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억 ‘할마·할빠’ 경제 급성장…
◇‘황혼 육아’ 확산
손자·손녀를 돌보느라 할아버지·할머니가 시간과 돈을 투자하는 일은 비단 우리나라만의 풍경이 아니다. 전 세계적으로 할아버지·할머니 인구가 15억명을 넘어서며 조부모가 손주들을 돌보는 ‘실버 세대의 육아’가 널리 확산되고 있다. 맞벌이·한부모 가정 증가, 저출산으로 인한 한 자녀 시대, 평균 수명 증가에 따른 고령 인구 증가 등이 맞물리면서 각국에서 ‘할마(할머니+엄마)·할빠(할아버지+아빠) 육아’가 보편화되고 있다.
이런 ‘조부모의 부모화’ 흐름에 맞춰 ‘손주 돌봄 휴가’와 같은 예전에 없던 정책이나 복지 제도가 등장하고 있다. 이와 함께 경제력을 갖춘 조부모가 육아 시장의 ‘큰손’으로 등장해 손주들을 위한 지출을 아끼지 않으면서 관련 시장도 세계 각지에서 커지고 있다.
독일 막스플랑크 인구학연구소 분석에 따르면, 전 세계 조부모는 작년 기준 15억4000만명으로, 세계 인구의 약 20%였다. 1960년 4억9000만명에서 크게 늘었다. 저출산과 고령화 여파로 15세 미만 아이 한 명당 조부모 숫자가 1960년 0.46명에서 0.8명으로 증가했다. 그만큼 손주 한 명의 양육에 쏟을 수 있는 조부모가 늘어난 셈이다. 막스플랑크 인구학연구소는 2050년이면 조부모가 21억4000만명에 달해 세계 인구의 22%를 차지할 것으로 예상했다.
◇“할머니는 세계경제의 숨은 영웅”
조부모들의 상당수는 손주 육아에 참여해 자녀 세대 경제 활동에 도움을 주고 있다. 미국 여론조사기관 해리스폴이 지난 2월 성인 2048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해보니 맞벌이 부모의 42%가 아이의 할머니에게 육아를 의지하고 있었다. 이들 가운데 20%는 ‘할머니가 돌봐주지 않으면 직장을 그만둬야 한다’고 답했다. 유치원 폐원 같은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 가장 먼저 찾는 사람도 할머니(41%)였다. 포천지는 “할머니의 도움이 없다면 더 많은 일하는 부모가 자녀를 돌보기 위해 일을 그만둬야 할 것”이라며 “할머니들은 미국 경제의 숨은 영웅”이라고 했다.
다른 나라들도 마찬가지다. 호주 공공기관 호주가족연구소가 재작년 조부모 2383명을 조사해 봤더니 조부모 5명 가운데 2명꼴로 한 달에 한 번 이상 손주들을 돌보는 것으로 나타났다. 손주 나이가 어릴수록 양육 참여율과 빈도가 더 높았다.
2017년 영국 조사에선 50세 이상 조부모 1250만명 가운데 500만명 정도가 손주를 정기적으로 돌보고 있었는데, 대부분이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손주를 보살폈다.
우리나라에서도 황혼 육아 현상이 흔해졌고, 팬데믹 동안 더욱 두드러졌다.
2020년 고용노동부가 직장인 500명을 조사한 결과 코로나로 인한 휴원·휴교 기간 동안 자녀를 돌본 사람이 조부모·친척(43%)인 경우가 부모(36%)보다 더 많았다. 국책연구기관인 육아정책연구소의 이윤진 선임연구위원은 “육아 휴직이 확대되고는 있지만 여전히 자유롭게 이용하지 못하는 직장인이 많은 데다 혈육이 아닌 사람에게 맡기는 것보단 조부모에게 맡기는 게 안전하다는 인식도 한몫한다”고 말했다.
손주 돌봄은 정식 일자리는 아니지만 경제적 가치를 추산해볼 수는 있다. 영국 보험사 선라이프가 일주일 평균 8시간 손주를 돌본다고 가정해 계산해보니 연간 4027파운드(약 670만원) 가치가 있었다. 정기적으로 손주를 돌보는 조부모가 500만명 이상인 점을 고려하면 조부모가 영국의 연간 보육 비용을 200억파운드(약 33조원) 이상 낮춰주는 셈이다.
조부모가 받쳐주면 특히 아이 어머니의 경제활동 참여율을 올리는 데도 도움이 된다. 미국의 한 연구에선 할머니와 25마일(약 40km) 이내에 거주하면 12세 미만 자녀를 둔 기혼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이 최대 10%포인트 높아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양질의 보육 시설이 부족한 나라일수록 조부모의 존재는 중요하다.
