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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인의 제과 명장과 50년 제빵 장인을 만나다

Paul Ahn 2013. 1. 1. 12:24

6인의 제과 명장과 50년 제빵 장인을 만나다

(chosun.com)

 

: 서철인  월간조선 기자  ironin@chosun.com

 

⊙ 6인의 제과 명장과 50년 제빵 장인을 만나다
⊙ 고대 이집트에서 빵 만들기 시작, 국내에는 구한말 선교사들에 의해 유입
⊙ “수없는 반복과 연습 통해 빵 맛의 최대치를 끌어낼 수 있는 자기만의 공정 찾는 것이 중요”
    (권상범 명장)
⊙ “밀가루는 글루텐이 풍부한 캐나다나 호주 등 추운 지방 것이 좋아”(서정웅 명장)
⊙ “천연효모는 주재료의 종류에 따라 전혀 다른 빵의 풍미와 식감을 내주므로 첨가 재료 필요 없어”
    (안창현 명장)

 

 

아침은 베이글 반쪽에 커피, 점심은 샌드위치 두 쪽에 오렌지 주스, 저녁은 시폰 케이크 한 조각에 우유. 강남에 사는 20대 여성 직장인 J씨의 하루 식단이다.
 
  요즘 젊은 여성 중에는 J씨처럼 하루 세 끼를 빵으로 해결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밥 먹고 난 후 간식으로 먹던 빵이 이제 주식으로 자리 잡아 가고 있는 셈이다. 도심의 다운타운가는 물론 주택가 골목골목마다 제과점이 없는 곳이 없다.
 
  《식품유통연감(2011년)》에 따르면, 국내 제빵 시장 규모는 3조2000억원(2009년 기준)이며, 매년 10% 정도씩 성장해 가고 있다. 현재 국내 제과점 수는 1만3000여 개. 이 중 파리바게뜨나 뚜레주르 같은 프랜차이즈 제과점이 5000여 개에 이른다. 월간 《파티시에》 발행인 장상원(張相元) 대표는 “한국은 프랜차이즈 제과점이 제빵 시장을 장악하다시피 했는데, 이는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현상”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한국은 전통을 중시하는 유럽이나 일본과 달리 소비 패턴의 변화가 매우 빠르고 유행에 민감한 편입니다. 이를 파악하고 있는 대기업이 막강한 자본력으로 제빵 시장의 변화와 유행을 주도하고 있죠. 이에 적응 못 하는 동네 빵집(자영제과점)들이 시장 경쟁에서 밀리면서 대기업의 프랜차이즈 제과점이 득세하고 있습니다. 국내 제빵 산업의 발전을 위해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죠.”
 
  전문가들은 “프랜차이즈 제과점은 국내 제빵 산업의 성장을 견인하는 한편 맛의 획일화를 가져왔다”고 분석한다. 지속적인 품질 개발과 마케팅 전략으로 시장을 확대하고 계량화된 제빵 시스템으로 소비자의 입맛을 평준화시켰다는 것이다.
 
  월간 《베이커리》의 김기설 편집장은 “국내 제빵 산업의 발전을 위해서는 다양한 맛의 빵이 나와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윈도 베이커리(Window Bakery·자영제과점)가 살아나야 한다”고 강조한다. 장상원 대표는 “동네 빵집이 살아나는 방법은 맛의 차별화밖에 없다”고 말한다. 프랜차이즈 제과점의 기계적 제빵으로는 내놓을 수 없는, 맛있는 빵으로 승부하라는 얘기다.
 
  빵의 가장 기본적인 재료는 밀가루, 이스트, 물, 소금이다. 여기에 우유와 버터 등의 유지분(乳脂粉)이 첨가돼 풍미를 더하게 된다. 그런데 똑같은 재료를 쓰고도 사람에 따라 빵 맛이 현저히 다른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국내 최고의 제빵 장인들을 만나 한국의 제빵 역사와 빵 맛을 내는 노하우를 알아보았다.
 
 
 ◇광복 직후 제과점 성업
 
  빵의 주재료는 밀이다. 인류는 기원전 7000년경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밀을 재배하기 시작했고, 기원전 4000년경부터 밀을 빻아 빵을 만들었다. 기원전 3000년경 고대 이집트인들이 자연발효한 빵을 만들어 먹은 것으로 전해진다. 밀 속의 단단한 글루텐(Gluten·곡류에 함유된 단백질)과 밀 껍질에 있는 이스트(Yeast·알코올 발효를 일으키는 효모)가 만나 발효하면서 빵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그리스 로마 시대까지만 해도 빵은 특권층만 즐겨 먹던 귀한 음식이었다. 빵이 대중화된 것은 19세기 중반 파스퇴르에 의해 이스트의 작용이 밝혀지고, 배양이 가능한 이스트가 상품화되면서부터다. 이후 유럽을 중심으로 제빵 기술이 눈부시게 발전했다.
 
