매의 예술화·자율경영의 실천·그룹공동체 의식)이 선포되었으나 이들 중 실천되어야 하는 핵심 덕목으로 ‘자율경영’·‘기술 중시’·‘인간존중’의 세 가지 항목이 선택되어 1993년 3월 창립 55주년에 삼성경영학으로 정식 채택되었다.
전 세계에서 영입한 전문가들로 구성된 삼성의 싱크탱크는 그 자체로도 한국의 싱크탱크 중 최고라 할 수 있다. 이건희 회장의 삼성에 대한 노력은 세계최초의 기업을 육성해 고용을 확대하고, 저렴하고 우수한 제품을 전 세계에 공급해 전 지구적인 산업 부흥에 이바지 하는데 삼성의 존립의무가 있다는 확고한 신념에 고무되어 왔던 것이다.
이건희 회장은 삼성경영학에서 경영자로서 갖추어야 할 요건을 선대에 이어 다음과 같이 규정했다.
“경영자는 시대를 통찰할 수 있는 눈과 국제적인 감각이 있어야 한다. 또 인재를 키워 능력을 마음껏 발휘할 만한 일을 맡기고 생활을 안정시켜주며 희망을 주어야 한다. 또한 경영자는 인류와 국가·사회에 유익한 것인가에 대한 가치관을 가지고 기업을 키워나가야 한다. 그리고 벌어들인 돈은 어떤 형태로든 국민에게 다시 환원시켜 사회와 회사를 공존경영케 할 책임과 사명을 져야 한다.”
이건희 회장 재임 시 삼성경영학은 큰 위기에 직면했다. 바로 1997년의 IMF외환위기와 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였다. 하지만 이건희 회장의 위기관리 능력으로 삼성은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성과를 거두게 됐다. 두 차례의 위기 후 삼성의 기업실적이 괄목할 만큼 신장되었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이건희 회장은 ‘위기경영론’의 창안자로 알려져 있다. 1988년의 회장취임 이래 거의 5년마다 독특한 위기론을 제시하면서 삼성그룹을 이끌었다.
그는 1993년 “바꾸자(처와 자식을 빼고 모두 바꾸자)”, 1998년 “버리자(IMF 위기극복을 위해 구조조정이 불가피하기 때문에 과감히 버리자)”, 그리고 2002년에는 “찾아라(5~10년 후 무엇을 먹고 살 수 있는가를 찾아보자)”라고 강조하면서 급변하는 사회·경제 환경에 대응했다. 2000년에는 신 위기론을 제시했다.
이건희 회장이 주장하는 아젠다는 삼성그룹의 본사는 물론 각 계열사의 사장(간부)을 통해 전 직원에게 전달된다. 이건희 회장은 경영에는 거의 간섭하지 않고 사장단을 중심으로 책임경영제를 실시하고 있다.
유교를 토대로 한 가족주의적 회사공동체인 삼성의 경영사상은 ‘삼성가족’을 형성하고, 삼성가족의 구성원은 삼성맨( Samsung Man)으로서 그룹 발전의 초석이 되어 있는 것이다.
삼성그룹은 한국의 전통사상과 서구의 합리사상을 접목한 한국형 회사공동체로서 세계시장을 누비고 있는 기업집단이며, 그것은 국적이 없거나 국적이 애매한 글로벌기업인 다국적 기업과는 차이가 있다.
<출처=비즈니스맵, 왜 삼성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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