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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FA World Cup〕월드컵의 영웅들

Paul Ahn 2022. 11. 25. 14:32

FIFA World Cup〕월드컵의 영웅들

 

⊙펠레(Pele 1940 ~ ) / 브라질, 축구황제

 

본명 : 에드송 아란치스 두 나시멘투(Edson Arantes do Nascimento)

출생 : 1940 10 23, 브라질 트레스코라송스

 

 

https://youtu.be/JVsWfmNHbZQ

 

에드송 아란치스 두 나시멘투(Edson Arantes do Nascimento, 1940 10 23 ~ )는 브라질의 전설적인 축구선수로, 축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로 평가받는다.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 일원으로 1958, 1962, 1970 3번의 FIFA 월드컵 우승의 주역이다. 1958년에는 실버볼, 1970년에는 골든볼을 수상했다.

 

IOC가 선정한 세기의 운동선수이자, 20세기 세계 스포츠의 상징적인 인물로 여겨진다. 그 엄청난 실력으로 완벽한 커리어를 쌓으며 세계 축구계에 이바지한 공을 대중에게 인정받아 통해 축구 황제로 불린다.

 

또한 서민들의 사회적 지위 향상을 위한 정책을 지지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의 300번째 골은 브라질의 빈곤층 어린이들을 위해 헌정되었다.) 그는 공식적으로 브라질 정부에 의해 '국보(國寶)'로 지정되어 있다.

 

 

*펠레의 저주(Pelé’s Curse) 

축구황제 펠레의 예언을 이르는 말. 반드시 반대로 이루어지는 징크스.

 

축구를 넘어 전체 스포츠계를 통틀어 악명높은 징크스로 펠레의 예언은 언제나 반대로 이루어진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펠레의 저주를 모아놓은 세계의 미스터리 미스터리 조사반의 패러디 만화가 있으며 이 만화를 기점으로 민간에 펠레의 저주가 정설처럼 널리 퍼지게 되었다.

 

 

⊙가린샤(Garrincha 1933 ~ 1983) / 브라질, 악마의 드리블을 하는 절름발이

 

본명 : 마누에우 프란시스쿠 두스산투스(Manuel Francisco dos Santos)

생애 : 1933 10 28일 리우데자네이루주 마제 파우그란지~1983 1 20

 

 

별명인 가린샤(Garrincha) '작은 새'란 뜻이다.

펠레, 니우통 산투스, 지우마르 등과 함께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에 두 차례의 월드컵 타이틀을 선사했으며 특히 1962년 칠레 월드컵에서는 대단한 활약상을 남겼다. 1983년에 알코올 중독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가린샤는 리우데자네이루의 슬럼가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알코올 의존증자였고, 가린샤는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해서 문맹이었다. 게다가 어릴 적 소아마비를 겪었기 때문에 다리가 기형이었다.

 

 

오른쪽 다리는 안으로 굽고, 왼쪽 다리는 밖으로 굽은데다 오른쪽 다리보다 6cm 짧았다. 오죽 장애가 심했으면 의사가 보조장치를 달지 않으면 평생 휠체어 신세라고 진단했다. 당시 외과의사가 무료로 수술을 해주어서 이정도다. 보험의 후유장애 기준을 보면 '한 다리가 5cm 이상 짧아진 때' 30%의 장애로 본다. 그만큼 장애가 심했다는 것이다.

 

그랬던 가린샤가 훗날 당대 최고의 축구 선수, 더구나 당대 세계 최고의 드리블러라는 칭호까지 획득했다.

 

https://namu.wiki/jump/JUAWuOuaamCJ9EMg778Hma6FzvcJlFZ8BeXuuFcZIVLjNUpkGAlQd64dLnUO6a3I

 

파일:GarrinchaTM.gif - 나무위키

이미지의 자세한 설명을 적어 주세요.

namu.wiki

 

https://youtu.be/-WVZyYZ-lzs 

 

가린샤가 축구를 하면서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악마의 드리블을 하는 절름발이가 있다."는 식의 소문이 돌았지만 이를 들은 사람들은 처음에 반신반의했다.