  서구인들의 주요 양식이었던 빵이 국내에 유입된 것은 1885년 선교사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에 의해서다. 이들은 밀가루 반죽을 숯불 위에 구워 먹었다. 부풀어오른 빵 모양이 소의 고환(睾丸)을 닮았다고 해서 당시 사람들은 이를 ‘우낭(牛囊)떡’이라 불렀다 한다.
 
  1902년에는 러시아 초대공사 베베르의 처형인 독일 여인 손탁(Sontag·孫鐸)이 러시아 공관 옆에 정동구락부를 개설하고 빵을 만들었는데, 보통 빵은 면포(麵), 카스텔라는 설고(雪)라 불렀다 한다. 문헌상 한국인이 빵을 맛본 것은 이때가 최초인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후 일제시대 일본의 화과자(和菓子)와 양과자(洋菓子)가 유입됐고, 제과점이 생겼다. 1920년대 서울 시내에는 일본인이 운영하는 제과점이 58개소에 이르렀다고 한다. 당시 제과점은 서울을 제외하곤, 부산, 인천, 군산 등 일본인들이 드나든 항구도시에서 성업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국내 최고(最古)의 제과점으로 알려진 전북 군산의 이성당(李姓堂)은 1920년대 일본인이 운영하던 화과자점 ‘이즈모야’(出雲屋)를 인수해 발전시킨 것이라고 한다.
 
 
 ◇‘전설의 제빵왕’ 김충복
 
  국내 제과 산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것은 미(美) 군정(軍政)이 실시된 광복 직후다. 이 시기 미국에서 다량의 원조물자가 유입됐는데, 빵의 원료인 밀가루와 분유가 많았다. 게다가 미군 PX를 통해 보급물자인 버터와 향료, 넛류 등이 시중에 흘러나와 제과·제빵 업계가 활성화됐다. 1980년대까지 제과 명가(名家)로 이름을 떨친 고려당·태극당·뉴욕제과(1945년), 영일당(1947년·크라운제과 전신) 등 500여 개의 제과점이 이 시기에 문을 열었다. 또 다른 명가였던 독일빵집과 나폴레옹제과는 1950년대 초와 1960년대 말에 각각 창업했다.
 
  안타깝게도 이 중 오늘날까지 명성을 이어오고 있는 제과점은 나폴레옹뿐이다. 독일빵집은 이미 문을 닫았고, 태극당과 고려당·뉴욕제과는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상태다.
 
  이들 명가에서 기본기를 다져 오늘날 국내 최고의 제빵 장인이 된 명장들은 “제빵 기술자였던 1세대가 제빵 기술이 없는 2세대에게 경영권을 물려주면서 쇠락한 곳이 많다”고 입을 모았다.
 
  국내 제과·제빵 부문 명장은 지난 2000년 박찬회(朴贊會) 화과자 대표가 선정된 것을 최초로 현재까지 총 7명이 반열에 올랐다. 이 중 3명이 전설적인 제빵왕 김충복 선생 문하에서 기술을 익혔다. 권상범(權湘凡) 리치몬드제과 회장, 서정웅(徐正雄) 코른베르그과자점 대표, 박찬회 화과자 대표 등이다.
 
  제빵 장인들이 대개 가난한 시골 출신에 무학(無學)인 것과 달리 김충복 선생은 홍익대 미대 출신의 엘리트였다. 그는 일본 북해도에서 태어나 자랐고, 동경에서 제과 기술을 익혔다. 내로라하는 일본 기술자들에게도 밀리지 않았던 그는 후배들에게 “안주하지 말고 끊임없이 연구하고 혁신하라”고 가르쳤다 한다.
 
  박찬회 명장은 “미적 감각이 뛰어난 선생님으로부터 ‘좋은 빵은 입과 더불어 눈까지 감동시켜야 한다’는 사실을 배웠다”고 말했다.
 
  “선생님은 케이크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 분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케이크를 장식할 때 ‘여백의 미’를 강조했지요. 무조건 화려한 게 좋아 보였던 저는 당시 선생님의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그분의 심미안(審美眼)이 얼마나 앞서 있었는지 깊이 깨닫게 됐지요.”
 
  권상범 명장과 서정웅 명장은 1970년대 초 종로 광교 부근에 있던 풍년제과에서 김충복 선생을 만났다. 두 사람은 “김충복 선생님이야말로 드라마 <제빵왕 김탁구>에 나왔던 팔봉 선생 같은 분이었다”고 회상했다. “후배에게 빵의 기본기를 가르치고, 어느 정도 기술이 됐다 싶으면 더 크고 시설 좋은 제과점으로 시집보내듯 이직시켰다”고 한다.
 
