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 비통(Louis Vuitton) / 파리 1854, 모노그램 캔버스
http://kr.louisvuitton.com/kor-kr/homepage
•프랑스의 명품 패션 브랜드, LV(엘 브이) 라고도 불린다.
•본사 : 프랑스 국기 프랑스 파리
•설립 : 1854년, 파리 노브 데 카푸친느(Rue Neuve des Capucines)거리
•설립자 : 루이 뷔통 말르띠
•모기업 : LVMH 그룹
루이비통(Louis Vuitton)은 LVMH 모엣 헤네시·루이 비통(LVMH Moët Hennessy·Louis Vuitton S.A.), 또는 간단히 LVMH, 줄여서는 LV는 1854년에 세워진 프랑스의 하이엔드급 명품 브랜드이며, 샤넬, 에르메스와 함께 3대 명품 브랜드로 통하는 럭셔리 브랜드이다.
이 회사는 1987년 루이비통 패션하우스와 모엣 헤네시(Moët Hennessy)의 합병으로 이루어졌다. 모엣 헤네시 사는 1971년 모엣 샹동(Moët & Chandon)과 헤네시(Hennessy) 사의 합병으로 이루어진 회사다.
LVMH 그룹은 약 60개의 고품격 브랜드의 법인들을 관리한다. 이 법인들은 종종 독립적으로 경영되기도 한다. 가장 오래된 LVMH 브랜드는 1593년 설립된 와인 제조사인 Château d'Yquem이다.
- 루이비통은 럭셔리 트렁크와 가죽 제품, 기성복, 신발 등으로 이루어진 최고의 제품들을 가진 LV 모노그램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 루이비통은 세계 최고의 국제적인 패션 하우스 중 하나이며, 독립 부티크, 백화점 내 임대 매장, 공식 웹사이트 상의 이커머스를 통해 제품들을 판매하고 있다.
- 루이 비통의 정식 회사명인 Louis Vuitton Malletier에서 Malletier는 Malle을 만드는 사람이라는 뜻인데, 여기서 Malle이 트렁크를 뜻한다.
〈루이비통(Louis Vuitton)의 시그니처〉
•Ad for Louis Vuitton luggage, 1898
•Signature Styles From Louis Vuitton
•Louis Vuitton Monogram Wallet
•LOUIS VUITTON PAPILLON BAG
1966년, "빠삐용" 백 론칭
〈Louis Vuitton Monogram〉
1867년에는 파리에서 열린 만국 박람회에 참가했다. 루이비통은 모조품과 차별화를 두기 위해 1876년 베이지와 갈색 줄무늬 색으로 디자인을 변경했다.
1885년에는 영국 런던 옥스퍼드 거리에 첫 해외 매장을 오픈했으며, 이후 다른 회사들이 루이비통과 똑같은 제품들을 모방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루이비통 상표를 등록해 1888년 "marque L. Vuitton déposée"라는 대표 로고를 만들었고, "다미에 캔버스"를 런칭했다. 1892년 회사를 설립했던 루이비통이 죽고 아들 조르주 비통에게 회사 경영권을 넘겼다.
아버지 루이가 죽은 뒤, 조르주는 회사를 세계적인 기업으로 만드는데 힘썼고, 이것의 일환으로 1893년 시카고 만국 박람회에서 회사의 제품을 전시했다. 1896년 조르주 비통의 구상으로 루이비통은 모노그램 캔버스를 런칭해 세계적인 특허로 등록했고, 이후에 모노그램 캔버스는 회사의 상징으로 알려졌다.
1896년 이미테이션 상품의 유통을 방지하기 위해서 세계 최초로 모노그램무늬를 이용했다. 루이비통의 이니셜인 L과 V, 꽃과 별의 조합의 모양은 그의 아들인 죠르즈 뷔통이 고안했다. 왕후귀족을 시작으로 상류사회의 사람들을 매료시켰다.
그러던 중, 1998-1999 A/W부터 모드에 진입했다. 그때까지 콜렉션 용의 의류를 넣어 나르는 물건을 만들던 브랜드가 의류제작을 시작했다고 해서 화제가 되었다. 디자이너로 기세가 좋은 마크 제이콥스를 받아 들여 첫 콜렉션부터 대호평을 받아서 지금에 이르고 있다.