 

장애를 극복한 인간 승리의 표상이자, 축구선수로서 일생일대의 영광을 누렸고, 반면 불우했던 출생과 유소년기를 반영하듯 씁쓸한 최후를 맞이하는 등 축구계에서도 보기 드문 파란만장한 선수이다.

 

 

⊙마라도나(Maradona 1960 ~ 2020) / 아르헨티나가 낳은 축구의 신

 

본명 : 디에고 아만도 마라도나(Diego Armando Maradona)

생애 : 1960 10 30,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주 라누스

~ 2020 11 25일 티그레

 

 

디에고 아르만도 마라도나(스페인어: Diego Armando Maradona, 1960 10 30 ~ 2020 11 25)는 아르헨티나의 전설적인 축구선수로, 펠레와 함께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자주 언급된다. 별명은 황금빛 소년으로 시야, 패싱력, 볼 컨트롤, 드리블, 프리킥 능력, 필드에서의 리더쉽을 가진 완벽한 공격형 미드필더이자 플레이메이커로써 시대를 풍미했다.

 

마라도나는 1980년대를 대표하는 위대한 선수였다. 미셸 플라티니, 지쿠, 마르코 판 바스턴과 같은 기라성들 중에서도 단연 최고의 경지에 오른 선수였다. 더불어 마라도나는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펠레와 준하거나 혹은 능가하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그에 합당한 완벽한 기량을 지닌 범시대적 위대한 선수였다.

 

https://youtu.be/mwjYyqzt2_k

 

〈초기 생애〉

코리엔테스주에서 이주해온 가난한 가정 출신인 디에고 아르만도 마라도나는 1960 10 30일에, 부에노스아이레스주 라누스의 병원에서 태어났다. 그는 부에노스아이레스 남쪽 외각에 있는 판자촌인 빌라 피오리토에서 자랐다. 아버지인 디에고 마라도나 '키토로' (1927–2015)는 과라니 혈통이었고, 어머니 달마 살바도라 프랑코, '도나 토타' (1930–2011)는 이탈리아계이었다.

 

마라도나는 세 살 때 선물로 첫 축구공을 받았고 빠르게 축구에 빠져들게 되었다. 8살 때, 마라도나는 그가 살던 동네 축구 클럽인 Estrella Roja에서 뛰던 중에 유소년 스카우트의 눈에 띄게 된다.

 

그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팀 아르헨티노스 후니오르스의 유소년 팀인 Los Cebollitas (작은 양파들)의 핵심이 되었다. 12살의 볼보이이던 시절, 그는 1군 팀 경기의 하프타임 중에 그의 마법 같은 공 다루는 모습을 선보이며 관객들을 놀랍게 했다.

 

1986 FIFA 월드컵〉

마라도나는 1982년 월드컵 당시의 부진을 씻고 1978 FIFA 월드컵의 주장이었던 다니엘 파사레야, 레알 마드리드 CF의 호르헤 발다노 등과 함께 아르헨티나가 또 다시 정상에 오르게 하였고 자신 역시 화려하게 재기하는 데에 성공했다.

 

조별리그 첫 경기에서 차범근, 허정무 등이 있던 대한민국과의 경기에서 3-1로 승리했으며 지난 대회(1982 FIFA 월드컵) 우승국이었던 이탈리아와의 경기에서는 골을 기록하며 1-1 무승부를 이끌어냈다. 그리고 불가리아와의 경기도 2-0으로 이기면서 아르헨티나는 조 1위로 16강에 진출했다. 16강전에서 엔초 프란체스콜리가 있는 우루과이를 만났지만 1-0으로 승리하며 8강에 올라갔다.

 

그리고 8강전에서 브라이언 롭슨, 게리 리네커 등이 있던 잉글랜드와 경기를 갖게 되었다. 이 경기 당일 양팀 응원단끼리 패싸움을 벌이는 등 초반 분위기부터 엄청나게 험악했다.