  당대 최고 빵집이었던 풍년제과 공장장이었던 김충복 선생은 훗날 종로에 자신의 이름을 내건 제과점을 차렸다. 가게는 늘 손님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그가 한국에 최초로 소개한 마들렌 빵은 없어서 못 팔 정도로 인기가 폭발적이었다. 하지만 지병 때문에 문을 닫아야 했다.
 
  김충복 선생은 간 질환으로 쓰러져 수술을 받았다. 이때 혈액 부족으로 수혈을 받았는데, 그가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고 서로 헌혈을 하겠다고 달려온 제자들로 병원이 북새통을 이뤘다고 한다. 지병이 악화돼 세상을 떠났을 때는 국내 제빵인들이 총집합했다 할 정도로 장례식장이 붐볐다고 한다. 그의 장례는 국내 최초로 제과협회장으로 치러졌다.
 

 

@權湘凡 리치몬드제과 회장 “자기만의 공정 찾아야”
 
  권상범 명장은 김충복 선생의 수제자다. 경북 봉화 출신인 권 명장은 가난 때문에 초등학교만 겨우 졸업한 후 지금껏 제빵 외길을 걷고 있다. 그는 1963년 18세의 나이로 대구에서 상경, 풍년제과에서 기술을 익혔고, 김충복 선생의 소개로 들어간 나폴레옹제과에서 제과점의 꽃인 공장장에 올랐다. 그는 “나폴레옹제과점 강인정 사장의 추천과 지원으로 일본 동경제과학교에서 공부한 것이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고 말했다.
 
  “6개월 동안의 단기 코스였지만 일본 유학 중 새로운 기술을 많이 익혔고, 소비자가 좋아할 빵이 무엇인지 알게 됐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노력만 하면 얼마든지 성장할 가능성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었어요.”
 
  귀국 후 그는 1970년대 말 나폴레옹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그리고 마포에 8평 공간의 제과점을 내면서 독립한 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리치몬드제과점은 현재 홍대점, 이대점, 성산점 등 3군데에 있고, 부설기관으로 제과제빵기술학원을 운영하고 있다. 3개의 제과점에서 올리는 연간 매출은 36억원 수준이다.
 
  권 명장은 리치몬드 빵 맛의 비결에 대해 “좋은 재료와 정성은 기본”이라며 “쉼 없는 공부와 연구 개발 및 투자”라고 밝혔다. 그는 “시간이 날 때마다 빵의 본고장인 유럽에 간다”며 이렇게 말했다.
 
  “쌀밥은 한국이 가장 맛있게 합니다. 밥솥도 한국 것이 최고죠. 빵은 유럽을 따라갈 곳이 없습니다. 유럽은 빵 맛을 좋게 하는 기술이 끊임없이 업그레이드되고 있는 곳이죠. 한국의 젊은이들이 그런 유럽에 수시로 드나들고 있습니다. 본고장의 빵 맛을 본 이들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공부하고 신제품을 개발해야 합니다.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면 퇴보하게 마련이죠.”
 
  그는 “오늘날 오너파티셰(자영제과점)들이 사업가들(프랜차이즈 제과점)에게 밀리는 것은 만들기만 하면 팔릴 정도로 호황이던 20년 전 현실에 안주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빵은 밀가루를 반죽해서 1차 발효시키고, 성형 후 2차 발효를 거쳐 굽는 것으로 완성된다. 권상범 명장에 따르면 빵 맛은 이 공정 중에 결정된다. 그는 “빵 맛의 최대치를 끌어낼 수 있는 자기만의 공정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빵은 온도와 습도 등 주위 환경에 굉장히 민감한 식품입니다. 환경에 맞게 발효 타이밍을 정확하게 지키지 않으면 맛이 떨어지죠. 저희는 정확한 공정을 위해 유럽에서 들여온 도어컨디셔너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다음 날 사용할 반죽을 이 기계에 넣은 후 발효 온도와 습도, 냉각 타이밍 등을 세팅해 놓으면 자동적으로 숙성이 되죠.”
 
  리치몬드제과점에는 1년 사시사철 세계 제과인들의 방문이 끊이질 않는다. 권상범 명장은 “얼마 전에 독일 제과협회 회원들이 방문했는데 ‘시설이 최고’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고 자랑했다.
 