〈루이비통의 역사〉
루이 비통의 역사는 180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821년 프랑스 안쉐라는 작은 마을의 한 목공 집안에서 태어난 루이 비통은 어렸을 때부터 자연스레 목공기술을 익힐 수 있었다.
루이비통은 어렸을 적부터 파리에 대한 동경심이 있었는데 14살이 되던 해 집을 나와 파리로 떠나게 된다.
땡전 한 푼 없었던 루이 비통은 400km가 넘는 거리를 걸어서 갔는데 16살이 되던 1837년 드디어 파리에 도착했다.
이후 당시 파리에서 가방 제작으로 유명세를 떨치던 무슈 마레샬 아래에서 견습생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루이 비통의 섬세하고 특별한 기술은 곧장 유명해졌고 귀족들 사이에서도 이름을 알렸다. 많은 양의 짐을 싸는데 탁월한 기술을 갖췄던 루이 비통은 프랑스 왕실 황후 외제니 드 몽티조의 전담 패커로 일하기 시작했다. 외제니 황후의 후원하에 파리 뇌브 데 카푸신 4번가에 자신의 이름을 건 포장 회사를 개업했다.
이는 오늘날 루이 비통의 뿌리가 되는 회사이다. 당시 트렁크는 현대에서 흔히 만들어지는 사각형이 아니었다. 볼록하게 생겨 차곡차곡 쌓기 힘든 모양새였는데 루이 비통의 트렁크는 평평하게 만들어져 마차에 쌓기 편리한 구조였다.
모양 뿐만 아니라 기존의 나무재질에서 루이비통만의 목공기술을 살려 특별제작한 그레이 트리아농 캔버스라는 소재로 만들어져 가볍기도 했다. 이러한 혁신적인 트렁크는 엄청난 성공을 거뒀고 기존 매장에서 수요를 감당할 수 없자 1859년 파리 근교 아니에르에 공방을 세웠다.
아니에르에 있는 이 트렁크 공방은 지금까지도 트렁크 제작을 하는 아주 특별한 장소이다. 1885년에는 영국 런던 옥스퍼드 거리에 매장을 열면서 첫 해외지점도 오픈했다.
루이 비통의 획기적인 기술과 명성은 아들 조르쥬 비통에게도 이어졌다. 1886년 소매치기들이 가방을 쉽게 열지 못하도록 가방에 자물쇠를 부착하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만들어냈다. 너무나도 완벽한 기술이었기 때문에 잠금장치 기술은 아직까지도 요긴하게 쓰이는 중이다.
루이비통의 대성공으로 그레이 트리아농 캔버스의 모조품들이 판을 치자 1888년 새로운 재질의 제품을 개발한다. 이때 나온 것이 루이비통의 대표적인 제품인 다미에 캔버스이며, 다미에 캔버스의 모조품들도 끊임없이 나오자 1896년 루이비통의 상징적인 패턴 모노그램 캔버스가 탄생했다.
조르쥬는 모노그램 제품들을 들고 튀니지 사막을 횡단하며 견고성을 시험할 정도로 힘을 쏟았다. 창업주 루이비통이 죽고 경영권을 이어받은 조르쥬 비통은 회사를 더욱더 성장시켰다. 1914년에는 샹젤리제 거리에 세계에서 가장 큰 여행제품 매장인 7층짜리 매장을 세웠다.
1936년부터 1970년까지는 3대 가스톤-루이 비통이 이어받는데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프랑스 전역에 다수의 매장들을 열기 시작하였으며 상품 라인들도 넓히기 시작한다.
1970년부터는 4대 마이클 비통이 가업을 이어받는데, 이 때부터 유럽을 넘어 본격적으로 아시아와 신대륙에서 인기를 끌며 세계화가 진행되었다고 한다.
1987년에는 샴페인 브랜드 모엣 & 샹동, 꼬냑 브랜드 Hennessy와 합쳐져 LVMH라는 종합 명품 집단으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세계 최대의 패션제국이 탄생된 것이다. 프랑스의 문화와 전통을 깊이 있게 표현해내고 있는 것이 커다란 특징이다.
루이 비통(Louis Vuitton)
http://www.yeongnam.com/mnews/newsview.do?mode=newsView&newskey=20120204.010140816580001
세계최초로 사각형 여행 트렁크를 만들어낸 루이 뷔통.