중남미 개발 기구인 미주개발은행(IDB)의 연구에 따르면, 멕시코에서 할머니가 사망한 이후의 변화를 추적해봤더니 어머니 쪽의 경제활동 참여율이 12%포인트나 감소했다. 일을 계속 하더라도 근무시간과 근로소득이 줄었다.
◇영국은 ‘보너스 연금’,
조부모의 손주 양육은 과거에는 가정 내 사적인 도움으로 간주됐다. 하지만 갈수록 보편화되며 경제활동의 한 축으로 자리 잡다 보니 여러 나라가 정책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영국에선 조부모가 12세 미만 손주를 돌보는 기간을 국민연금 납입 기간으로 인정해준다. 따로 직장에 다니며 보험료를 납부하지 않아도 추후 연금을 받을 때 가입 기간으로 산정, 연금액을 늘려주는 제도다. 원래는 부모가 받을 수 있는 혜택이었지만 2011년부터 조부모에게 이전할 수 있게 했다.
영국 정부는 “손주를 돌보는 조부모도 유급 일자리에 종사하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사회에 기여하고 있으므로 직장인과 같은 수준으로 연금 보호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팬데믹 동안에는 전화나 화상 같은 비대면 방식으로 조부모가 돌본 경우도 양육으로 인정했다.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는 “손주를 돌봐 연금 납입 기간을 30년에서 35년으로 늘리면 연간 1375파운드(약 230만원)를 더 받을 수 있다”고 분석했다.
◇일본은 ‘손주 휴가’
일본 후쿠시마현 고리야마시 공무원인 우에키 카즈오(59)씨는 지난 2월 세살배기 손녀와 한 살 손자를 돌보기 위해 ‘손주 휴가’를 냈다. 고리야마시가 육아 휴가를 쓸 수 있는 대상을 부모에서 조부모까지 넓히면서 기존 휴가와는 별도로 연간 8일간 휴가를 쓸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우에키씨는 두 손주를 하루 7시간 돌보며 기저귀를 갈아주고 퍼즐 놀이를 함께 했다. 그는 요미우리신문에 “직장 복귀 준비를 하느라 바쁜 둘째 딸을 위해 손주 휴가를 냈다”며 “아이들이 다치지 않도록 지켜보느라 정신이 없었다”고 했다.
일본 지자체에선 저출산 해결책으로 조부모 돌봄을 지원한다. 일본 미야기현은 올해부터 ‘손주 휴가’를 도입했다. 고리야마시와 비슷한 형태로 손주 출산 시 2일, 손주 돌봄 시 5일의 유급 휴가를 추가로 쓸 수 있다. 미야기현은 정년을 단계적으로 65세로 올릴 예정인데 이에 따라 손주가 있는 직원이 증가할 것으로 보고 지원책을 마련한 것이다. 니가타현 아가노시는 ‘손주 육아 수첩’을 만들어 육아지원센터 정보나 아이와 놀러갈 만한 장소를 알려주고, 손주가 아플 때 대처법도 일러스트 형식으로 안내하고 있다.
◇기업 차원에서도 직원의 손주를 염두에 둔 복지 혜택이 생겨나고 있다.
2500명 직원을 둔 영국 보험·여행 기업 사가는 2021년 말부터 손주가 태어났을 때 일주일 유급 휴가를 주고 있다.
미국 통신 장비 업체 시스코도 2017년부터 최대 3일간 손주를 위한 휴가를 쓸 수 있게 했다.
일본 대형 식품 회사 에자키 글리코도 2019년 손주 휴가 제도를 도입해 직원들이 손주 운동회 참여 같은 다양한 목적으로 이용할 수 있게 만들었다.
◇미국 조부모들, 손주 위해 240조원 쓴다
구매력이 높은 베이비붐 세대(1946~1964년생)에 이어 이제는 X세대(1965~1980년) 일부까지 조부모 대열에 합류하면서 이들을 겨냥한 ‘손주 돌봄 시장’도 커지고 있다. 이들은 과거의 노인 세대보다 주머니 사정이 좋아 손주들을 위해 과감하게 지갑을 여는 ‘큰손’들이다.
미국 은퇴자협회에 따르면 손주를 위한 조부모 1인당 지출은 연간 2562달러(약 340만원) 정도다. 미국에 전체 조부모가 7000만명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연간 약 1790억달러(약 240조원)가 손주 양육과 관련 있는 시장에 쏟아지는 셈이다. 주로 손주들을 위한 선물·용돈을 주거나, 학교 등록금·납부금을 내주는 경우가 많다. 주택 임차료나 의료비를 지원하는 경우도 있다.
◇육아용품·서비스 시장
조부모들은 미국 장난감 시장 매출의 25%를 차지하는 핵심 구매 계층이다. 시장조사업체 NPD에 따르면 미국 장난감 시장은 2018년 280억달러(약 38조원) 규모였는데 이 가운데 조부모가 사주는 액수가 25%를 차지했다.