 

@徐正雄 코른베르그과자점 대표 “신선한 재료가 관건”
 
  서정웅 명장은 권상범 명장과 형제나 다름없는 사이다. 풍년제과 시절 좋은 선후배 관계로 동문수학했고, 나폴레옹제과에서는 권 명장의 뒤를 이어 공장장이 됐다. 30대 젊은 나이에 독립한 권 명장과 달리 그는 40대 후반에야 지금의 자리에 가게를 냈다. 코른베르그과자점은 서울 송파구 가락동에 위치해 있다. ‘코른베르그’는 독일어 합성어로 ‘곡물 언덕’이라는 뜻을 지녔다고 한다. 이 제과점은 단일 매장인데다 그리 크지 않은 규모였지만 단골로 보이는 손님이 많았다.
 
  “제가 빵의 기본적인 재료로만 맛을 내는 독일 빵을 좋아해 독일식 상호를 달았습니다만, 우리 집 효자 빵은 단팥빵과 롤 케이크입니다. 평수가 넓은 이 지역 아파트에 거주하는 분들이 연세가 있어서 그런 것 같아요.”
 
  매장 앞 유리에 붙은 명장 마크가 빛났다. 전남 순천 출신의 서 명장 역시 가난 때문에 어린 나이에 고향을 떠나왔다.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그는 “공부하고 싶어 무작정 상경했지만 여의치 않았다”고 말했다.
 
  “인천 이모 댁에 얹혀살며 주경야독할 생각으로 재봉틀 제조 회사에서 일했는데 공부는커녕 밥도 못 먹을 정도로 월급이 적었어요. 그래서 들어간 곳이 침식이 제공되는 도매 빵집이었습니다.”
 
  그는 새벽 4시부터 다음 날 새벽 2시까지 석탄 오븐에 빵을 구웠다. 그러다 환경이 좀 더 나은 소매 빵집으로 옮겨 주경야독의 꿈을 이뤘다. 이후 제빵기술을 제대로 배우고 싶어 풍년제과에 들어갔고, 보리수제과를 거쳐 나폴레옹제과에서 오랫동안 근무했다.
 
  나폴레옹제과 강인정 회장은 《제주일보》 기자 출신으로 사업 감각이 뛰어나면서도 사람을 키울 줄 아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는 강 회장의 후원으로 일본 유학을 다녀왔고, 한층 업그레이드된 기술로 나폴레옹제과 전성기를 이어갔다. 1990년대 초 직원 50명에 하루 매출이 1000만원에 달했다.
 
  그는 “40년 넘게 빵을 만들어 오고 있지만 아직도 어렵다”고 말했다. 동일한 재료, 동일한 조건하에서 만들어도 빵 맛이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르다는 것이다. 빵 다운 빵을 만들기 위해서는 주재료인 밀가루, 이스트, 유지분(버터·우유) 등 어느 것 하나도 관리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밀가루는 글루텐이 풍부한 캐나다나 호주 등 추운 지방 것이 좋습니다. 글루텐이 풍부한 밀가루라도 빵을 만들기 위해서는 최소한 한 달 정도 일정한 온도(20~24℃)에서 숙성을 시켜줘야 하죠. 우리 밀의 경우 몸에는 좋은데 노화가 빨라 빵이 잘 부스러지는 단점이 있습니다. 구운 지 하루만 돼도 푸석푸석해지죠.”
 
  버터는 식품성 오일이 첨가되지 않은 100% 우유로 만든 것이 좋다. 케이크에 쓰는 생크림도 마찬가지다. “생크림은 입안에서 사르르 녹는 반면 마가린이 섞인 휘핑크림은 입안에서 겉돈다”고 한다.
 
  이스트의 신선도 유지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이스트는 살아있는 생명체로 15℃ 이상이면 발효하기 시작해 30~40℃ 사이에서 활성화된다. 그 이상이 되면 균이 죽어서 악취만 남는다. 그는 “발효는 성형을 하는 동안에도 계속되므로 타이밍 계산을 잘해야 한다”고 말했다.
 
 
 @朴贊會 화과자 대표 “공장 환경 조건이 결정적”
 
  박찬회 명장은 김충복 선생 밑에서 가장 오랫동안 공부했던 제자다. 그는 “선생님의 가르침 덕분에 국내 최고의 공예과자대회에 나가 두 번씩이나 최우수상을 받았다”고 말했다. 1995년과 1997년에는 프랑스에서 열리는 세계 빵 경연대회와 양과자 경연대회에서 각각 2위와 5위를 했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2000년 10월 국내 제과명장 1호로 선정됐다.
 
  인천 출신인 박 명장은 가난한 집 7남매 중 넷째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자장면 배달, 신문 배달, 전파사 보조기사 등 안 해본 일이 없다. 그러다 17세에 당시 명동 입구에 있던 뉴욕제과에 들어갔다. 제과점 앞으로 전차가 지나다니던 시절이었다.
 