 

이 상황으로 인해 경기 당일 경기장에는 많은 숫자의 경찰들이 배치되기도 했으며 양팀 선수들간의 분위기 역시 극도의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 상황 속에 치러진 경기에서 첫 골은 아르헨티나 쪽에서 득점하였는데 이것이 또 다른 문제를 야기했다. 마라도나가 피터 실턴 골키퍼와의 경합 도중 손으로 골을 넣은 것이었다. 이 사건은 월드컵 역사상 손에 꼽을 정도의 추한 행동인 신의 손 사건이 되었다.

 

디에고 마라도나의 8강전(vs. 잉글랜드) 첫 번째 골 진행 방향

 

그런데 심판들은 이상하게도 이 골을 득점으로 인정했는데 이로써 아르헨티나가 앞서게 되었다. 이렇게 불명예스럽게 첫 골을 넣었지만, 불과 단 4분 후 마라도나는 이 불명예스러운 골을 단번에 만회할 만큼 멋진 골을 성공해 냈다. 혼자서 수비수 6명은 물론 피터 실턴 골키퍼까지 한꺼번에 제치고 파고들어 날린 슛이 그대로 성공한 것이었다. 이후 게리 리네커가 한 골을 만회했지만 경기는 그 점수로 종료되어 아르헨티나가 준결승에 진출하게 되었다.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이 경기를 더할 나위 없는 포클랜드 전쟁의 복수라 생각하게 되었는데, 두 골 중 한 골은 명백한 사기행위를 저지름으로서 영국인들을 분노케 했고, 다른 한 골은 잉글랜드라는 팀을 개인 기량만으로 완벽히 농락한 골이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영국인들도 "손으로 넣은 첫 번째 골은 괘씸했지만, 그래도 두 번째 골은 정말 쩔었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준결승에서도 아르헨티나는 엔조 시포가 있던 벨기에전에서도 2골을 넣으면서 팀이 2-0으로 이기게 했는데, 이러한 마라도나의 활약에 벨기에 감독은 "마라도나를 막으려면 12명의 선수가 필요하다."라고까지 말하며 감탄했다고 한다.

 

결승에서 카를하인츠 루메니게, 로타어 마테우스, 루디 푈러가 있는 서독을 상대로 경기를 치르게 되었는데 마라도나와 호르헤 발다노의 맹활약으로 초반 2-0으로 앞섰다. 그러나 교체 투입된 서독의 루디 푈러 또한 만만치 않게 활약하여 푈러로 인하여 점수는 2-2가 되어 승부는 원점으로 돌아갔다.

 

이때 아르헨티나의 호르헤 부루차가가 골을 성공시켜 경기는 3-2로 아르헨티나가 승리함으로써 아르헨티나는 2번째 우승컵을 들어 올렸으며 마라도나는 자신의 눈부신 활약으로 멕시코 월드컵에서 MVP의 영광을 차지하게 되었다.

 

 

⊙리오넬 메시(Lionel Messi)

(namu.wiki)

 

본명 : 리오넬 안드레스 메시 쿠치티니(Lionel Andrés Messi Cuccittini)

출생 : 1987 6 24, 아르헨티나 공화국 산타페 주 로사리오

 

아르헨티나 국적의 파리 생제르맹 FC 소속 축구선수. 포지션은 윙어. 현재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의 주장을 맡고 있다.

 

축구 역사상 월드컵 우승, 월드컵 골든볼, 대륙컵 우승, 대륙컵 MVP, 올림픽 금메달, UCL 우승, FIFA 올해의 선수, UEFA 올해의 선수, 발롱도르, 5대 리그 우승, 5대 리그 MVP를 전부 이룬 유일한 축구 선수이다.

 

또한 축구 역사상 최다 공격 포인트 기록 선수이며, 발롱도르, FIFA 올해의 선수, 유러피언 골든슈 최다 수상자이자 FC 바르셀로나,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 라리가 역대 최다 득점자이다.

  

1987 6 24일 아르헨티나의 로사리오에서 3 1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이탈리아계 후손이 가장 많은 아르헨티나에서 리오넬 메시 역시 혈통적으로 주로 이탈리아인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이탈리아인이었던 증조할아버지 안젤로 메시(1866년생) 1893년 아르헨티나로 이주하면서 집안이 아르헨티나 사람이 되었다. 아버지 호르헤 오라시오 메시는 철강 노동자였다. 어머니 셀리아 마리아 쿠치티니도 이탈리아계 후손이며 파트타임 청소부로 일했다.

