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실버택배
10시간 택배로 2.5만원 벌어…무임승차 폐지되면 절반 날아가
“무임승차 폐지되면 택배 일도 사라질 것”
누군가에게 생의 기운을 더해 주는 지하철 무임승차는 또 누군가에게 생계 그 자체를 유지시켜 주기도 한다. 서울시 중구 중부시장 안쪽에 위치한 한 건물은 매일 꼭두새벽부터 생계를 지키기 위해 나선 노인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직접 지하철로 택배를 운송하는 ‘실버택배’ 기사들이 일감을 받는 ‘실버퀵택배’ 사무실이다.
2월17일 서울의 한 지하철 승강장에서 실버택배원 어르신이 짐을 든 채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시사저널 최준필
오전 9시. 이미 10여 명의 실버 기사가 순서대로 떠나고, 남은 6명이 작은 테이블에 둘러앉아 콜을 기다린다. 드디어 박평서씨(가명·84세) 차례다. 출근 1시간여 만이다. 1호선 회기역에서 물건을 받아 독산역으로 가져다주는, 비교적 쉬운 일이 연결됐다.
“어젠 천안까지 다녀왔다. 거리가 너무 멀어도 힘들지만 그보다 더 힘든 건 혼잡한 시간대에 케이크나 꽃다발 같은 망가지기 쉬운 물건을 배송해야 할 때다. 그런데 그것보다도 더 힘든 건 찾아가기 어려운 골목이나 언덕 꼭대기에 있는 주소로 찾아가야 할 때다.”
혹여 늦을까 싶어 빠르게 발걸음을 옮기는 박씨의 여정을 함께 따라나섰다. 을지로4가역에서 노선을 한 번 갈아타고 30분 거리인 회기역으로 향했다. “보통 여기에서 종로3가역으로 가서 1호선을 갈아타는데, 난 2호선 왕십리역으로 가서 경의중앙선을 타고 회기역으로 간다. 그게 환승할 때 걷는 거리도 짧고 시간도 덜 걸린다. 오래 다니면서 얻은 노하우다.” 60세까지 목수 일을 하며 해외생활도 했던 박씨는 점점 일거리가 줄자 은퇴 후 건물 경비원으로 10년 넘게 근무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나이가 허락되지 않자 5년 전부터 실버택배 일을 시작했다.
회기역에서 물건을 받아 다시 열차를 타고 50분, 독산역에 도착했다. 늦지 않게 물건을 전달하고 현금으로 1만1000원을 받는다. 수입은 박씨와 회사가 7대3으로 나눠 갖는다. 다음 일감을 얻기 위해 사무실로 돌아가는 도중 또 하나의 콜이 들어왔다. 이번엔 7호선 숭실대입구역 인근에서 물건을 넘겨받아 대림역으로 가져다주어야 하는 일이다.
어느덧 정오를 넘겨 점심시간이 되었지만, 박씨는 열차를 기다리며 가방에서 챙겨온 빵을 꺼내 끼니를 때운다. “점심 사먹을 돈도 아쉽고, 무엇보다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하면 꼭 때맞춰 콜이 들어온다. 나온 음식을 한 입 뜨고 서둘러 나온 적이 여러 번이라 마음 편히 빵을 먹거나 아니면 사무실로 복귀해 1000원을 내고 라면을 끓여 먹는다.”
한 시간에 걸쳐 두 번째 임무도 완수한 박씨는 1만1000원을 추가로 번 후 을지로4가역 사무실로 복귀했다. 또 한 번 기다림의 시간을 가진 그에게 이번엔 장례식장으로 근조기를 배달하는 일감이 건네졌다. 무게 5kg의 근조기를 들고 다시 1시간 거리의 이대목동병원으로 향했다.
오후가 되면서 열차 내 사람들이 제법 붐비기 시작했다. 박씨는 노약자석에 앉아 근조기를 세로로 세워 다리 사이에 고정시켰다. 한 손으로 근조기를 잡고 한 손으로 언제 울릴지 모를 휴대전화를 든 채 잠시 눈을 붙였다. 예정대로 근조기를 전달하고 이번엔 1만5000원을 받았다. 배송 물품이 크고 무거울수록, 혹은 배송 거리가 멀수록 비용은 조금씩 올라간다.
사무실로 복귀해 오늘 벌어들인 수입을 정산한다. 회사에 30%를 떼어준 후 박씨의 수중엔 2만5900원이 남았고 휴대전화엔 오늘 하루 걸음 수 2만1300보가 찍혔다. 아침 8시에 출근해 저녁 6시 퇴근하기까지 시급 2500원인 셈이다.
이날 박씨와 동행한 기자의 지하철 요금은 총 5500원. 박씨의 출퇴근길까지 함께했다면 하루 8000원의 지하철 요금이 부과되었을 것이다. 이날 박씨가 얻은 수입의 3분의 1에 달한다. 주 6일, 일요일만 빼고 매일 아침 7시에 집을 나서 온종일 곳곳을 돌아다녀야 하는 강행군이지만, 그는 “운동도 되고 적지만 용돈도 벌어서 좋다.
다리가 허락할 때까지 계속 이 일을 하고 싶다”고 밝혔다. 생계와 직결되는 지하철 무임승차 논쟁과 관련해선 “무임승차가 사라지는 건 실버택배라는 우리 업 자체가 세상에서 사라진다는 것”이라며 “기자가 오늘 사무실에서 만난 노인 중 아무도 남아있지 않을 것”이라고도 말했다.
“미안하지만 ‘공짜 지하철’이 있어 다행입니다”
시사저널
2023.02.27 08:35
구민주 기자 (mjooo@sisajourn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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