  “당시 김충복 선생님이 계신 풍년제과는 대기자들이 줄을 서 있을 만큼 들어가기 힘든 곳이었어요. 제과점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분 밑에서 일하고 싶어했죠. 저도 마찬가지였는데, 운이 좋았던지 풍년제과에 가지 않고도 그분에게 기술을 배울 기회를 얻었습니다. 뉴욕제과에서 3개월 동안 그분을 초빙해 직원들에게 기술을 가르치도록 한 것이죠.”
 
  그는 “김충복 선생님 밑에서 3개월 동안 공부하고 나니 구름 아래서만 놀던 새가 구름 위로 날아오른 기분이 들었다”고 말했다.
 
  A급 기술자가 된 그는 얼마 후 배우 신영균씨 부인이 운영하던 명보제과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 스카우트 조건은 당시 암사동에 건설된 주공아파트 한 채와 뉴욕제과의 두 배에 달하는 연봉이었다.
 
  “그곳에서 9년 가까이 일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동안 배운 것들을 모두 써먹어 바닥이 났지요. 때마침 제과점 앞이 지하철 공사로 어수선해 김충복 선생님을 찾아가 좀 더 배우고 싶다고 했습니다. 이번에는 연봉을 낮추는 조건으로 옮겨 갔죠.”
 
  당시 김충복과자점은 서울 방배동에 위치해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일하는 틈틈이 국제 과자대회에도 나갔고, 일본 유학도 다녀왔다. 그는 제과와 제빵의 차이에 대해 “제과는 이스트가 안 들어가고, 제빵은 이스트가 들어간다”고 간단하게 설명했다. 또한 “좋은 과자는 반죽할 때 맹물 대신 달걀을 넣고, 마가린 대신 버터를 넣어 굽는다”고 말했다.
 
  김충복과자점은 화과자가 유명했다. 조형적으로 아름다운데다 달지 않으면서 부드러워 멀리서 일부러 찾아오는 고객이 많았다. 1980년대 중반에는 롯데백화점 측이 매장을 내주겠다며 계약할 것을 요청했으나 수수료가 너무 높아 포기했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흐른 지금 박 명장은 자신의 이름을 내건 화과자를 만들어 롯데백화점에서 판매하고 있다. 백화점 측 수수료를 제하고 난 연매출이 60억원에 이른다. 그는 화과자에 들어가는 밤과 고구마, 한천 등의 재료를 산지에 내려가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구입한다고 한다. 빵이든 과자든 제대로 된 맛을 내려면 신선한 재료가 우선이라는 것이었다.
 
  “재료는 선택은 물론 관리도 잘해야 합니다. 신선한 재료일수록 변질도 빠르기 때문이죠.”
 
  박찬회 화과자 공장은 인천시 가좌동에 자리하고 있었다. 5층 건물의 3, 4, 5층을 공장으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푹푹 찌는 바깥 날씨와 달리 공장 내부는 시원하고 청량했다. 그는 “빵은 요리가 아니라 과학이다”라며 “빵 맛은 배합 못지않게 주변 환경이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고 말했다.
 
 
@安彰鉉 안스베이커리 대표 “발효가 맛의 생명”
 
  인천에는 박찬회 화과자 대표 외에 또 한 명의 명장이 있다. 인천시 남동구 구월동에 위치한 안스베이커리의 안창현(安彰鉉) 대표가 그 주인공이다. 그는 2009년 캐나다 캘거리에서 열린 국제기능올림픽대회 제과 부문에 선수 지도자로 출전해 은메달을 획득했다. 제과 부문 역대 최고 성적이었다. 이 공로로 국내 7번째 명장에 선정됐다.
 
  안창현 명장은 기존 선배 명장들에 비하면 신세대라 할 만큼 젊다. 제빵인으로서 걸어온 과정도 선배 세대와는 조금 다르다.
 
  서울 태생인 그는 중학교 졸업 후 신길동에 있는 2년제 직업학교인 한국제과고등기술학교에 다녔다. 이곳은 미(美) 농무성 지원으로 운영되던 학교로 이론과 실습을 병행해 교육했다. 그의 은사는 서울대 농대 출신으로 미국에서 단기 코스로 제빵 공부를 마친 조승환(趙承煥)씨였다.
 
  “나중에 학교 재단 이사장을 지낸 분인데, 학문적으로나 인격적으로 굉장히 훌륭한 분이었어요. 그분에게 ‘빵은 과학이고 정직하다’는 것을 배웠지요.”
 
  졸업 후 그는 종로 2가에 있던 고려당에서 3년 동안 일했다. 이후 군복무를 마쳤고, 강남에 있는 제과제빵 학원에서 강사로 활동했다. 그러다 인천시 구월동, 현재의 자리에 8평 규모의 제과점을 차리면서 독립했다.
 