 

아버지가 지역의 클럽인 글란돌리의 코치이기도 했기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자연스럽게 축구와 가까워졌고 글란돌리의 클럽에 가입해서 축구를 배우기 시작한 시기는 네 살 때라고 한다. 처음으로 축구 경기에 뛰어본 것은 할머니의 권유에 의해서였다고 한다.

 

지역 유소년 경기를 관람하러 갔다가 우연히 결원인원이 발생하게 되자 이 할머니가 감독에게 대타로 자신의 손자를 써보라고 강권했고 그렇게 투입된 경기에서 메시가 엄청난 활약을 보여주며 그날부터 본격적으로 축구를 시작하게

 

1995년 로사리오를 연고로 하는 CA 뉴웰스 올드 보이스 유스팀에 6살에 입단하였고, 곧 유망주로 각광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열한 살 때 성장 호르몬 결핍증(GHD)이 있다는 진단을 받으며 시련을 겪는다. 이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매달 90 ~ 100 달러의 돈이 필요했고, 육체 노동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그의 부모가 감당하기에는 큰 금액이었다. 소속팀인 뉴웰스 올드 보이스에서도 이 금액을 지출하기는 꺼렸다. 일단은 부모가 빚을 내서라도 장애를 치료하고 그가 축구 선수가 될 수 있게 지원하려 했지만, 언제까지고 그럴 수는 없었다.

 

2000 7, 그의 재능을 눈여겨본 FC 바르셀로나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온 것이다. 앞서 아르헨티나의 명문 구단 CA 리버 플레이트에서도 그를 초청해 입단 테스트를 치른 바 있었다. 테스트를 진행한 리버 플레이트의 코치는 메시를 '반드시 영입해야 할 선수'로 구단에 보고했고, 입단 테스트를 함께 지켜본 기자는 그를 '새로운 마라도나'로 칭할 정도로 재능은 확실했다. 그러나 그를 영입하기 위해 뉴웰스 올드 보이스를 설득해야 한다는 점, 숙식 외에 치료 비용이 고정적으로 나가야 한다는 점 때문에 리버 플레이트에서는 끝내 확답을 주지 않았다. 결국 메시와 아버지는 바르셀로나의 스카우트 제의에 응해 바르셀로나로 건너갔다. 바르셀로나 측과 메시의 아버지 사이에서 몇 차례 협상이 오간 끝에 메시의 치료비를 모두 부담해 주겠다는 거부하기 힘든 제안이 덧붙었다.

 

당시 메시를 스카우트하기 위해 찾아온 카를레스 렉사흐(Carles Rexach) 바르셀로나 기술 이사는 메시의 플레이를 보자마자 매료되어 계약 의사를 타진했지만, 바르셀로나에서 13세의 외국 유소년 선수와 계약해 본 전례가 없었기 때문에 메시 측에 계약과 관련한 확답을 주지는 못하고 있었다. 이렇게 두 달이 흐르자 참다 못한 아버지 호르헤 메시가 '다른 팀을 알아보겠다' 라며 최후통첩을 보냈고, 발등에 불이 떨어진 렉사흐가 냅킨에다가 즉석으로 계약서를 만든 것이다.

 

바르셀로나와 계약한 메시는 바르셀로나의 유소년 팀, 이른바 '라 마시아'에 입단했으며, 가족들도 함께 바르셀로나로 이주한다. 바르셀로나는 당시에 이러한 결정으로부터 어떠한 혜택을 받게 될지 생각하지 못했다. 구단 입장에서는 유망주이고 잘 키우면 되겠다는 생각이 대부분이었다. 물론 메시가 축구계에서 ''의 클래스에 도달했으니 바르셀로나는 최고의 혜택을 누렸다.

 

메시 / '월드컵 우승 트로피' 빼곤 다 가진 남자

https://youtu.be/Hl_oUoWwIF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