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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테크〕충주 조륵의 묘에 세워진 자인고비(資仁考碑)

Paul Ahn 2022. 7. 5. 13:29

〔짠테크〕충주 조륵의 묘에 세워진 자인고비(資仁考碑)

(nculture.org)

 

조륵은 충주 자린고비라 불리는 인색한 인물이다.

파리 다리에 묻은 장이 아까워 따라가기도 하고, 조기를 매달아 놓고 쳐다보며 밥을 먹을 정도로 매우 절약하였다. 임금에게까지 조륵의 행동이 전해지자 임금은 어사를 보내어 알아오도록 하였다.

 

조륵은 환갑을 기점으로 해서 구두쇠 노릇을 중단하고 주변 이웃들에게 모아놓은 재산을 베풀었다. 어사가 이 사실을 알리자 임금은 조륵을 기특하게 여겨 벼슬을 주었다.

 

이웃 사람들은 조륵의 선행을 아름답게 여겨 자인고비(資仁考碑)를 세웠다고 한다.

 

 

◇충주 자린고비 조륵

 

조선 인조 때의 인물 조륵(趙肋)은 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삼봉리에서 태어났다. 조륵은 지독한 구두쇠로 유명하였다. 현재의 행정구역으로는 음성이지만 당시에는 충주목에 속한 땅이어서 충주의 자린고비라 불렸다.

 

조륵의 묘는 충청북도 충주시 신니면 대화리 화치마을에 있다. 조륵은 매우 인색하고 재물을 아끼는 데 몰두하였지만 환갑을 기점으로 하여 어진 인심을 베풀었다. 그래서 자인고(資仁考)라 고쳐 불러졌으며 묘소에는 자인고비(資仁考碑)의 비석이 세워져 있다.

 

지독한 구두쇠, 자린고비

 

 

◇조륵의 환갑잔치에 초대된 암행어사

 

조선시대 충주의 자린고비 조륵은 매우 검소한 생활을 하였다. 장독에 앉았던 파리가 다리에 장을 묻히고 날아가자 그 장이 아까워 멀리까지 따라갔지만 결국 잡지 못했다. 자린고비가 파리를 따라가 어정댔다는 마을은 어정개라는 이름이 붙기도 하였다.

 

조기 반찬을 상에 놓고 먹지 않고 천정에 매달아 놓고 밥을 먹은 뒤 쳐다보았다. 아들이 밥 한 숟가락에 조기를 두 번 쳐다보자짜다 짜! 한 번만 쳐다 보거라!”라며 야단을 치기도 하였다. 또한 신발이 닳는 것이 아까워 신발을 들고 걸어 다니는 한편, 한여름에도 부채가 닳을까 염려하여 부채를 부치지 않고 부채 앞에서 머리를 흔드는 우스꽝스러운 행동까지 하였다.

 

자린고비의 이러한 일들이 조정에까지 알려지자 임금은 암행어사를 보내어 진상을 조사하게 하였다. 어사는 객인(客人)인척 하며 자린고비의 집에 머물면서 그를 지켜보았는데, 예상과 달리 오히려 성대한 대접을 받아 어리둥절하였다.

 

어사가 주변을 수소문해보니그렇게 고약하게 아끼더니 환갑이 되는 해부터는 변했습니다. 마을에 흉년이 들자 창고를 털어 먹을 것을 나누어 주더군요.”라는 것이었다. 어사가 이러한 사연을 알고서 며칠 뒤 떠나려 하니 자린고비가 곧 자신의 환갑이라며 잔치를 보고 가라면서 더 있기를 청하였다.