  “당시 구월동 일대에는 3개의 빵집이 성업 중이었어요. 그런데 빵 만드는 기술이 전혀 과학적이지 않았어요. 빵은 정확한 시간과 환경 조건이 필요한데 그냥 주먹구구식으로 만들고 있었죠. 게다가 맛과 품질이 아니라 안면으로 빵을 팔고 있었습니다. 빵집이 동네 미장원처럼 TV 소리와 주민들 웃음소리로 시끄러웠죠. 시장 조사 결과 경쟁력에서 우리가 앞서리라는 확신이 섰습니다.”
 
  안스베이커리는 개업 3년도 채 되지 않아 주변 시장을 장악했다. 현재 구월동 본점 외에 간석동점, 효성동점 등 인천 지역에 3개 매장이 있고, 경기도 광명시에 1개 매장이 있다. 연간 매출은 40억원 가까이 된다고 한다.
 
  안 명장은 안스베이커리의 경쟁력으로 ‘전통적인 천연효모로 발효시킨 빵’을 꼽았다. 그가 말하는 ‘전통적인 천연효모’란 인공적으로 배양한 것이 아니라 자연에서 얻은 효모균을 말한다. 그는 일반적으로 많이 사용하는 이스트와 천연효모의 차이점을 이렇게 설명했다.
 
  “이스트는 폐당밀을 원료로 빵의 대량생산을 목적으로 단일 순수 배양된 천연 발효제입니다. 천연에서 효모균을 얻는다는 시작점은 이스트와 천연효모가 동일하지요. 하지만 인위적으로 배양 증식된 이스트는 빵을 한 가지 맛으로 균일화하기 때문에 버터와 설탕 같은 첨가 재료로 맛의 차이를 내게 됩니다. 천연효모는 주재료의 종류에 따라 전혀 다른 빵의 풍미와 식감을 내주므로 첨가 재료를 쓸 필요가 없지요.”
 
  전통적인 방식으로 곡물이나 과일을 자연발효해 발효종(醱酵種)을 얻고, 이 발효종을 반죽에 넣어 다시 발효하여 빵을 굽는 과정은 간단치 않다. 시간과 정성이 필요하다. 안 명장은 <제빵왕 김탁구>가 안방의 화제였던 지난해 《천연효모빵》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곡물과 과일을 통해 천연효모를 얻는 방법과 빵을 만드는 과정을 담은 책이다. 그는 “김영모 회장을 통해 천연효모와 자연발효에 관심을 갖게 됐고, 좀 더 많은 제빵인이 이 방식으로 빵을 만들었으면 하는 바람에 책을 냈다”고 말했다.
 

 

@金永模 김영모과자점 회장 “재료 배합량과 발효가 열쇠”
 
  우리 시대 부의 상징이 된 서울 강남구 도곡동 타워팰리스 아파트촌에 가면 이름만 들어도 아는 빵집이 세 개 있다. 두 개는 서로 다른 대기업이 직영하는 빵집이고, 나머지 하나는 김영모(金永模) 명장이 운영하는 김영모과자점이다. 부자들 입맛 잡기 3파전의 승자는 마케팅 전략에서 앞서는 두 대기업이 아니라 오로지 맛으로 승부한 김영모과자점이다. 모 프랜차이즈 제과점 사장은 “대기업이 운영하는 두 매장의 매출을 합쳐도 김영모과자점 매출을 따라잡지 못할 것”이라고 귀띔했다.
 
  김영모 명장은 그 비결에 대해 “고객들의 건강을 생각해 정직하게 만들었을 뿐이다”라고 답했다. 김영모과자점은 서초동 본점을 비롯해 타워팰리스점, 역삼점, 반포점 등 총 4개의 매장이 있다. 연간 매출이 150억원에 이른다.
 
  김영모 명장은 전남 해남에서 태어나 경북 왜관에서 자랐다. 아버지가 신문사 기자였지만 경제적으로 넉넉지 않은데다 가정적으로 불우해 일찍부터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대구고 2학년 때 중퇴하고 대구 시내 제빵 명가였던 최가네 빵집에서 기술을 익혔다. 그가 이곳에 있을 때 미국의 제빵왕으로 유명한 곤잘레스 박사가 미국 소맥협회 협찬으로 제빵기술교육 투어를 왔다. 그는 이 교육을 통해 재료의 배합량에 따라 빵 맛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체계적으로 정리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후 19세 되던 해 상경, 영화배우 하명중씨 부인이 운영하던 제과점 보물섬(서소문 소재)에서 일하다 입대했다. 군 복무 후에는 삼선동 나폴레옹제과점과 무교동 보리수제과점에서 근무했다.
 
  “나폴레옹제과점 시절 공장장은 권상범 명장이었어요. 그분에게 많은 걸 배웠습니다.”
 