루이 뷔통의 다양한 라인 중에서도 단연 독보적인 것은 가방이며, 우리나라에서도 3초마다 한 번씩 볼 수 있다고 하여 ‘3초 백’이라는 별명으로 불러질 만큼 대중적 인기를 누리고 있다.
루이 뷔통은 1954년 그레이 트리아논 캔버스로 제작된 사각형태의 트렁크를 선보였다. 이것이 바로 세계 최초의 사각트렁크였던 것이다. 이 트렁크는 왕실과 귀족들에게 사랑받으며 가게를 오픈한 지 5년 만에 수백명을 거느린 공장을 설립하게 된다.
1859년 그는 아들 조르주 뷔통에게 사업을 물려주게 되는데 당시 이미테이션이 늘어남에 따라 그는 이를 방지하기 위해 1888년 ‘다미에 패턴’(오늘날 시그니처 패턴)을 선보이게 된다. 하지만 오늘날처럼 고가였던 루이 뷔통을 저렴한 가격에 판매하는 모조품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고 조르주 뷔통은 아버지의 이름 ‘루이 뷔통’을 딴 로고를 탄생시킨다. 1896년 탄생한 이 로고가 루이뷔통의 상징 ‘모노그램’이다. 당시 제품에 브랜드의 로고를 프린팅한 것은 세계 최초였다.
이 후 전쟁이 끝난 뒤 대중화 시대가 열리게 되며 가볍게 되는 여행 가방을 원하게 되는데 조르주의 아들 가스통은 딱딱한 모노그램 원단을 부드럽게 만드는데 성공해 1932년 캔버스로 된 첫 번째 소프트 백인 ‘노에’를 선보인다. 이후로도 가스통의 아들 클로이 루이 뷔통이 계속해서 소재를 개발하며
1959년 면과 같이 부드러운 소재로 된 모노그램을 완성한다. 소재가 부드러워지자 디자인 역시 다양해졌는데, 1966년 ‘파빌론 백’은 아시아로까지 뻗어나갔다. 특히 일본에서 루이 뷔통의 인기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높았는데 가격이 프랑스에 비해 터무니없이 높아 일본인들이 루이뷔통을 구입하기 위해 프랑스로 가는 상황에 이르렀고 그 결과 파리 본점은 프랑스인들이 아닌 일본인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하지만 1980년대를 거치며 가업형 경영 형식으로 글로벌 비즈니스를 이끌어갈 인물이 없었던 루이 뷔통은 질은 좋지만 촌스러운 브랜드로 인식되며 경영이 힘들어지게 되었다. 이 때 루이 뷔통을 사들인 이가 있었으니, 그는 프랑스 국립 행정학을 졸업한 엘리트 ‘베르나르 아르도’였다.
당시 미국에서 부동산 중계업을 하며 많은 재산을 모은 그는 유럽의 명품 브랜드들이 파산 직전이 되어 힘이 없어질 때마다 차례대로 사들였는데 모엣 샹동과 헤네시를 시작으로 크리스찬 디올을 사더니 루이뷔통 마저 인수해 버리고 만다. 프랑스 출신이지만 미국식 경영방식을 공부한 그는 브랜드들이 위기를 겪을 때마다 그 틈을 파고들어 사업을 인수했고, 프랑스인들은 그를 비난했다.
하지만 그러한 비난도 곧 사라졌는데, 이유인 즉 망해가던 브랜드들이 전문적인 비즈니스 체계아래 세계적인 브랜드로 성장해 나갔고 루이 뷔통 역시 전 세계 150여개의 단독 매장과 400여개의 백화점 매장을 소유할 정도로 엄청난 가치의 브랜드로 탈바꿈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크 제이콥스를 루이 뷔통 수석디자인으로 앉히게 되며 루이 뷔통은 기존의 이미지와는 다른 소가죽위에 에나멜을 코팅한 ‘베르니’ 라인과 모노그램에 영문을 휘갈겨 쓴 ‘그래피티’라인 그리고 일본인 아티스트 다카시 무라카미와의 콜라보레이션을 통해 모노그램 멀티 컬러를 론칭하며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탄생하게 된다.
<프리앤 메지스 수석디자이너>
louis vuitton flagship store
청담동에 위치한 플래그십 스토어
2019년 10월 31일 오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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