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의사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의 편지
http://www.ahnjunggeun.or.kr/kwa-intro
"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걸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
이토 히로부미 사살 후 뤼순 형무소에 수감중이던 안중근 의사에게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가 보낸 편지.
안중근 의사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
안중근 의사 어머니의 본명은 조성녀이며 독립운동가인데 마리아는 천주교에서 받은 세례명이다.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만주 하얼빈역에서 일본 흥륭의 장본인으로 추앙받던 이토 히로부미를 즉사시킨 안중근의사는 1910년 2월 14일 사형선고를 받자 당당히 항소를 포기하고 뤼순감옥에서 3월 26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네가 어미보다 먼저 죽는 것을 불효라고 생각하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진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건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것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딴 맘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걸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
아마도 이 어미가 쓰는 마지막 편지가 될 것이다.
너의 수의(壽衣)를 지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가거라.
어미는 현세에 재회하길 기대하지 않으니 다음 세상에는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나오거라.
아들아 옥중의 아들아
목숨이 경각인 아들아 칼이든 총이든 당당히 받아라
이 어미 밤새 네 수의 지으며 결코 울지 않았다.
사나이 세상에 태어나 조국을 위해 싸우다 죽는 것
그보다 더한 영광 없을 지어니 비굴치 말고 왜놈 순사를 호령하며 생을 마감하라
하늘님 거기 계셔 내 아들 거두고 이 늙은 어미 뒤쫓는 날
빛 찾은 조국의 푸른 하늘 푸른 새되어 다시 만나자
아들아 옥중의 아들아 목숨이 경각인 아들아
아! 나의 사랑하는 아들 중근아
사형직전 어머니 조마리아가 지어준 수의를 입고있는 안중근의사
한편 조마리아 여사 편지는 여순 감옥의 산구헌병 이었던 지바 도시치가 편지 내용에 감동해 자신의 일기장에 기록해 두었던 것이 후세에 알려졌는데 항소를 포기한 안중근 의사가 사형 집행 전에 써준 휘호와 유묵, 묵서를 일본 와키야나기 마을 ‘대림사’ 절에 모시고 안중근 의사의 명복을 빌었다고 한다.
⊙우리가 잘 몰랐던 안중근 의사의 숨겨진 이야기
https://youtu.be/fECS8syuH1o
안중근을 존경한 일본인들, 그들은 안중근의 인격에 감동해 마음이 움직였다,
중국정부가 만든 안중근 기념관, 중국인들도 높은 존경심을 갖고 있다
https://youtu.be/EVqw3bXMUrE
내가 이토를 죽인 15가지 이유 (Full Episode)
https://youtu.be/hOcB0pngL6g
안중근의사와 그의 마지막 간수 / [KOR, JPN Sub]
https://www.youtube.com/watch?v=4lZ6z8liZfE
⊙조성녀(趙姓女) 마리아
생애 : 1862년 5월 6일(음력 4월 8일) ~ 1927년 7월 25일
본관 : 배천(白川)
세례명 : 마리아(瑪利亞)
조성녀(趙姓女)는 안중근(安重根) 의사의 어머니로서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였고, 임시정부의 상해재류동포정부경제후원회(上海在留同胞政府經濟後援會) 위원을 역임하는 등 항일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조 마리아 여사는 1862년 황해도 해주군에서 태어나 동갑인 안태훈(安泰勳)과 혼인하여 1879년 안중근을 낳았다. 이어서 안정근, 안공근 및 안성녀를 낳아 3남 1녀를 두었다.
남편의 권유로 1897년 1월 뮈텔 주교에게 세례를 받았고, 이후 천주교 신자로 일생을 살았다.
남편이 1884년에 국비 일본 유학생 70여 명 중에 선발되었으나, 갑신정변이 실패하자 정부의 탄압을 받게 되었다. 신천군(信川郡) 두라면(斗羅面) 청계동(淸溪洞) 산골로 이주하여 은거하였다.
남편이 동학농민군 진압 과정에서 김구(金九)를 보호하게 되고, 김구의 어머니 곽낙원(郭樂園)을 만나 두 사람은 자매처럼 지냈다.
1905년 남편의 사후 안중근을 따라 개화운동이 활발하였던 삼화항으로 이주한 뒤 아들들의 애국계몽운동을 보고 여성도 적극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1907년 안중근과 함께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였다. 5월에 평안남도 삼화항 은금폐지부인회를 통해 국채보상의연금을 납입하는 등 항일구국운동에 앞장섰다. 은지환 두쌍, 은투호 두개, 은귀이개 두개, 은장도 한개, 대금 20원 등을 조성녀가 낸 것으로 보인다.
안중근이 1910년 3월 순국한 뒤 큰며느리 김아려(金亞麗)는 노령의 한인 지역에 머물러 있었고, 조성녀와 가족도 1910년 5, 6월경 노령으로 망명하였다.
『독립신문』(1920.1.31)에는 “의사의 자당(조성녀)는 해외에 온 후로 거의 영일 없이 동은 해삼위로, 서는 바이칼에 이르기까지 분주하여 동포의 경성(警醒)에 종사하였다.”고 전한다.
1920년 5월 조성녀는 가족과 상하이로 이주하여 임시정부의 김구, 이강(李剛), 김붕준(金朋濬) 등 여러 독립운동가 가족들 20여 명과 함께 살았다. 이곳에서 아이들을 돌보아 주는 한편, 이주민들에게 위로와 평강을 주는 어머니 같은 삶을 살았다.
1926년 7월에 조직된 상해재류동포정부경제후원회 위원을 역임하였으며, 동년 9월 대한민국임시정부경제후원회 창립총회에서 안창호, 조상섭(趙尙燮) 등과 함께 정위원(正委員)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그밖에도 조성녀는 언제나 독립운동계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원로 역할을 맡아 알라스카 금광의 교포 광부들의 국민회에 대한 반발을 안정시켜 주기도 하였다.
상훈과 추모
상하이에서 순국한 조성녀의 장례는 프랑스 조계에 있는 천주교당에서 교민장으로 치러졌고, 안남(越南)인 묘지에 안장됐으나, 지금은 무덤조차 찾을 수 없게 되었다. 2008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조성녀(趙姓女))]
⊙안태훈(安泰勳) 베드로 ?∼1905 / 안중근의사의 부친,
(catholic.or.kr)
생애 : (?∼1905) 진사(進士)
본관 : 순흥(順興)
세례명 : 베드로
- 의사(義士) 안중근(安重根)의 부(父).
- 진해현감(鎭海縣監)을 지낸 안인수(安仁壽)의 6남 3녀 중 3남으로 출생,
- 황해도 신동으로 불린 안태훈은 과거 시험에 합격하어 진사가 되었다.
- 1884년 개화파(開化波)의 박영효(朴泳孝)에 의해 외국유학생으로 선발되기도 하였다.
- 동학접주였던 김구를 구해주었다.
- 1905년 장남 중근을 상해(上海)로 망명시키고 그해 12월 신병으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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