  그는 1982년 친구 형님이 운영하던 서초동 빵가게를 인수해 김영모과자점 1호점을 냈다. 그의 빵은 금세 입소문을 탔다. 일찍부터 관심을 가진 천연효모 배양기술을 배우기 위해 유럽의 유명 빵집들을 순례한 후 천연발효 빵을 만들어낸 결과였다. 그는 “숱한 실험과 실패 끝에 한국에 맞는 천연발효종을 개발했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독일이나 프랑스에서 천연발효종을 냉장 상태로 들여왔어요. 그런데 3개월쯤 되니까 변종이 생기면서 썩어버리더군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105년 되었다는 종을 공수해 왔는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원인이 무엇인지 분석한 결과 한국의 기후와 토양이 유럽이나 미국과 다르다는 게 문제였어요.”
 
  그가 개발한 국산 천연발효종은 밀가루 100g(호밀가루 10%)과 물 100g을 섞은 후 상온(18~20℃)에 두면 7일 만에 발효력이 생긴다. 그는 프랑스에서 구입해 온 자동온도조절 설비로 이 발효종을 관리하며 반죽에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천연발효종은 살아있는 미생물이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관리를 소홀히 하면 변종이 생기거나 부패하게 됩니다. 때문에 자동설비 시스템을 갖추었다 해도 3개월에 한 번씩은 변종이 생기지 않았는지 꼼꼼히 체크해야 하죠.”
 
  천연발효종은 일종의 유산균으로 단백질을 먹기 좋게 개선해 주고 풍미를 더하는 역할을 한다. 그는 “밀가루 반죽을 맛있게 발효시키기 위해 이스트의 경우 3.5~4%를 넣어야 하지만 천연효모는 2% 정도만 넣으면 된다”고 말했다.
 
 
@林憲亮 브레댄코 고문 “질 좋은 밀가루가 우선”
 
  (주)신라명과에 재직 중인 임헌양(林憲亮) 명장은 7인의 명장 중 최연장자다. 1939년생인 그는 신라명과가 2008년 론칭한 프랜차이즈 제과점 브레댄코(bread&co) 기술 고문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호프빵 마니아였던 이병철 삼성 창업주가 인정한 제빵사로 유명하다.
 
  임헌양 명장은 배구 명문 인창고 출신이다. 배구선수로 활동했던 그는 여건상 큰 선수로 성장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다른 진로를 모색하다 우연히 제빵사의 길로 접었들었다고 한다.
 
  “1960년대 중반, 아는 분의 소개로 용산 미(美) 8군 기지 안에 있던 유섬(USOM)이라는 곳에 들어갔어요. 유섬은 미국에서 오는 원조물품을 한국에 배급하는 곳이었죠.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고 갔는데, 빵 만드는 일을 시키더라고요. 해보니 적성에 맞아 한 6년 동안 재미있게 일했습니다.”
 
  1970년 막 문을 연 조선호텔로 자리를 옮겨 그곳에 근무하고 있던 유럽 기술자들에게 차원이 다른 제빵 기술을 익혔다. 그는 “독일 제빵사들로부터 체계적인 기술은 물론 재료의 로스를 줄이는 방법도 배웠다”고 말했다. 독일 제빵사들은 달걀 껍데기 속도 손가락으로 훑어 쓸 정도로 알뜰했다고 한다.
 
  1977년에는 신라호텔로 자리를 옮겼다. 입사 당시 이병철 회장이 직접 면접을 보았다고 한다. 제과 사업에 대한 이 회장의 기대는 그만큼 컸다. 그는 자신과 이 회장에 관한 일화 한 토막을 소개했다.
 
  “이 회장이 호프빵을 좋아해 일본에서 공수해다 먹었어요. 맥주 원료인 호프를 넣어 쌉싸래한 맛이 나는 빵이었습니다. 당시 국내에서는 이 빵을 만들 줄 아는 이가 없었죠. 호프빵의 국산화라는 특명을 안고 제가 일본으로 연수를 갔습니다. 그리고 돌아와 호프빵을 만들어 이 회장께 드렸는데, 그 맛이 안 난다고 하더군요. 재료가 달라서 그렇다고 했더니 ‘재주 없는 목수가 연장 나무라는 법’이라며 혀를 차시더군요.”
 
  당시 일본은 세계 각국에서 수입하는 질 좋은 재료들을 사용하고 있었다. 밀의 경우 똑같은 양인데도 반죽을 하면 한국에서 가져간 미국산 밀가루에 비해 일본에서 사용하는 캐나다산 밀가루 양이 훨씬 많았다. 무게도 달랐다. 그는 곧 그것이 글루텐 함량의 차이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 회장의 반응에 자존심이 상한 그는 즉석에서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이 회장이 일본 장인을 불러 한국 재료로 호프빵을 만들게 했다. 맛이 있을 리가 없었다. 이번에는 그의 주장에 따라 글루텐 함량이 높은 밀가루로 만들었다. 맛을 본 이 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때부터 삼성물산이 전 세계 밀가루를 수입했다고 한다.
 