주로 50·60대인 이들 조부모는 온라인 쇼핑에도 능숙해 오프라인 구입률(85%)이 온라인 구입률(72%)과 크게 차이 나지 않았다. NPD는 “여전히 부모가 장난감에 가장 많은 돈을 쓰지만 조부모 지출도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다”고 했다. 국내도 마찬가지다. 전자상거래 업체 G마켓의 1분기 유아·아동 장난감 카테고리 구매 건을 분석해보니 36%가 50대 이상에서 나왔다.
이런 조부모의 경제력을 등에 업고 저출산에도 각국 유아·아동을 대상으로 하는 시장은 커지고 있다.
중국에선 출생아가 2015년 1655만명에서 2020년 1200만명으로 급락했지만 같은 기간 유아·아동복 시장 규모는 1400억위안에서 2218위안으로 58% 커졌다. 코트라는 “맞벌이가 늘면서 중국에선 양가 조부모가 번갈아가며 어린 손주를 양육하는 ‘4+2+1(양가 조부모+부모+자녀)’ 양육이 일반적인 일이 됐다”며 “이런 육아 구조와 이에 따른 ‘골드 키즈’ 등장이 어린이 의류 시장을 키웠다”고 분석했다.
저출산으로 신음하고 있는 일본 역시 육아용품·서비스 시장은 2015년 3조4985억엔에서 2020년 4조3120억엔으로 20% 이상 확대됐다. 구매력 높은 베이비붐 세대가 조부모가 되면서 손주를 위해 고급 유아용품을 구입하는 사례가 늘어난 것도 시장 성장을 이끈 주요 요인으로 분석된다.
여행업계에선 조부모와 함께하는 여행 수요를 주목하고 있다. 미국가족여행협회가 작년 1002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47%가 다세대(조부모+부모+자녀) 여행을 계획 중이었고, 부모를 빼고 조부모와 손주만 함께 가는 여행을 계획 중이라는 답변도 15% 나왔다. 국내도 마찬가지다. 하나투어 관계자는 “코로나 이후 단체 여행보단 소그룹 여행 수요가 많아졌는데 관련 상품에 3대 가족 여행 문의가 꾸준히 늘고 있다”고 했다.
◇노년 우울증 낮추지만 스트레스도 커
손주 돌봄이 조부모의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는 연구들도 이뤄지고 있다. 대체로 ‘적당한 시간 돌보면 우울증 예방 등에 도움이 된다’는 결론이 여럿이다.
영국 사우샘프턴대 연구진은 유럽 조부모 2만4000여명의 2010~2018년 데이터를 분석했다. 손주를 꾸준히 돌보는 조부모의 우울증 증상은 손주를 돌보지 않는 조부모보다 1.4가지 적어 우울증 위험도가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 계명대 의대 김대현 교수팀 연구에서도 손주를 육아 중인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우울증에 걸릴 위험이 43% 낮았다.
독일 노인 500여 명을 20년간(1990~2009년) 관찰한 데이터를 분석한 한 연구에선 가끔 손주를 돌보는 조부모의 사망 위험이 손주 양육을 전혀 하지 않는 경우보다 37% 낮다는 결과가 나왔다. 손주를 돌본 조부모의 절반은 1990년 첫 인터뷰를 하고 10년 후에도 살아 있었던 반면, 그렇지 않은 노인의 절반은 5년 이내에 사망했다.
그러나 손주 양육을 놓고 스트레스가 쌓이고 자녀와 갈등을 겪는 경우도 적지 않다.
미국 미시간대 설문조사에 따르면 부모 응답자의 40%는 ‘조부모가 손자에게 너무 관대하다’고 답한 반면, 14%는 ‘너무 엄하다’고 답했다. 이들은 아이 양육 규율, 음식, 시청 시간, 취침 시간 등 다양한 분야에서 부딪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최근엔 조부모 세대가 자녀 육아 때는 경험하지 못한 스마트폰과 인터넷이 갈등 소재가 되고 있다. 미국 비영리 기관 클리브랜드 클리닉의 로난 팩토라 박사는 “지나친 돌봄은 오히려 역효과를 낳고 스트레스와 노화의 원인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손주를 키우는 조부모들이 스트레스를 호소하는 일이 잦다. 임영주 부모교육연구소장은 “24개월 미만 아이의 경우엔 보육기관에 오래 두고 싶어하지 않는 부모도 많아 조부모 도움이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며 “자녀와 갈등을 줄이려면 사전에 육아계약서를 작성하는 게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조언했다. 양육 장소와 내용, 시간과 기간, 금전적 보상 등을 자녀 부부와 사전에 충분히 협의하라는 의미다.
WEEKLY BIZ
성유진 기자
입력 2023.04.27.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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