 

자린고비의 환갑날이 되자 많은 손님들이 모였다. 자린고비는 잔치 음식을 성대히 차려 베풀었다. 그러면서이제껏 나 혼자 잘 살려고 구두쇠처럼 지내온 것이 아니오. 환갑을 맞이하여 구두쇠 생활은 청산하고 이제부터는 베풀면서 살겠소.”라며 자기의 재산을 이웃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암행어사는 자린고비의 행적을 임금에게 상세히 보고하였다. 임금은 자린고비를 기특하게 생각하여 정3품의 벼슬을 주어 칭찬하였다. 이웃사람들은 자린고비가 선행을 베푼 일을 아름답게 여겨인자한 어버이라는 의미를 지닌 자인고비(慈仁考碑)라는 별명을 붙여주고 비석을 세워 그의 행적을 기렸다고 한다.

 

 

◇베풀기 위한 근검절약

 

조륵은 무모할 정도로 절약에 몰두하여 인색하기 짝이 없는 자린고비였다. 기이한 행동으로 인해 눈살을 찌푸리게도 하고 웃음을 터지게도 한다. 하지만 환갑을 계기로 해서 마음을 바꾸어 재산을 베풀면서자인고비라는 별명을 얻기까지 한다.

 

조륵이 재물을 아껴 부를 축적하는 점에서 근검절약 정신이 강조되면서도 한편으로는 재물을 과연 어떻게 쓰는 것이 좋은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하나의 해답을 보여주기도 한다.

 

절약정신과 선행에 대한 강조가 자린고비의 이야기를 통해 이루어지면서 교훈적인 메시지가 전달되고 있다.

 

 

 

신니면 대화리 자인고조륵선생비석(薪尼面 大花里 慈仁考趙先生碑石)

(daum.net)

 

•위치 : 충북 충주시 신니면 대화리 산 29-3

 

신니면 대화리 화치에 있는 조선조때 자선사업가인 한양인 조륵의 무덤을 지키는 묘비입니다. 묘비는 후손들에 의하여 1995년에 세웠습니다.

 

조선 인조(仁祖)[1595~1649] 때 태어난 조륵(趙肋)의 묘가 신니면 대화리 화치마을에 있다. 조륵은 현재의 행정구역으로는 음성군에서 출생했다고 하나 전에는 그곳이 충주목에 속해 있어 충주의 자린고비이다. 그는 재물을 절약하여 어진 인심을 베풀었으므로 자인고(慈仁考)라 하며, 그의 묘소에는 자인고비(慈仁考碑)의 비석이 있다.

 

 

본관은 한양(漢陽). 선조 때 성균진사(成均進士)를 지낸 조경(趙經) 4세손이며, 음성에서 중부참봉(中部參奉)을 지낸 조유증(趙惟曾)의 넷째 아들이다. 조륵은 슬하에 5남매를 두었다.

 

조륵은 평생 부지런히 일하고 절약하여 많은 재산을 모았다. 숙종 때 흉년이 들어 많은 사람이 굶주리자 모은 재산을 나누어 진휼하니, 호남과 영남 양도의 굶주린 백성 만여 명이 구제되었다. 이에 지방민이 비를 세워 덕을 칭송하였고 관청과 향리 등에서 서로 표창하여 칭송하니, 임금이 이를 듣고 상을 내리고 여러 차례 명하여 벼슬을 내렸으나 모두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조륵이 죽어 장례를 치를 때 입관을 위하여 상여를 운구하는 데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불어 상여의 앙장(仰帳: 상여 위에 포장같이 덮은 천)이 날아갔다고 한다. 이를 따라 가보니 묘 터가 좋아 처음 잡았던 터는 두고 앙장이 떨어진 곳에 묘를 조성하여 지금까지 이르고 있다고 한다.

 

조륵이 죽은 후 조륵의 도움을 받은 많은 사람이 비를 세웠으니 비의 이름이자인고비(慈仁考碑)’였다. 자인고비는 충청북도 충주시 신니면에 소재한 신덕저수지(용원저수지) 근처에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저수지에 잠겨 고증할 길이 없다.

 

1995 10월 후손들에 의해 충청북도 충주시 신니면 대화리 화치마을 뒷산 중턱에 자인고비가 다시 세워졌다.