  “브레댄코는 빵의 종류에 따라 다른 밀가루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제일제당에서 우리가 원하는 밀가루를 공급해 주고 있습니다.”
 
  브레댄코는 ‘자연주의 베이커리’를 경쟁력으로 내세운 프랜차이즈 제과점이다. 임헌양 명장은 “과일 자연발효종을 넣거나 이스트를 조금 넣은 후 저온숙성시키는 방식으로 빵을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池圭卨 (주)파리크라상 고문 “냉동생지는 휴면생지”
 
  (주)파리크라상의 지규설(池圭卨) 기술고문은 1960년 삼립식품(SPC 그룹 모기업)에 입사한 후 오늘에 이르고 있는 50년 경력의 제빵 장인이다. 삼립식품 공전의 히트작인 10원짜리 크림빵(1964년 출시)과 100원짜리 호빵(1970년 출시)을 만든 주인공이다.
 
  1964년 국내 최초로 자동화 시스템으로 빵을 양산하면서 출시된 크림빵은 하루에 15만 개가 팔려나갔다고 한다. 그는 “크림빵에는 많은 사람을 배부르게 하고자 빵을 만든 창업주 허창성(許昌成) 명예회장의 철학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고 말했다.
 
  삼립식품은 미국 원조 밀가루로 바게트처럼 아무것도 첨가하지 않은 빵을 만들어 전국 초등학교에 배급하기도 했다. 지금 40~50대에게 이 빵들은 모두 배고팠던 시절의 추억으로 남아 있다.
 
  SPC 그룹의 2세 경영인 허영인(許英寅) 회장은 1986년 파리크라상을 설립하고 파리바게뜨라는 브랜드를 론칭했다. 이때도 제빵기술 부문은 지규설 고문이 도맡아 진행했다. 국내 대표적인 프랜차이즈 제과점인 파리바게뜨는 현재 전국에 2980개의 가맹점을 두고 있다. 직영점인 파리크라상은 물론 자매 브랜드인 던킨도너츠, 배스킨라빈스까지 합한 SPC 그룹 전체 매출은 2조8000억원(2010년 기준)에 이른다.
 
  서울의 경우 한 집 건너 파리바게뜨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파리크라상이 제빵 시장을 장악한 상태다. 그러다 보니 맛에 대한 불만도 속속 터져 나온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프랜차이즈 제과점은 냉동생지를 사용해 생지(반죽한 것을 숙성시킨 것)를 사용하는 자영제과점에 비해 신선한 맛이 없다”는 것이다.
 
  냉동생지는 공장에서 반죽과 성형을 해서 급랭으로 얼린 상태를 말한다. 현재 국내 프랜차이즈 업체들은 대부분 본사 공장에서 냉동생지 상태로 전국 가맹점에 공급하고 있다. 말하자면 매장에서는 냉동생지를 해동시켜 오븐에 굽기만 하면 되는 시스템이다. 전문가들은 “냉동생지의 냉동과 해동이 반복되면 효모균이 죽어서 악취가 나게 되는데, 이를 최소화하기 위해 첨가제나 개량제를 넣는 경우가 많아 빵 맛이 떨어지는 것”이라고 분석한다.
 
  지규설 고문은 이 같은 분석에 대해 “일부 영세한 업체를 두고 하는 말인 것 같다”며 “파리크라상은 냉동 유통 시스템이 완벽해 생지가 얼었다 녹았다 할 일이 없다”고 말했다.
 
  “생지를 급랭시켜 공급하는 파리크라상의 유통 시스템은 세계가 놀랄 정도로 완벽합니다. 효모가 폐사할 위험이 전혀 없다는 뜻이지요. 그 때문에 우리는 ‘냉동생지’라 부르지 않고 ‘휴면(休眠)생지’라 부르고 있습니다. 또한 파리바게뜨 제품 전체를 휴면생지로 공급하고 있는 건 아닙니다. 일부 식빵과 단팥방, 소보로빵 등은 완제품으로 배달하고 있지요.”
 
  파리바게뜨는 냉동생지로 공급되는 비율이 50~60% 수준이라고 한다. 지규설 고문은 “냉동생지의 법적 유통 기한은 6개월이지만 파리바게뜨는 일주일 이상 가지 않게 제한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SPC 그룹은 지난 8월 초 사업 성장 축을 국내에서 해외로 전환, 국내의 경우 양적 팽창보다 질적 향상에 집중하겠다고 발표했다.

 

 : 서철인  월간조선 기자  ironin@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